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17화 (117/169)

117화 인간, 드워프, 엘프, 그리고 인간(3)

#1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땅으로 추락한 보스페로스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멋들어진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뻗어 있던 두 개의 뿔 중 하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우람한 몸통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던 털들은 온통 새카맣게 그을린 상태였으며, 활짝 뻗으면 10여 미터에 이르렀던 거대한 날개 역시 처참하게 찢어지고 부러진 채 대지 위에 널부러진 모습.

프르르르르......

지면에 처박힌 채 헛바람 소리만 연신 토해내고 있는 보스페로스의 모습에서,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창공을 지배하던 최상급 몬스터의 위용을 찾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파아아아앗

쿵쿵쿵쿵쿵쿵쿵쿵쿵......

활을 소환 해제한 뒤, 각자의 무기를 꺼내든 2조의 오너들이 보스페로스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갔다.

땅으로 추락한 창공의 제왕을 처리하는 것은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이아의 외부 통신 마법진으로부터 스노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칼튼을 도와라, 이파니.]

말을 마친 스노우는 이파니의 대답은 필요치 않다는 듯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에는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뱀 형태의 최상급 몬스터 라비린토스가 드워프들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한편.

엘프 공주 이파니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조금 전, 가디언 보스페로스가 일격을 허용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분명 빗나갔어. 내 화살은...’

보스페로스는 과연 최상급 몬스터답게 에스페로로부터 쏘아진 화살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몸을 피한 자리로 날아든 또 한 발의 화살에 적중당하며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파니가 경악한 것은 스노우가 쏘아낸 화살에 실린 엄청난 위력과 신기에 가까운 정령술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정말로 피할 위치를 미리 알고 있던 게 아니고서야...’

화살의 경로를 변경하는 것 정도는 이파니에게도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엘프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란 것이 주어져야만 가능한 일.

적어도 소환사가 의지를 전달하고, 의지를 전달받은 정령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나마 존재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려 최상급 엑스퍼트인데다 상급 정령사인 이파니 자신이, 2700rp급 기간트 아르테미스에 탑승한 채 전력을 다해 쏘아낸 화살이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보스페로스에게 당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고.

그것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낸 보스페로스의 움직임은 ‘찰나의 찰나’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 그가 쏜 화살의 궤도가 변했고... 명중했어.’

물론 이파니 역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169년을 살아온 하이엘프, 그것도 ‘천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하이엘프의 감각이 그것을 어렴풋이 포착해 낸 것일 뿐.

단 한 방에 최상급 몬스터를 죽음 직전으로 내몰아 버린 위력도 놀랍거니와, 그런 위력이 담긴 화살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해내는 그의 정령술은 경이로움 그 자체.

물론 이는 기간트의 마력엔진으로 인해 폭증한 정령술에 더해, 오직 스노우만이 보유한 온갖 스킬들이 조합되어 이루어진 결과였지만.

스킬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파니는 어쩌면 정령술에 관한 스노우의 재능이, ‘대정령사’인 자신의 스승에 필적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파니의 상념을 깨운 것은 보스페로스의 숨통을 끊고 돌아온 토벌 2조의 오너들이었다.

[이파니님. 한시라도 빨리 3조에 합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칼튼님이......]

[벌써 꽤 여럿이 당한......]

[어서 지원을......]

그제서야 현실 세계로 돌아온 이파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죠, 그 멍청이를 구하러.]

#2

라비린토스를 상대하는 11인의 드워프 오너들은 꽤나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진 몬스터라 한들, 120여 미터에 달하는 몸길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 거대한 몬스터의 외피가, 마력이 듬뿍 담긴 기간트의 칼질로도 상처를 입히기 힘들 정도로 단단하다면?

게다가 설상가상, 그 단단한 외피로부터 기간트의 외부 장갑을 부식시켜 버릴 정도로 강력한 산성독이 뿜어져 나온다면?

어느 모로 봐도 상대하기 수월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토벌 1조에는 대륙급 강자이자, ‘방어 능력’으로만 한정한다면 대륙 10강의 말석 정도는 차지할 만하다 평가받는 오펠로 브롬이 존재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벌써 세 번째.

보랏빛 광채에 휩싸인 라비린토스의 머리와 불꽃에 휩싸인 에키드나의 대검이 부딪쳤다.

츠르르르르르르륵

[크으윽...]

충돌의 순간.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거대한 몸뚱어리를 휘청인 최상급 몬스터의 입으로부터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고, 허공에서 30여 미터를 튕겨져나간 흑색 기간트의 외부 통신 마법진에선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전투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비린토스의 몸을 뒤덮고 있는 보랏빛 광채가 아주 조금 약해진 정도였다면, 에키드나의 검에서 뿜어지는 불꽃은 처음과 비교해 채 절반에도 못 미치는 화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상체 외부 장갑 파손율 : 43.9%]

[하체 외부 장갑 파손율 : 37.8%]

오펠로 브롬의 강력한 마력을 지속적으로 주입받았음에도, 에키드나의 외부 장갑은 점점 더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 번... 무리하면 두 번 정도가 한계인가?’

외부 장갑의 파손율이 50%를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부 장갑과 골격 그리고 마법 방어진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공세를 멈추는 순간, 지금의 대치 상황이 단번에 깨져 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올리며 불꽃을 피워올리는 오펠로 브롬이었다.

티잉

타아아앙

티잉

그 사이 라비린토스의 눈을 노린 원거리 견제조의 화살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설령 표적까지 정확하게 도달했다 한들, 여전히 건재한 녀석의 마력장으로 인해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단지 신경 분산시켜 오펠로 브롬과 근접조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효과 정도는 있었기에, 쉬지 않고 손을 놀려 화살을 쏘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라비린토스와 에키드나의 네 번째 충돌.

[크윽...]

보랏빛 광채에 휩싸인 라비린토스의 이빨에 에키드나의 어깨 장갑이 뜯겨 나갔고, 동시에 대검에서 타오르던 불길 역시 완전히 꺼져버렸다.

쿠우우우우웅

다행히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중심을 잡은 탓에 땅바닥에 처박히는 신세만은 면한 오펠로 브롬이 대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상체 외부 장갑의 파손율이 50%를 넘어섰으며, 하체 외부 장갑 역시 아슬아슬하게 50%를 밑돌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젠장, 잔머리를 굴리다니...’

앞선 세 차례 충돌과 비슷한 힘을 발휘한 오펠로 브롬과는 달리, 라비린토스는 순간적으로 훨씬 더 많은 마력을 쏟아부어 에키드나에 치명상을 입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 번 정도는 어떻게든 부딪쳐 볼 수 있겠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서 있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펠로 브롬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이 토벌의 성공이, 라플론 광산을 되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가 마력 폭주까지 각오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던 찰나.

[다섯을 셀 테니, 모두 그놈으로부터 떨어져라.]

전장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외침.

오펠로 브롬을 비롯한 드워프 오너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자신들의 전장으로부터 4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굳건히 서 있는 화려한 외형의 붉은색 기간트.

[가이아?]

거리로 보아 마법적인 힘을 이용해 목소리를 증폭시킨 것이 틀림없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가이아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프리가모스를 잡았나?]

[몬스터들을 죄다 처리한 모양이군.]

[작전이 성공한 건가?]

거대한 몸집의 라비린토스가 전장으로 난입하는 걸 막기 위해, 다른 토벌조와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로 유인한 상태였기에.

다른 곳의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오펠로 브롬과 1조의 오너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을 오래 만끽할 시간은 없었다.

차르르르르르르르륵

[하나!]

가이아의 등으로부터 마력포가 올라오는 동시에.

카운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둘!]

가이아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마력의 움직임.

그 비현실적인 마력의 유동에 경악한 오펠로 브롬이 황급히 외쳤다.

[근접조! 근접조부터 이탈해! 빨리 움직여! 나머지는 화살로 엄호한다. 가디언이 몸을 빼게 놔둬선 안 돼!]

활을 든 기간트의 오너들은 딱히 표적이랄 것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상대가 워낙에 몸집이 큰 몬스터였기에 단순히 시위를 놓기만 해도 빗나갈 일은 없었다.

물론 그렇게 몸통이나 머리를 맞춰봐야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의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셋!]

가이아로부터 시작된 불길한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한 라비린토스.

녀석이 섬뜩한 울음을 토해내며 시선을 돌린다.

이를 본 오펠로 브롬이 급격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공격 중지! 모두 피해에에에에에에에!]

이에 활을 소환 해제하며 황급히 물러나는 다섯 기의 기간트.

그리고 멈추지 않는 카운트.

[넷!]

라비린토스의 몸에 서린 보랏빛 광채가 한층 밝기를 더했고.

녀석의 하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을 지닌 몬스터라하여 움직임이 굼뜰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크나큰 오산이었다.

물론 거대한 몸뚱어리로 인한 에너지 소모가 극심하여 빠른 속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순간적인 움직임만큼은 최상급 몬스터답게 무척이나 재빠른 라비린토스였다.

위기를 감지한 거대한 몬스터가 황급히 자리를 이탈하려던 찰나.

[크아아아아아아아앗!]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검이 녀석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가디언의 이탈을 막기 위한 늙은 드워프 전사의 발악과도 같은 일격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불꽃의 대검에 정신을 빼앗긴 라비린토스의 움직임이 일순간 지체되었고.

타아아앗

검을 내던진 에키드나는 남은 마력을 쥐어짜내어 헐레벌떡 대지를 박찼다.

[다섯!]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지가 개벽할 듯한 폭발음이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찰나의 시차를 두고 두 번째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폭발의 진원지에서 시작된 거대한 먼지구름이 온 사방을 뒤덮었다.

크에에에에에에에엑

쿠아아아아아아아앙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

.

.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수백의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대며 사방으로 줄행랑을 쳤고.

칼튼 에거시의 첼시와 이파니의 아르테미스를 비롯한 40여 기의 기간트들과, 그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전투를 치르고 있던 2족 보행 미확인 최상급 몬스터 역시...

모두가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 채 폭발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

먼지구름이 모두 가라앉은 폭발의 진원지에 남아있는 것은.

몸통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채 대지 위에 몸을 늘어뜨린.

최상급 몬스터이자 가디언‘이었던’.

라비린토스의 검게 그을린 하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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