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인간, 드워프, 엘프, 그리고 인간(4)
#1
대폭발의 여파가 잦아든 전장은 일순간 정적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꽤 떨어진 위치에서 쉴 새 없이 토벌대를 괴롭히고 있던 이족 보행 가디언조차, 잠시간 움직임을 멈춘 채 폭발이 일어난 방향을 바라보며 굳어버렸을 정도.
마지막까지 라비린토스의 움직임을 방해하느라 제대로 몸을 피하지 못한 오펠로 브롬은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었다.
이미 50% 이상 망가져 버린 에키드나의 외부 장갑으로 저 무시무시한 폭발의 여력을 감당하기엔, 폭발의 진원지와 자신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던 탓이다.
하지만 전장을 가득 메웠던 먼지구름이 가라앉은 뒤.
대폭발 당시의 위치에서 한참이나 떠밀린 장소에서 정신을 차린 오펠로 브롬은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있음에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껴야만했다.
“이게 대체... 응?”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킨 뒤 멀쩡한 팔과 다리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펠로 브롬은 그제야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반투명한 구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마법?”
그랬다.
거대한 폭발에 휘말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던 그를 구원한 것은, 마력포를 발사한 직후 스노우가 발현한 세 겹의 베리어 스킬이었다.
폭발의 여력에 떠밀리는 와중에 두 개의 베리어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남은 하나마저 힘을 대부분 소진하긴 했지만, 그 덕에 오펠로 브롬의 에키드나는 사지 멀쩡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이아의 마력엔진에 의해 방어력이 한껏 증폭된 베리어 스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펠로 브롬은 고개를 돌려 스노우가 탑승해 있는 가이아의 행방을 찾았다.
가이아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력포 공격으로 인한 대폭발의 여파로 인해, 라비린토스가 존재했던 진원지를 중심으로 반경 300여 미터 이내에는 에키드나와 가이아 그리고 라비린토스의 일부를 제외하면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츠츠츠츠츠츠...
기간트의 발걸음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극히 미세한 소음만을 발생시키며 다가온 가이아가 에키드나의 앞에 멈추어 섰다.
붉은 기간트의 외부 마법진을 통해 다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자네에겐 또 한 번 빚을 졌군.]
[의뢰 중에 행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이제...]
가이아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고.
스노우가 말을 이었다.
[한 놈만 남았군요. 빨리 처리하고... 그 재앙이라는 놈을 잡으러 갑시다.]
#2
“으으으... 젠장! 이런 개 같은!”
칼튼 에거시는 치솟는 울화로 인해 머리 뚜껑이 열려 버릴 것만 같았다.
‘속도’라면 그가 그 무엇보다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실제로 칼튼 에거시가 25살을 넘긴 이후로. 나이만 왕국의 기사 중 그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빠르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이는 스승인 공작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런 공작조차 기간트 기동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한 수 접어주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륙의 끝이라는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험지에서, 고작 몬스터 따위에게 ‘속도’로 농락당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다니.
카아아아아아아아앙
혼신의 힘을 다한 발검술이었다.
그 빠르기는 빛살과 같았고, 검에 실린 위력 역시 어지간한 기간트의 외부 장갑쯤은 단숨에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황금빛 털을 지닌 거구의 몬스터는 마치 고양이라도 되는 양, 불쑥 튀어나온 70cm가량의 발톱으로 마력으로 강화된 칼튼 에거시의 검날을 가볍게 튕겨내 버렸다.
스르르륵
그리고는 마치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더니.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어느새 칼튼 에거시의 뒤를 점한 채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왔다.
“빌어먹을... 대체 뭘 처먹고 살길래 저렇게 빠른 거냐고!”
극한까지 날이 선 감각이 아니었더라면, 눈을 이용해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수준의 속도였다.
카아아아아아아앙
“큭, 젠장!”
가까스로 가디언의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낸 뒤 중심이 흐트러지며 기우뚱거리는 첼시.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타앗
카아아아아아아앙
하지만 가디언의 측면을 파고들며 검을 휘두른 날렵한 몸매의 기간트로 인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사랑해요, 공주님!]
[닥쳐요, 칼튼! 지금이 장난... 크윽! 장난치지 말고 빨리 공격해!]
[넵!]
이파니의 아르테미스가 가세한 이후로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지긴 했지만.
그녀가 합류하기 전, 이미 다섯 기의 기간트가 가디언의 손에 의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사망한 오너가 둘 뿐이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하지만 2,3조를 합해 30이 훌쩍 넘는 오너들은 말도 안 되는 속도전을 펼치는 이족 보행 가디언과의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가디언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단한 방어진을 구축해 더 이상 피해를 키우지 않는 것 정도였다.
사실 이는 기간트 간의 전투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고성능 기체라 한들, 오너의 움직임을 기간트가 구현하기까지는 극히 짧은 순간이나마 ‘딜레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기간트의 움직임은 결코 인간 엑스퍼트의 그것처럼 유연하고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물론 한없이 그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대륙 10강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 강자들이나 가능한 퍼포먼스가 아니던가.
당장 대륙급 강자라 칭송받는 칼튼 에거시만 하더라도... 지금 전장의 한편에서 방패 뒤에 몸을 숨긴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드워프 상급 오너 중 10인 정도의 협공을 받는다면. 승리할 확률은 아마도 5할을 넘길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몬스터 주제에 고등급 기간트만큼이나 단단하고 고등급 기간트만큼이나 힘이 세다 한들, 저 가디언은 기간트가 아닌 ‘생명체’였기에 ‘딜레이’라는 약점 따윈 존재하지 않는 불합리한 존재였다.
‘이 무슨 개같이 불공평한 경우... 잠깐, 그런데 저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움직임인 것 같은데?’
마치 상급 엑스퍼트를 수십 배 크기로 부풀려 놓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움직임.
칼튼 에거시는 멀지 않은 과거에, 저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준 괴물 같은 인간이 존재했음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스르르르르륵
‘지금 이곳에...’
칼튼 에거시의 상념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
붉은 잔상을 꼬리처럼 남기며 가디언의 측면에 모습을 드러낸 기간트가 붉은 기운이 충만한 대검을 내리찍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에 대경실색한 가디언이 두 다리로 땅을 박차며 기간트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려했지만.
츠칵
대검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고.
푸슛
여타 단 한 번의 공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가디언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윤기가 번들번들한 황금빛 털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가디언이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울음을 터뜨리며 황급히 붉은색 기간트와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타앗
전장에 난입한 붉은 기간트는 가디언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곧바로 따라붙으며 공세를 이어갔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앙
가디언의 오른쪽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든 기간트의 대검에 맺힌 붉은 기운은 금방이라도 유형화(有形化)를 해버리기라도 할 듯 선명하기 그지없었고.
이를 막아내는 몬스터의 발톱에도 어느새 선명한 황금빛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허리를 노린 연격을 막아낸 가디언이 몸을 거꾸로 뒤집었고.
어느새 튀어나와 있는 뒷발의 발톱으로 붉은색 기간트의 목을 노렸지만.
카아아아아아앙
발톱과 부딪친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로 빼낸 기단트의 검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후 이어진 8미터짜리 강철 거인과 가디언의 근접전.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억
카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맞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두 괴물의 잔상이 오너들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간트와 몬스터의 전투가 아닌.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검사와 암살자의 대결이라 불러도 무방할, 엄청난 퍼포먼스들의 향연이었다.
물론 인간 엑스퍼트에 비해 수십 배의 신장과 무게를 지닌 괴물들의 전투였기에, 그 파괴력은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광경을 입을 쩍 벌린 채 지켜보고 있던 칼튼 에거시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맞아, 바로 저 인간이었지. 처음으로 저런 미친 기동을 보여준 건...”
또 한 차례의 목을 노린 공격이 무산된 가디언.
녀석이 대검과 발톱의 충돌로 발생한 에너지를 이용해 다시 한번 몸을 뒤집으며 네 발로 땅을 디뎠고.
이내 두 다리가 1.5배 가깝게 부풀어 오르며 땅을 박차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포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대지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자세를 극도로 낮춘 채, 마치 레슬러의 태클처럼 기간트의 하체를 노리며 달려드는 가디언.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움직임의 잔상이나마 제대로 쫓은 이는 3명의 대륙급 강자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붉은 기간트, 가이아의 대응은 그 3인의 대륙급 강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미친!”
“대체 무슨 짓을...”
“조심하게!”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소환 해제해 버린 가이아는 가디언만큼이나 깊숙하게 자세를 낮춘 다음, 한쪽 다리를 뒤로 쭉 뻗어 하체를 단단히 고정한 후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가디언과 힘겨루기라도 시도할 듯한 자세.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비슷한 덩치의 상대를 제자리에 서서 받아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적용 중인 온갖 버프를 비롯해.
‘중력 조절.’
오너인 스노우가 기간트의 마력 엔진으로 위력이 폭증한 ‘중력 조절(C)’ 스킬을 최대치로 발휘하자, 10여 톤에 불과했던 가이아의 무게가 한순간 3배에 가깝게 증폭되었고.
‘베리어, 베리어, 베리어.’
이에 더해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순간, 베리어 스킬 3개를 중첩시켜 가이아의 몸을 보호했다.
본래라면 구체를 소환해 전신에 두르는 형태 이외에는 사용이 불가능했었지만.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진화한 다른 스킬들과 마찬가지로, 베리어 역시 마치 슈트처럼 전신에 딱 달라붙는 형태로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더해 이미 시전 중인 ‘곰토템(힘 증가)’과 ‘거북이토템(방어력 증가)’ 버프까지 더해진 가이아는...
쑤우우우욱......
격돌의 순간, 마력 코팅으로 번들거리는 앞발의 발톱을 모조리 드러낸 가디언의 양팔을 높게 치켜올린 두 주먹으로 정확하게 내려쳤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크에에에에에에에엑
엄청난 힘과 속도, 무게가 실린 가이아의 주먹질에 강타당한 가디언은,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두 팔과 머리가 대지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어진 것은 잔인한 구타의 시간.
콰아아앙
퍼어어어억
콰아아아아앙
크에에에에에엑
붉은 기운을 전신에 두른 가이아의 무자비한 발길질과 주먹질.
부러진 두 팔로 힘겹게 머리를 감싸고 있던 가디언은 어느새 축 늘어진 채 간헐적인 숨만을 내뱉고 있었다.
파아아앗
가디언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대검을 소환한 스노우.
그가 쓰러진 가디언의 목을 향해 마력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대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스르륵
그의 시야 한 편에 몇 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를 완벽하게 제압했습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테이밍이 가능합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를 테이밍 하시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치켜들었던 검을 내린 스노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테이... 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