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재앙급 몬스터(3)
#1
각성자(헌터)들의 마력은 저마다의 색(빛)을 지닌다.
이는 오르비스 대륙의 엑스퍼트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력 사용자 대부분(95% 이상)의 마력은 적광이나 청광을 띠지만. 드물게는 특이한 마력(오러)을 익혔거나 체질상의 이유로 인해 녹광이나 흑광, 더더욱 드물게는 금광을 띠는 경우도 존재했다.
스노우의 마력 역시 선명한 적광이었다.
다만 여타 마력 사용자들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가 무기의 마력 전도율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마력을 불어넣을 경우, 은은한 붉은빛이 아닌 마치 피처럼 짙은 적색을 띤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막대한 마력이 응집된 결과로. 스노우의 검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 버린 순간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를 흉내 낼 수 있는 알버트 자작(브라이드 영지의 최상급 엑스퍼트)의 검조차 몇 번이고 받아내는 것이 가능했었다.
이는 보통의 엑스퍼트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기예였고.
엄청난 수치의 마력 양을 지닌 스노우조차, 퍽퍽 깎여나가는 마력으로 인해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비효율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재앙급 몬스터를 눈앞에 둔 지금 이 순간.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스노우가 발현한 포화상태의 마력검은 자신의 주인에게 의외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는 이전 무기와 비교해 두 배 이상 많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대검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앗
가이아의 양손에 들린 대검이 엄청나게 짙은 적광을 발산하며 재앙급 몬스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무려 드워프 최고의 장인이, 스노우의 주문에 의해 마력 전도율 단 하나에만 초점을 맞춰(물론 드워프제인만큼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단단하다) 제작한 명검이었다.
그런 천고의 명검이 스노우의 잔여 마력 중 1/3가량을 흡수한 데다.
흥분한 와중에도 기계적으로 시전한 샤프니스 스킬과 견고함 스킬, 거기에 중력 조절 스킬까지 더해져 한층 더 강화되었다.
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버프 스킬로 강화된 스노우의 움직임은 재앙급 몬스터조차 놀랄 정도로 민첩했기에, 녀석에겐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검을 받아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츠각
단단한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소리.
팔뚝을 뒤덮고 있는 네 개의 갑각 중 손등으로 이어지는 부위를 검처럼 길게 늘인 무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갑각검’과 가이아의 대검이 부딪쳤고.
몇 가지 스킬과 한계까지 퍼담은 마력으로 인해 강화된 가이아의 대검은 너무나도 쉽사리 재앙급 몬스터가 내민 무기를 잘라 버린 뒤.
녀석의 가슴 부위에 길다란 상처를 남겼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와중에도 어마어마한 반사신경으로 몸을 빼낸 덕에 가슴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고.
‘얕다.’
스노우 역시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차렸기에,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재앙급 몬스터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혀 상처를 추가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상처’라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탓일까?
재앙급 몬스터는 계속해서 극히 낮은 음역대의 비명을 토해내며 스노우의 검을 회피했고.
타아아아아앗
엄청난 재생력으로 인해 가슴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자, 세 갈래로 갈라진 거대한 발가락으로 대지를 박차며 스노우와의 거리를 크게 벌렸다.
[도망가게 놔둘 것 같아?]
사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스노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그의 감각이 울린 경종은 지구에서의 마지막 순간이나, 사막에서 용병왕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크로스보우를 자폭시켜야 했던 순간보다 훨씬 더 다급하고 섬뜩했었다.
이는 스스로의 판단과 각오로 위기를 자처했었던 인비저블 던전 브레이크나 용병왕 때와는 달리.
아무런 전조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다가온 위협이 그의 심령(心靈)을 일순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후 스노우는 몇 번이고 가속 스킬을 사용하며 재앙급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미 부상을 회복하고 평정을 되찾은 녀석은 그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재앙급 몬스터의 갑각검 역시 은은한 흑광에 둘러싸인 상태였고.
더이상 가이아의 대검에 의해 잘려 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그 불길한 흑색 마력을 감지한 스노우 역시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너무 흥분했군. 그새 마력이 2000 가까이 날아가 버렸어.’
전투 개시 이후 고작 2분,
검과 검이 부딪친 횟수 단 5회.
비록 선취점을 올리긴 했지만, 너무나 비효율적인 싸움을 벌였다 자책하는 스노우였다.
스르르르르르
가이아의 대검에 서려 있던 시뻘건 적광이 차츰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회복해야 해.’
기실 스노우의 엄청난 전투 유지력은 그 압도적인 마력 양도 양이었지만, 그보다는 비정상적인 수준의 마력 회복력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부터 매우 빠른 편이었던 마력 회복 속도는, 오르비스 대륙에 불시착해 기간트의 오너가 된 이후 점점 더 상승하고 있었기에.
오늘과 같이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그가 마력 부족으로 허덕이는 사건은 일어나기 힘들었다.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스노우 자신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3인의 대륙급 강자들을 위해서라도. 오르비스 대륙에 새롭게 등장한 이 재앙급 몬스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스노우의 기세가 변한 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가슴에 상처를 입은 이후 계속해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던.
재앙급 몬스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2
[저, 저게 뭐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잖아. 지금 나만 그래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희미하게나마 보이긴 한다는 뜻인가요?]
[...그러는 공주님은, 저 움직임이 모두 보인단 말입니까?]
[...뭐, 전부 다 보이는 건 아니에요.]
[헷, 그럴 줄 알았어.]
[뭐라구요, 그래도 당신보다는 내가 훨씬......]
또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두 오너와 나란히 서 있던 오펠로 브롬 역시, 기간트의 눈으로 두 괴물의 대결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탄성을 뱉어내는 중이었다.
‘대단해! 저 괴물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하다니. 심지어 저건... 마치 재앙급 몬스터가 겁이라도 집어먹은 것 같지 않은가.’
다른 걸 다 제쳐두고서라도...
무려 ‘재앙’이라 불리는 몬스터와의 싸움을 이렇게 ‘구경’ 하듯 바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노우라는 인간의 저력은 이미 증명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펠로 브롬 본인이 직접 겪어봤기에, 저 ‘재앙’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1차 토벌 당시, 단 몇 번의 움직임과 손놀림만으로 자신을 사경으로 몰아넣은 괴물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당시의 움직임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에 불과했었다.
‘그렇다면 저 스노우라는 인간은... 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아무리 바디체인지를 겪는다 한들, 채 2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실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늙은 드워프 전사 특유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희미하다. 분명 인간으로 따져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닐 테지.’
그렇다면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드워프나 엘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인간의 강자들 역시, 그만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야만 했으니까.
‘그래, 아주 드물게... 100년이나 200년에 한 번 정도, 세월의 공평함을 깡그리 무시하는 존재들이 튀어나오곤 하지.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는 족속들.’
물론, 대충 뛰어난 재능 앞에 붙여주는 수식어 따위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진짜 천재.
즉, 하늘이 내려준 재능.
오펠로 브롬이 판단하기에 저 스노우라는 인간 오너야 말로.
하늘이 이 시대에 내려준 최고의 재능임이 확실했다.
물론...
스노우에게 재능을 내려준 것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이 아닌.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하늘이었지만 말이다.
#3
초반의 살벌했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어느새 일방적인 수세에 몰린 스노우.
스르르륵
카아아아아아앙
츠팟
터어어어어어엉
재앙급 몬스터는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집요하게 가이아의 틈을 노렸다.
곤충을 닮은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었고, 한동안 토해내던 극저음의 섬뜩한 울음도 완전히 멎었다.
너무 빠른 속도 탓에, 마치 몸이 여러 개로 늘어나 가이아의 사방을 동시에 노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을 정도.
콰직
콰직
터어어어어어어엉
가이아의 후방을 노린 재앙급 몬스터의 갑각검이 길이 7미터, 폭 4미터가량의 반투명한 방패 두 개를 연달아 파괴하더니, 세 번째 방패를 절반쯤 파고들고서야 멈추었다.
마력양을 조절하며 속도가 다소 감소한 가이아에 반해, 재앙급 몬스터는 오히려 점점 더 빠른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속도와 관련된 모든 버프를 두르고도 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방어 계열 스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을 보호하는 스노우였다.
드르르르르륵......
재앙급 몬스터의 공격이 실드에 의해 저지된 순간, 대지를 뚫고 올라온 거대한 넝쿨들이 녀석의 몸을 꽁꽁 얽어매더니.
화르르르르르륵......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을 피워올렸다.
하지만 스킬에 의해 생성된 극고온의 불꽃에 휩싸였음에도,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은 재앙급 몬스터는 몸을 조금 부풀리는 것만으로 손쉽게 넝쿨을 끊어 버린 뒤 공격을 이어갔다.
카아아아아아아앙
‘크윽, 일단 불은 약점이 아닌 것 같군.’
스노우 역시 무턱대고 방어와 공격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점점 버거워지는 적의 움직임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를 쓰며, 틈틈이 공략을 위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프렉탈 필드, 프리징 레인, 아이스 비드.”
얼음의 대지가 생성되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얼음 결정이 천지사방을 뒤덮었으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얼음 구슬들이 주변을 빼곡하게 장악했다.
퍼어어어어어엉
퍼어어어어어엉
퍼어어어어어엉
.
.
.
퍼어어어어어엉
재앙급 몬스터의 몸에 스친 얼음 구슬들이 하나하나 터져나가며 분지의 기온이 급속도로 하강했지만.
안타깝게도 스노우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빙결 계열 또한 녀석의 약점은 아닌 것 같았다.
냉기 계열 스킬의 디버프로 인해 움직임이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그닥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딱히 기온이 내려가는 걸 꺼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후로도 물과 바람, 전격 등 가능한 모든 속성의 공격을 시도하는 스노우.
하지만 딱히 약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굳이 약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일정한 공격 패턴 정도?’
그리 깊지 않은 부상(그것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린)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과 공격 패턴이 단조롭다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
‘이놈, 전투 경험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변수를 만들어 내야만 전투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스노우가 아군 전용 통신 채널을 열었다.
방해 전파를 생성해 내던 보스페로스가 목숨을 잃었기에 통신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토벌대 기간트들의 콕피트 내에 스노우의 냉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사냥을 시작한다. 오펠로, 이파니, 칼튼은 참전. 나머지는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바야흐로 본격적인 보스몹 레이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