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26화 (126/169)

126화 재앙급 몬스터(7)

#1

잘린 팔을 순식간에 재생시키는 괴물과, 땅에 떨어진 팔을 멀쩡하게 갖다 붙이는 괴물.

몬스터의 ‘재생력’은 비교적 흔한 능력(비록 재생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기는 했지만)이었기에 당황할 이유가 없었던 스노우와는 달리, 자신의 작디작은 세계관 속에서는 불가해한 일을 목격한 재앙급 몬스터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기간트라는 ‘적’에 대한 녀석의 정의는 ‘매우 단단하긴 하지만 잘라내거나 부수면 그것으로 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붉은 기간트는 달랐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능을 구사할 수 있었던 데다, 그 어떤 적보다 빠르고 단단한 주제에, 이제는 새로운 이능을 각성하면서까지 간신히 잘라낸 신체를 멀쩡히 붙여버린다.

그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모로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운 재앙급 몬스터가 경계심을 잔뜩 머금은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냈다.

후웅후웅후웅후웅후웅후웅...

그 경계심을 표출하기라도 하듯, 잔뜩 그을리고 파손된 두 개의 원반이 녀석을 보호하듯 주위를 맴돌았다.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 ‘수복(S)’으로 인해 붙인 팔을 몇 차례 휘휘 돌려본 스노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사라진 팔을 재생시키는 작업이라면 이처럼 순식간에 해낼 수는 없었겠지만. 잘린 팔이 멀쩡히 존재한다면, 그것을 붙이는 일 정도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60여 미터의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던 스노우와 재앙급 몬스터.

팽팽한 긴장감이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중심부를 가득 메웠다.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기간트 대검을 멀쩡해진 오른손으로 소환한 가이아였다.

“프렉탈 필드.”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스노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이아의 붉은 몸체를 중심으로 반경 수백 미터를 잠식해 나가는 새하얀 얼음의 대지.

지금까지의 공방에서 확인한 바로는 재앙급 몬스터가 딱히 약점을 들어내는 속성은 없었다.

이는 스노우의 시그니쳐 속성이라 할 수 있는 빙결 계열에도 마찬가지.

물론 디버프로 인한 행동력 저하 양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여타 하급 몬스터들에 비해 그 효과는 매우 미미한 정도였다.

하지만 버프를 받은 가이아의 행동력이 눈에 띄게 상승하는 데다, 빙결 계열 공격 스킬들의 위력 역시 배가되니 굳이 사용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스노우가 판단하기에, 적의 새로운 이능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들을 발현할 필요가 있었다.

스노우의 입에서 프렉탈 필드와 연계되는 두 번째 스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프리징 레인.”

투두둑투둑투둑툭툭툭툭툭......

반경 수백 미터를 뒤덮은 얼음의 대지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얼음 결정들.

얼음의 무게와 낙하에너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물리력을 동반한 공격이 아니어서인지, 눈보라(얼음 결정)에 휩싸인 재앙급 몬스터는 딱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육안으로 드러난 사실만 두고 판단하자면, 스노우의 스킬들은 붉은색 기간트인 가이아보다는 오히려 새하얀 몸뚱어리를 지닌 재앙급 몬스터를 위한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뭐, 어차피 눈으로 보고 대응할 수 있는 놈은 아니었으니까.’

초월적인 재앙급 몬스터의 속도는 시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만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툭툭툭툭투둑투둑투둑투두둑......

사나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던 눈보라가 그쳤다.

스르르륵

양손에 쥔 기간트용 대검을 천천히 들어 올린 스노우가 마지막 스킬의 이름을 뱉어냈다.

“아이스 비드.”

그와 동시에...

슈우우욱

슈우우욱

슈우욱

.

.

.

슈우우욱

바닥에 쌓여 있던 얼음 결정들로부터 지름 15cm가량의 새하얀 구체 수백 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음의 대지 위 허공을 빼곡하게 메운 얼음을 가장한 폭탄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거대한 대검을 가슴께로 들어 올린 가이아가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며 동시에 두 무릎을 살짝 굽힌다.

아주 살짝 오버클럭을 일으키자 기간트의 몸에 옅은 적광이 스쳐갔고,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온갖 버프 스킬을 두르자 한층 더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느낀 것인지 재앙급 몬스터의 양손에 들린 각갑검 두 자루에도 희미한 흑광이 어리기 시작했고, 두 개의 녹색 방패가 녀석의 주위를 맴도는 속도 역시 한층 더 빨라졌다.

츠팟

새하얀 대지를 박찬 가이아의 신형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휘이익

휘익

휘이익......

거대한 기간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새하얀 구슬 수십 개가, 마치 같은 극의 자석이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밀려나며 길을 튼다.

60여 미터의 거리를 단 세 걸음 만에 좁힌 가이아의 대검이 재앙급 몬스터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곤충을 닮은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린 녀석의 심연과도 같은 커다란 눈에 붉은색 기간트의 모습이 비친다.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순간, 섬뜩한 울음을 토해낸 재앙급 몬스터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검을 치켜올린 채 쇄도하던 가이아의 측면에 지름 4미터가량의 검은색 원이 나타났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재앙급 몬스터가 가이아를 향해 검을 뻗으려는 순간.

퍼어어어어엉

퍼어어어엉

검은 원 앞을 떠다니던 구슬 두 개가 몬스터의 몸에 닿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재앙’급 정도 되는 몬스터에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는 미약한 위력이었지만.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녀석의 공격이 지닌 속도와 의외성으로 인한 우위는 사라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앙

당황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내뻗은 검격이 가이아의 대검에 의해 가로막혔다.

스륵

검을 맞댄 순간 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재앙급 몬스터.

이번에 검은 원이 생성된 곳은 가이아의 머리 위 허공이었지만, 그곳이라고 하여 이미 기간트의 몸 주위를 빼곡하게 메운 얼음 구슬들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퍼어어어어엉

퍼어어어엉

퍼어어어엉

첫 번째 공격 이후, 스노우는 가이아의 주변으로 구슬들을 잔뜩 끌어당겨 놓은 상태였고.

검은 원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구슬 세 개에 스친 재앙급 몬스터의 공격은 완전히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초를 수십 단위로 쪼개 쓰는 초월적인 전투에서는 찰나의 딜레이조차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카아아아아아앙

또다시 허무하리만치 쉽게 막혀버린 재앙급 몬스터의 공격.

스노우는 검을 맞댐과 동시에 그나마 효과를 보였던 전격 계열 스킬들을 쏟아냈다.

“일렉트릭 쇼크, 기가 라이트닝.”

파츠츠츠츠츠츠츠츠츠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검을 쥔 가이아의 양손에서 생성된 전격이 코앞에 있는 재앙급 몬스터의 가슴을 향해 뻗어나갔고, 하늘로부터 비롯된 벼락은 녀석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츳

하지만 재앙급 몬스터의 반응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민했다.

가이아의 양손에 황금빛 전류가 넘실거리는 순간.

이미 본능에 새겨진 이능을 발동시켰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전격이 사그라들고,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이미 50여 미터 후방에 생성된 검은 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스노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 점점 더 능숙해지는 것 같군.”

그가 재앙급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느낀 점은 이랬다.

용병왕 보다 강하다.

하지만 용병왕 보다 상대하기 까다롭냐고 묻는다면...

‘피지컬만으로도 용병왕의 알칸트라를 능가한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이능을 몇 개씩이나 지니고 있지. 하지만 굳이 상대하기 편한 쪽을 꼽으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어.’

재앙급 몬스터의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린아이에게 전설의 신검을 쥐어준 격.’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적어도 스노우가 판단하기로는 그러했다.

‘세 살배기 아이가 일곱 살 수준으로 진화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똑같은 어린아이지.’

하지만 고작 10여 분 만에 그 정도 성장을 보인 것도 엄연한 사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또다시 얼마만큼의 변화를 보여줄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당장 지금만 봐도...

츠팟

“헉, 젠장!”

구슬로 뒤덮인 얼음의 대지 위에서 십여 합을 나눈 시점.

재앙급 몬스터가 모습을 감추었고.

어느 곳에 생성될지 모를 검은 원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을 집중시키던 스노우는 무언가 이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몬스터가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원이 생성되는 것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두 개?”

한곳에서만 생성되던 검은 원이 갑자기 가이아의 양측 면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실드 스킬과 베리어 스킬을 두르며 감각을 집중시켰지만. 찰나의 찰나를 쪼갠 짧은 시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재앙급 몬스터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가이아의 오른쪽 측면에 생성된 원에서 튀어나온 재앙급 몬스터.

녀석의 검이 실드와 베리어를 연달아 박살내며 또다시 가이아의 오른팔을 절반쯤 잘라냈다.

“빌어먹을!”

베리어와 실드가 파괴당하는 순간 주변의 구슬들을 집중시켜 녀석의 주위를 흐트러뜨렸고, 순간적인 오버클럭을 일으켜 빠르게 몸을 빼낸 덕분에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몰려드는 구슬들을 피해 40여 미터 떨어진 위치에 생성한 두 개의 검은 원 중 하나에서 유유히 모습을 드러내는 재앙급 몬스터.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녀석은 다시 한번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한 울음을 토해냈다.

“하, 단순한 새끼네...”

전투 패턴뿐만 아니라, 행동 양식마저 어린아이 수준.

‘애들은 뭐든 더 빨리 배우지. 이거... 시간을 끌수록 더 위험하겠는데.’

전투가 지속될수록 이능의 수와 위력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었다.

검은 원이 고작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났을 뿐인데, 상대하기는 몇 배로 까다로워졌다.

그런데 세 개, 네 개... 혹은 그 이상으로 늘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기간트와의 일체화로 인해 줄어드는 마력 소모량과 늘어나는 마력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보이려 하는 잔여 마력양 역시 문제였다.

‘속전속결.’

그것 이외의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이이이이이이이잉

동화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스노우가 마력엔진을 오버클럭시키자 가이아의 몸이 미약한 진동을 일으켰다.

1711, 1726, 1734...... 1762

평범한... 아니, 대륙 최고 수준의 오너라 한들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오버클럭율.

가이아의 신체가 은은한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 진짜 미치겠군.”

얼음의 대지 위에 마주선 재앙급 몬스터 역시 눈처럼 새하얗던 몸을 서서히 회색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짙게 물들어 갈수록,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강자의 아우라 역시 그만큼 증폭되었다.

“폭주? 강화? 아무튼... 벌써 네 번째 이능 발현인가?”

자아를 가진 듯 재앙급 몬스터의 주위를 선회하며 공격을 차단하는 갑각 방패.

잘린 팔을 순식간에 원상복구하는 초월적인 재생력.

심연의 원을 통한 공간 이동.

그리고... 흔하긴 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이능 중 하나인 폭주 혹은 강화.

즉,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저 재앙급 몬스터는...

수백 년간 오르비스 대륙 최강으로 군림해온 대미궁의 군주 암펠리오스와 똑같은 숫자의 이능을 발현해 낸 것이다.

황당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던 스노우의 입이 열렸다.

“10년 정도의 시간만 주어졌더라면... 지금의 나로선 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놈이로군.”

하지만 불행하게도, 저 재앙급 몬스터에게 그 정도의 시간이 허락될 확률은 매우 낮았다.

“오늘이 녀석의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버서커.”

최후의 비기까지 사용한 스노우가.

이제는 완연한 잿빛으로 물든 재앙급 몬스터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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