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재앙급 몬스터(6)
#1
현시대에 이르러 인간을 비롯한 여타 지배종족들에게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재앙’이라 불리는 몬스터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탄생한다.
하나는 하급 몬스터로 시작해 헤아릴 수 없는 시련을 거치며 성장을 거듭. 종래에는 재앙급 몬스터로 진화하는 것이다.
현재 오르비스 대륙에 존재하는 여덟 재앙급 몬스터 중 다섯 마리가 이러한 경로를 거쳐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진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이들 다섯 재앙급 몬스터들은 적게는 4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에 이르는 세월을 살아온 녀석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재앙이라 불릴만한 ‘힘’을 지닌 채 나타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매우 특별한 매개체를 통해 탄생했고, 그에 걸맞게 신의 자리에 도전할 만한 재능(스텟, 이능 등)을 지니고 있었다.
대미궁에서 최후를 맞이한 ‘마신의 잔재’에서 탄생한 대륙 최강의 존재 암펠리오스.
오르비스 대륙 5대 마경 중 하나인 죽음의 호수 안탄드로스에 수백 년간 쌓인 막대한 ‘사기’의 응집체로부터 태어난 나가 여왕 네메시아.
최상급 몬스터로 진화한 시점부터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재앙급 몬스터의 자리에 오른 다른 다섯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사기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던 암펠리오스와 네메시아는 처음부터 ‘재앙’이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대륙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지 500년이 넘은 암펠리오스는 논외로 치더라도.
고작 150살이 갓 넘은 네메시아가 재앙급 몬스터 중 서열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네메시아 다음으로 어린 재앙급 몬스터는 430살이 넘는다), 특별한 매개체를 통해 탄생한 존재들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중심에 위치한 라플론 광산에서 눈을 뜬 재앙급 몬스터.
그 역시 매우 특별한 매개체를 통해 태어난 존재였는데.
녀석을 탄생시킨 것은 ‘신마전쟁’ 당시 북부 다르다넬 산맥에서 최후를 맞이한 마신(魔神)군의 일곱 군주 중 하나인, 심연의 마왕 크라톤의 핵이었다.
달리 말하면 ‘마왕의 마정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이 북부 다르다넬 산맥 깊숙한 곳에 묻혀있었고.
오랜 세월 ‘신의 광석’이라 불리는 라플론의 마력을 흡수한 끝에 탄생시킨 것이 바로... 오르비스 대륙에 여덟 번째로 등장한 재앙급 몬스터였다.
태어난 이후 꼬박 2년 반이란 시간을 광산의 암벽 사이에 파묻혀 라플론의 마력을 흡수하던 재앙급 몬스터가 외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반년 전이었다.
마왕의 마정석이 오랜 세월 라플론의 마력을 흡수해 탄생한 존재이니만큼, 단순히 라플론 광산을 차지하고 눌러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는 재앙급 몬스터였기에 드워프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대로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면, 녀석 역시 대륙 8번째 재앙급 몬스터로서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지배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태어난 이후 3년이 아닌 30년이 지난 이후였더라면, 현재의 스노우가 가진 힘으로 팽팽한 승부를 벌인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하지만 녀석이 태어난 건 3년 전, 게다가 세상으로 나온 지는 불과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가디언들의 경우 재앙급 몬스터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인해 자청해서 수하가 된 것이었으니.
실질적인 전투 경험이라고는 1차 토벌대 당시 오펠로 브롬의 에키드나를 만신창이로 만든 몇 번의 칼질과 스노우를 상대로 혈투를 펼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전부였다.
만만찮은 적수, 부상, 고통, 분노... 이 모든 것이 처음인 재앙급 몬스터로서는 지난 3년의 시간보다 더욱 많을 것을 느끼고 배운 10분여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태어난 이후 보낸 3년의 시간보다.
고작 이 10여 분의 전투 경험이 그를 더욱 크게 성장시켰다.
그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신체의 일부분이 날아가는 고통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신체가 재생되는 순간의 고통은 더욱더 끔찍했다.
재앙급 몬스터는 더 이상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또한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을 안겨준 상대보다 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것 이외의 방법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찾아온 깨달음과 굳건한 의지가 그의 내부에 존재하던 또하나의 이능을 깨웠다.
누군가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탄생할 때부터, 아니... 탄생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권능이었으니까.
그르르르르르르르르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던 울음소리가 일순간 뚝 그쳤다.
잃었던 팔은 재생되었고, 그 외 자잘한 상처들도 모두 치유되었다.
이 역시 그가 지닌 권능 중 하나.
하지만 새롭게 손에 넣은 권능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재앙급 몬스터의 커다란 눈에 짙은 어둠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녀석의 흑색 마력과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그리고 재앙급 몬스터가 의지를 품는 순간.
파앗
거짓말처럼 녀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너무나 빠른 이동으로 인해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와는 달랐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그 압도적인 존재감조차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재앙급 몬스터의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이아의 뒤편에 생성되었던 동전만 한 크기의 검은 점이 순식간에 4미터가량으로 크기를 부풀렸고.
파앗
그 심연과도 같은 공간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재앙급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이 모든 것이 1초를 몇 번이고 쪼갤 수 있을 만큼 찰나의 시간 안에 벌어진 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공격 방식에 후방을 고스란히 노출하고야만 가이아.
오너인 스노우가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발휘해 실드 스킬을 발동시켰으나.
그 짧은 순간 생성할 수 있었던 실드는 고작 하나에 불과했고.
콰지직
흑색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재앙급 몬스터의 갑각검은 실드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며.
츠각
그대로 가이아의 팔 한쪽을 잘라버렸다.
쿠우웅
타아아앗
그나마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반응해 몸을 뒤로 뺀 탓에 오른팔이 잘려 나가는 걸로 끝난 것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몸통을 꿰뚫리거나 베일뻔한 대위기였었다.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곤충과 같은 얼굴이었기에 표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층 높아진 울음소리와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볼 때.
녀석이 매우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가이아가 몸을 바로 세울 겨를도 없이, 또다시 후방에 생성된 심연과도 같은 검은 원에서 재앙급 몬스터가 튀어나왔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좀 전과도 같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마력도, 딜레이도 느껴지지 않는 사기적인 이동 스킬에 고전을 면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팔한쪽이 날아가 균형이 흐트러졌을 것이 분명함에도, 가이아의 움직임은 처음과 변함없이 빠르고 유연했다.
새로운 이능을 이용한 10여 번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자.
공격을 멈춘 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앙급 몬스터.
마치... ‘이걸 어떻게 피하는 거지?’라고 묻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연찮게도 마지막 공격을 회피해 가이아가 이동한 장소에는 조금 전 베였던 오른팔이 떨어져 있었고.
잠시 전방의 적을 살핀 가이아가 천연덕스럽게 팔을 주워들어 그것을 베인 자리에 가져다 대었다.
그륵?
본능과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저 거대한 금속덩어리에게 자신과 같은 재생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재앙급 몬스터였다.
하지만...
화아아아아아아앗
떨어진 팔과 그에 맞닿은 부위에서 강렬한 빛이 발산되더니.
후우우우우우우웅
후우우우우웅우웅
이내 빛이 사라진 곳에는 멀쩡해진 오른팔로 크게 원을 그리고 있는 가이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재앙급 몬스터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그륵?
#2
놀랍게도 재앙급 몬스터의 새로운 이능이 발휘되고, 그로 인해 가이아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을 때.
곧바로 그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오펠로 브롬과 이파니, 칼튼 에거시를 멈추어 세운 것은 콕피트 내부에 울려 퍼진 스노우의 음성이었다.
[멈춰! 이능이 발동되는 전조가 전혀 없다. 다가오면 죽어.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그들이 보기에도 재앙급 몬스터의 새로운 이능은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최상급 엑스퍼트의 뛰어난 감각에도 전혀 감지되지 않는 지름 4미터가량의 검은 원.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기조차 꺼려지는 그 검은 원으로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재앙급 몬스터의 그 거대한 존재감 역시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마 자신들이라면 가이아처럼 피해내지 못한 채 몸통을 꿰뚫리거나 목이 잘릴 확률이 매우 높을 터였다.
[두 번째 이능이라니...]
[세 번째예요, 오펠로. 놈의 재생력을 보셨잖아요.]
[젠장, 이건 사기야! 하늘을 날아다니는 방패에, 잘린 팔이 순식간에 돋아나는 재생력으로도 모자라서, 또 저런 사기적인 능력이라니!]
[진정하게, 칼튼. 저 정도나 되니 재앙이라 불리는 것일 테지.]
[그나저나... 정말 이대로 대기해도 되는 걸까요? 오른팔이 잘린 이상 검을 휘두르긴 커녕 제대로 움직이는 것 조차...]
[잠깐만, 공주님.]
자신의 말을 끊어버린 칼튼 에거시를 노려보는 엘프 공주 이파니.
[공주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아 글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제길 좀 봐요!]
또다시 말을 끊어 버린 무례함에 이파니의 양쪽 눈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지만.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본 그녀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쪽 팔을 잃어버린 기간트가 정상적인 기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기본적인 상식적이었다.
걷거나 조금 빠르게 달리는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할 테지만, 고속으로 행하는 ‘전투 기동’만큼은 달랐다.
한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는, 10여 톤 전후의 무게를 지닌 기간트를 고속으로 움직이며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속을 넘어 순간이동에 가까운 초고속 기동을 이어가고 있는 가이아의 움직임은 팔이 멀쩡할 때와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저런 건 스승님도 불가능할 텐데... 여, 역시 그는...]
[괴물... 대체 균형 감각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제부터 천재 같은 소릴 들었다간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군.]
전투를 지속할수록 발전하는 것은 재앙급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비록 진화라고 할만큼의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타입의 적에게 익숙해지는 것은 스노우 역시 마찬가지였고, 애초에 천부적이었던 ‘싸움’에 관한 재능은 그가 기간트에 탑승하면서 몇 배로 증폭된 상태였다.
전조나 마력 반응조차 없는 재앙급 몬스터의 이능이 사기적인 능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스노우가 지닌 ‘파일럿(S)’ 특성은 그것조차 우습게 여겨질 만큼 초월적인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파일럿 특성의 초월적인 면모 중 하나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0여 차례의 공방(일방적이었지만)이 지나가고 잠시 찾아든 소강상태.
3인의 대륙급 강자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뭘 하려는 거지?]
[팔을 주워들었어요. 설마... 지금 저걸 붙이려고?]
[에에? 아니, 어떻게? 파이어 마법으로 용접이라도 할 셈인가?]
[으음, 균형을 잡는 데 조금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교전 상황에서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텐데.]
[그건 아닐 거예요, 오펠로. 아까 보셨잖아요. 팔이 잘려도 움직이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구요.]
[뭐야, 그럼? 갑자기 돌아버리기라도 한 건가?]
[제발 입 좀 닥쳐요. 칼튼!]
[아니, 내 입 가지고 내 마음대로 말도... 어?]
[헉!]
[저게 대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강렬한 빛.
그리고 이내 멀쩡하게 붙은 채 문제 없이 움직이는 가이아의 팔.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번에도 멍하게 가이아를 바라보는 것 이외엔 없었다.
[진짜로 붙었군.]
[붙었네요.]
[어떻게... 붙였지?]
그들의 의문을 뒤로한 채.
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가이아를 중심으로 반경 수백 미터를 뻗어나간 얼음의 대지 위로.
투두둑투둑투둑툭투두두......
엄청난 규모의 폭설(얼음 결정)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