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재앙급 몬스터(2)
#1
넓디넓은 라플론 광산 분지의 정중앙에 가부좌를 튼 채, 미동조차 없이 뻥 뚫린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는 재앙급 몬스터.
‘미쳤군. 가이아에 탑승한 상태인데도... 이 정도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스노우가 처음으로 소유한 기간트는 800rp급 ‘안티가’였다. 물론 처음으로 동기화에 성공한 건 500rp급 기간트인 ‘대거’였지만, 그건 아주 잠깐 빌려 탄 것뿐이었으니 제외.
800rp급 기간트와 1700rp급 기간트의 출력 차이는 고작 2배가량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인 성능의 차이는 최소 3배, 최대 4배 이상까지 벌어진다.
게다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몇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달라진 것은 기간트의 등급뿐만이 아니었다.
상승한 기체의 수준만큼 파일럿인 스노우의 역량 또한 극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제우스를 타던 시절에 비하면, 내 전투력은 최소 10배 이상 상승했다.’
물론 기간트에 탑승한 채 진짜 6써클 마법이라도 펑펑 날려대는 수준에 이르지 않는 이상, ‘양학’이란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제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스노우에게 있어 ‘강함’이란,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잡아낼 수 있는가?’ 따위의 명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강함이란 진짜 ‘강자’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해 내는 것이었으니까.
그 길이 원천봉쇄되어 있었던 지구에서와는 달리,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떨어진 스노우는 마침내 끝없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기체와 특성, 스킬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마주하게 된 불길할 정도로 강력한 아우라 앞에서도...
‘큭, 재미있겠군.’
옅은 미소를 띨 수 있었던 것이다.
‘대충 알타몬트 평원에서 만난 용병왕 정도... 그보다는 조금 더 강렬한가?’
라플론 광산의 재앙급 몬스터.
녀석은 스노우가 1500rp급 기체 제라스를 타고 1대1 대결을 벌였던 당시의 용병왕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 이상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의 스노우가 알타몬트 대회전 당시에 비해 최소 30% 이상의 스펙업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저 재앙급 몬스터는 무려 ‘용병왕이 탑승한 기간트 알칸트라’라는 괴물에 비해서도 훨씬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니까.’
아우라가 좀 더 강하다고는 하나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아니었고.
용병왕이 엄청난 경험과 냉철한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몬스터인만큼 본능적인 감각은 더 이쪽이 더 우월할 수도 있을 테지만.
같은 조건이라는 가정하에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쪽은 아무래도 인간인 용병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힘은 이쪽이 좀 더 셀 것 같으니, 얼추 비슷한 수준이라고 가정하면 되겠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을 끝장내려던 용병왕을 상대로도, 무려 3시간이 넘는 전투를 지속한 경험이 있는 스노우였다.
그리고 썩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지금은 자신을 도와 적을 상대할 3인의 동료들도 있었다.
‘해볼 만해.’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본인의 안전만큼은 확실히 챙길 자신이 있는 스노우였기에.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만난 최강의 상대와의 전투를 앞둔 이 상황은...
그에겐 ‘아직 뜯어보지 않은 선물 상자’나 마찬가지였다.
#2
대륙급 강자 4인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트들은 분지의 입구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저놈의 힘을 어느 정도 빼놓은 이후라면 몰라도... 초기 교전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걸세. 최소한 칼튼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조차 무리일 테니까. 크흠, 솔직히 말하자면 칼튼도 조금...]
[아니, 영감님. 지금 날 무시하는 겁니까? 전 대나이만 왕국 제1ㄱ...]
[시끄러워요, 칼튼. 상관없지 않나요, 오펠로경? 여차하면 칼받이로라도 쓰면 될 텐데.]
[아니, 이봐요! 당신이 공주면 다야? 왜 자꾸 나한테만...]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이런 걸로 발끈하다니. 실력만 없는 게 아니라 속도 좁군요.]
[이익...!]
아나투레스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내내 흙바닥을 굴러다녀야 했던 칼튼 에거시.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최후의 가디언을 상대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녀석의 공격을 피해 다니기 바빴던 엘프 공주 이파니는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대적(大敵)을 눈앞에 두고 티격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스노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 엘프 공주도 처음엔 얌전한 척 내숭이라도 떨더니, 동생(스타니)보다 훨씬 더 왈가닥인 여자였군.’
애초에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풍파를 겪은 왕국의 비밀결사대 겸 상단의 수장인 스타니슬라 르 바라탄에 비해. 대부분의 시간을 엘프 왕국의 심처에서 떠받들어지며, 오직 수련, 수련 수련에만 힘쓴 (아주 가끔 굵직한 의뢰를 해결하고 다니긴 했지만)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이 더욱 성숙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꽤나 무리한 바람이었다.
게다가 사실 이파니는 어린 시절 동맹국인 엘가드 왕국 국왕(현 국왕의 아버지)의 수염을 홀라당 태워 먹거나, 나이만 왕국의 왕궁 담벼락을 무너뜨린 적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말괄량이였다.
그나마 100여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수련을 거듭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어느 정도 깨우치긴 했지만.
신경이 예민해지자 점차 본래의 성질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을 중재하는 건 언제나 토벌대의 수장인 오펠로 브롬의 몫이었다.
[그만하게, 칼튼! 공주님도 그만, 체통을 지키십시오!]
그의 냉엄한 한마디에 두 기간트의 외부 통신 마법진을 통해 흘러나오던 소음이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기간트)을 한 차례씩 바라본 오펠로 브롬이 재앙급 몬스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스노우의 가이아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기억하기론 대략 500미터 이내로 접근했을 때 반응을 보였었네. 그 뒤로는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한계였지. 네 번째 공격으로 팔 한쪽이 날아가 버렸고, 다섯 번째 공격 때 옆구리를 관통당했어. 녀석의 손이 10cm 정도만 안쪽으로 들어왔더라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테지.]
[음, 분명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을 텐데... 정말로 아무런 반응이 없군요. 일정 거리 내로 접근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것 같군. 사실 재앙급 몬스터라는 녀석들의 습성은 워낙 제각각이니까.]
오르비스 대륙에 존재하는 재앙급 몬스터들은 각각이 매우 강렬한 개성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를테면 반경 수십km를 영역으로 삼고, 그곳을 침범하는 족족 죽여버리는 놈이 있는가 하면. 뻔히 눈이 마주치고도 그저 멀뚱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 녀석도 있다고 한다.
[그럼 저 녀석은...]
[두 가지 습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 아, 그건 아닌가? 그때는 내가 먼저 살기를 드러냈으니 말이야.]
단지 접근하는 것만으로 공격을 가해 올 것인가?
아니면 살기를 드러내지 않은 자는 무시할 것인가?
[뭐, 둘 중 뭐가 됐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일단은 확인이나 해보죠.]
스노우는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
물론, 어차피 결론은 오직 ‘전투’ 단 한 가지로 귀결될 터였지만.
#3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분지의 입구를 기준으로 20여 기씩 나뉜 토벌대의 기간트들이 일사불란하게 전열을 갖추었다.
라플론 광산이 존재하는 분지는 높이 70여 미터의 암벽으로 빙 둘러싸여 있었고, 통로라고는 기간트들이 도열해 있는 이곳이 전부였다.
다소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이 전장에서 대륙급 강자 4인을 제외한 다른 오너들이 활약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 기회란...
예기치 못하게 등장한 변수(몬스터)를 상대하거나.
혹은 위기에 빠진 4인의 대륙급 강자(그중에서도 특히 오펠로 브롬과 이파니)들이 몸을 빼낼 시간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전자의 경우라면 상관없겠지만, 후자의 경우엔 목숨을 잃는 드워프가 속출할 수밖에 없으리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대한 방패로 전면을 가린 채, 입구 양쪽으로 도열한 오너들의 앞으로 나선 네 기의 기간트.
스노우의 가이아.
오펠로 브롬의 에키드나.
아파니의 아르테미스.
칼튼 에거시의 첼시.
이 중 가이아와 아르테미스의 상태는 적어도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외부 장갑이 절반 이상 파손된 에키드나와, 흙바닥을 굴러다니느라 꼬질꼬질해진 데다 호되게 얻어맞기까지 한 첼시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발 앞으로 나선 스노우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혼자 어떻게 해볼 만한 놈이 아닌 것 같긴 한데... 일단은 저 혼자 간을 좀 보도록 하죠.]
[뭐? 아무리 너라도 재앙급 몬스터를 혼자 상대하겠다니! 너무 무모하잖아!]
첼시로부터 자존심이 잔뜩 상한 듯한 칼튼 에거시의 볼멘 음성이 흘러나왔지만, 스노우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끼어드는 타이밍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어그로가 통하는 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지간한 틈이 보이지 않는 이상 끼어들지 않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어떻게 당하는 줄도 모른 채... 죽어버릴 수도 있을 테니.]
스노우가 판단하기에 오펠로 브롬이나 이파니라면 최대 10여 합, 칼튼 에거시라면 최대 3합 정도가 한계였다.
물론 이조차도 극도로 수비적인 자세를 취해야지만, 비로소 가능한 수준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10합.
3합.
그 숫자가 일견 보잘 것 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예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것과 단 한 번이라도 합을 나눌 수 있는 것 사이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틈을 만들어 낼 때까지 버텨낼 탱커가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한 칼 먹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공격을 적중시킨다 한들,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는가는 다시 한번 따져보아야 할 테지만.
여전히 불만에 차 궁시렁거리는 칼튼 에거시를 남겨둔 스노우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츠앗츠앗츠앗츠앗......
850미터
800미터
750미터
.
.
.
550미터...
오펠로 브롬이 예상한 지점에 도달하기 직전.
돌연 발걸음을 멈춘 스노우가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소환 해제한 뒤.
2번 슬롯에 들어있던 ‘안트레(드워프제 기간트 활)’를 꺼내 들었다.
‘어디... 인지 범위? 영역? 뭐가 됐건, 거리 밖에서 들어가는 공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볼까?’
덤으로 녀석의 반응 속도까지 시험해 볼 요량으로 안트레의 시위를 당기는 스노우.
[인첸트 프로즌 오브, 인첸트 에어로 붐, 조준, 추적, 가속......]
활대에 걸린 마력 화살에 중첩되는 스킬들.
............
‘고요’라는 고대 드워프어의 의미에 걸맞게, 이내 그 어떠한 소음도 없이 안트레의 시위를 떠나는 화살.
하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에 실린 위력만큼은, 사위를 잠식한 고요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화살을 감싼 투명한 구의 내부에서 점점 불어나던 얼음 조각들이 엄청난 공기의 압력에 의해 한계까지 응축되었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재앙급 몬스터와 충돌한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했다.
충돌의 진원지를 중심으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위 온도를 수십 도는 끌어내릴 듯한 냉기가 터져 나왔고.
냉기로 인한 디버프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지름 4~5cm가량의 얼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스노우는 눈에 마력을 집중시키며 재앙급 몬스터가 있던 자리를 살폈다.
‘맞았... 으헉!’
하지만 그곳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한 채.
감각의 경고에 따라, 본능적으로 마력을 퍼부은 안트레를 들어 올려 상체를 보호해야만 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어느새 스노우(가이아)의 눈앞에 나타난 녹색 생명체.
마치 단검처럼 길쭉하고 날카롭게 늘어난 녀석의 팔뚝 갑각 중 하나가.
드워프들의 희귀 합금으로 만들어진 덕에 마력 전도율이 엄청난 안트레의 활대를 1/3가량 파고든 상태였다.
“젠장!”
화들짝 놀란 스노우가 오른쪽 발을 차올려 녀석의 옆구리를 노렸지만.
타앗
가이아의 다리가 재앙급 몬스터가 있던 곳을 지나치는 시점엔.
녀석은 이미 가이아와 30여 미터쯤 떨어진 위치까지 이동해, 무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스노우의 전신에도 급격하게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일격에 안 뒤져서 이상하단 거냐? 하, 근데 까딱 잘못했으면... 진짜로 한방에 골로 갈 뻔 했다고... 이 새끼야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앙
동화율(수치로 표시되지 않지만 100%를 아득히 넘어간다)을 급격하게 끌어올리며 대지를 박차는 스노우.
파아아아앗
파아아아앗
활이 사라지고 대검이 소환된다.
그리고 치솟는 열기를 마력으로 치환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가이아가 치켜든 대검에서 엄청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