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재앙급 몬스터(8)
#1
츠츠츠츠츠......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과도 같이 작고 가벼운 소리.
가이아는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땅을 박차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미세한 소음만을 발생시키며 재앙급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버클럭에 버서커 스킬까지 중첩되어 피처럼 시뻘건 기운을 발산하는 기간트.
어느새 완연한 잿빛으로 물든 재앙급 몬스터.
두 존재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 20여 미터 안으로 좁혀졌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맹렬한 기세를 풍기며 쇄도하는 기간트의 앞을, 군데군데 파손의 흔적이 역력한 두 개의 녹색 방패가 가로막았다.
그새 갑각으로 이루어진 방패에 마력을 전달하는 법이라도 익힌 것인지, 녹색 갑각들이 촘촘히 겹쳐져 만들어진 방패의 표면에는 은은한 흑색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가이아와 두 개의 방패가 충돌하기 직전.
푸와아아아아악
푸와아아아아악
얼음의 대지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얼음 결정들이 순식간에 응집하며, 그곳에서 15미터가량의 거대한 손 두 개가 솟아올랐다.
엄청난 속도로 솟아오른 새하얀 손들이 다섯 개의 손가락을 활짝 펼치며 각각 하나의 방패를 잡아채 버렸고.
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
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
손아귀에 붙잡힌 방패들은 맹렬히 몸을 떨며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8미터에 달하는 서번트 20여 마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눈사람 소환(B)’ 스킬의 여력을 모두 쏟아부은 데다, ‘견고함(C)’과 ‘강철피부(C)’ 스킬로 강화까지 마친 두 개의 얼음 손을 쉽사리 벗어날 순 없었다.
그리고 이내...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카아아아아아아아앙
방해물들이 사라진 얼음의 대지 위에서 기간트의 대검과 재앙급 몬스터의 두 자루 갑각검이 충돌했다.
가이아가 양손으로 쥔 대검을 전면으로 쭉 내밀며 원을 만드는 듯한 궤적을 그렸고, 마치 몸이 두 개로 늘어난 듯한 초고속이동으로 좌우 양쪽의 틈을 노리던 재앙급 몬스터의 검격은 봉쇄되어 버렸다.
두 개의 검이 모두 막히자 지체하지 않고 모습을 감추는 재앙급 몬스터.
그와 동시에 가이아의 머리 위 허공과 왼쪽 측면에 4미터가량의 검은 원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왼쪽 측면에 위치한 검은 원에서 튀어나온 재앙급 몬스터가 흑광을 뿜어내는 갑작검을 가이아의 목을 향해 찔러넣었다.
둘 사이에는 4미터가량의 신장 차가 존재했지만, 검은 원의 생성 위치는 언제나 지면에서 최소 3,4미터 정도 위쪽이었기에 곧바로 목을 노릴 수 있었다.
게다가 마치 심연과도 같은 어둠이 무언가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원에서 튀어나오는 재앙급 몬스터의 속도는 녀석이 전력을 다해 달려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버클럭과 버서커 스킬로 스텟이 뻥튀기 된 가이아의 움직임 역시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운 좋게도 허공을 수놓은 얼음 구슬에 닿지 않은 재앙급 몬스터의 공격은 무척이나 빨랐고, 리치의 한계로 인해 대검을 이용한 방어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스노우가 선택한 방어 수단은 마력과 두 겹의 실드, 견고함 스킬로 강화한 가이아의 손날이었다.
대검의 손잡이를 놓은 가이아의 오른손은 투명한 막과 붉은 기운에 휩싸인 상태였고.
터어어어엉
시력과 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스노우는 목을 노려오는 재앙급 몬스터의 검날의 한쪽 면을 정확하게 가격해 튕겨냈다.
그리고는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왼쪽 다리를 차올리며 허공에 떠있는 적의 하체를 노렸다.
츠팟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재앙급 몬스터가 자취를 감춘 지점을 붉은 기운에 휩싸인 가이아의 왼쪽 다리가 간발의 차이로 지나쳤다.
지이이이이잉
교전이 있었던 자리에서 30여 미터 후방에 나타나는 검은 원 하나.
가이아의 기민한 대응에 놀란 재앙급 몬스터가 숨을 돌리기 위해 한발 먼저 물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스킬의 제한 시간을 고려해야만 했던 스노우는 녀석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전투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던 스노우가 일종의 예지에 가까운 감각을 발휘했고.
최초의 동전만 한 검은 원이 생성되는 순간, 무릎을 굽히고 있던 가이아의 몸은 이미 그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지의 파편을 무더기로 비산시키며 땅을 박찬 스노우가 순간이동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쇄도하면 전투를 속행했다.
“아이스 스피어, 파이어 스피어, 라이트닝 스피어...... 인첸트 파이어 블레스트!”
화려한 이펙트를 장착한 온갖 스킬들이 재앙급 몬스터를 향해 쏟아졌고. 그 스킬들 보다 한발 먼저, 무시무시한 불꽃을 피워올리는 가이아의 대검이 녀석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캬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이능을 사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극도로 짧은 순간에 날아든 공격.
다소 높아진 음역대의 울음소리를 토해낸 재앙급 몬스터의 전신에서 흑색의 오오라가 줄기줄기 피어올랐고.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카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어엉
.
.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분지의 중심에서 맞붙은 가이아와 재앙급 몬스터는 순식간에 20여 합의 검격을 나누고 나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수백 미터를 이동하며 수십 합을 겨뤘지만. 스노우가 버서커 스킬을 사용한 순간부터 마지막 검격을 나눌 때까지 걸린 시간은, 놀랍게도 고작 10여 초에 불과했다.
‘....................’
스노우와 재앙급 몬스터의 교전 지역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3인의 대륙급 강자, 오펠로 브롬과 이파니 그리고 칼튼 에거시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전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상급 엑스퍼트의 극에 달해, 수십 년째 마스터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오펠로 브롬과 이파니조차 마력을 폭주시킨 두 존재의 대결을 눈으로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둘의 거대한 마력을 추적하며 대강의 상황이나마 짐작하려 애쓸 뿐.
하물며 그들보다도 한 수 아래인 칼튼 에거시의 경우에는 마력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두 괴물의 격돌에서 발생하는 마력의 폭풍을 꿰뚫고 이를 감지하기에는 그의 경지가 조금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백 미터 밖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마력 폭풍의 여파와 두 괴물이 내뿜는 압도적인 위압감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으읍
반사적으로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낸 칼튼 에거시의 입이 열렸다.
“미친 괴물들...”
어지간한 강대국의 전력을 투입해야만 상대해 볼 만하다는 재앙급 몬스터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런 존재와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스노우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괴물이었다.
에키드나의 콕피트에서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오펠로 브롬이 주먹 쥔 양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괴물이라는 말 이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군. 저건 마치... 덩치를 수십 배쯤 키워놓은 마스터들 간의 대결을 보는 것 같으니...”
실제로 마스터의 싸움을 목격한 바 있는 이파니와 칼튼 에거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2
전투를 시작한 이후 재앙급 몬스터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물론 이는 전투와 관련된 부분의 성장을 의미했다.
스노우와 처음 조우했을 때의 녀석과, 잿빛으로 물든 몸으로 흑색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현재의 녀석은 아예 다른 종류의 몬스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어지간한 상대였다면 이러한 진화에 가까운 변화에 별다른 대처조차 하지 못한 채 목을 내놓아야 했을 테지만...
“이거... 남 말할 처지가 아니군.”
스노우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진화하는 상대의 모습에 몇 번이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변화가 상대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불시착한 이후,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변화를 겪은 스노우였지만.
전투를 치르는 도중, 이토록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을 만큼 급격하게 성장한 경우는 없었다.
그나마 알타몬트 대회전에서 만난 용병왕과의 전투에서 어렴풋이 그런 감각을 느꼈었던 것이 전부.
눈앞에 있는 재앙급 몬스터처럼, 실시간으로 전투 센스가 눈에 띄게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각성한 세 가지 특성 ‘파일럿(S)’, ‘서리바람(B)’, ‘육체강화(C)’ 특성에서 파생된 고유스킬들의 숙련도가 상승하는 것이 전투를 치르는 내내 느껴지고 있었다.
맨몸으로는 고작 1분 정도가 한계였던 버서커 스킬의 경우,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로는 2분 이상 유지가 가능했고.
현재는 2분 30초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조금이지만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숙련도와 경험치의 증가로 인해 한계가 늘어났다고 한들, 앞으로 고작 30초 정도가 한계임을 직감한 스노우.
‘30초, 늦어도 1분 안에는 마무리 지어야 한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어어엉
카아아아아아앙
그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엄쳐 다니는 와중에도 두 괴물의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마력 회복력이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었음에도, 바닥을 보이려 하는 잔여 마력 수치 역시 빠르게 승부를 보아야만 하는 이유였다.
츠팟
콰아아아아아아앙
쿵쿵쿵
기간트의 대검에 어깨를 베인 재앙급 몬스터가 가이아의 몸통에 강력한 킥을 꽂아 넣은 뒤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새 고통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팔에 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녀석이 가이아의 후방에 나타난 검은 원에서 튀어나오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단 세 걸음을 물러서는 것만으로 충격을 해소한 가이아는 이미 자세를 바로잡은 상태였고.
순식간에 또다시 10여 합이 흘렀다.
이제 버서커 스킬의 한계 시간까지는 고작 20여 초만이 남은 상황.
그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한쪽 손에 든 갑각검을 땅에 박아넣은 채, 한껏 자세를 낮추고 극저음의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재앙급 몬스터.
생애 처음으로 격전을 치른 녀석 역시, 비록 겉모습은 멀쩡(재생 이능의 효과로) 했으나 체력적으로는 힘든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놈도 지쳤어. 이제 승부를 봐야 해... 한계 돌파.”
스노우의 입에서 ‘파일럿(S)’ 특성의 히든 고유스킬(S급에만 존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주위의 마력이 가이아를 향해 몰려들며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한 재앙급 몬스터 역시, 경계심 가득한 울음을 내뱉으며 마치 먹물을 터뜨린 듯 새카만 마력에 휩싸였다.
다음 순간...
타아악타악타악타악탁탁탁......
허공을 맴돌던 두 개의 방패가 조각조각 분리되며 다시금 재앙급 몬스터의 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녀석 역시 최후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것이다.
먼저 움직인 쪽은 재앙급 몬스터였다.
츠륵
녀석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고.
츠팟
츠팟
츠팟
츠팟
“넷?”
이능으로 생성해낸 심연의 원의 숫자가 무려 넷으로 늘어났다.
가이아의 머리 위 허공과 좌우, 후방에서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심연의 원.
그리고 후방에 자리한 원으로부터 재앙급 몬스터가 지닌 존재감의 편린이 느껴진 찰나의 순간.
스팟
심연의 터널을 통해 공간을 넘나드는 재앙급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가이아의 모습과 마력, 존재감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갸륵?
시커먼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갑각검을 내뻗으려던 녀석의 머리가 모로 기울며 짧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었던 가이아가 검은 원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재앙급 몬스터의 뒤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아아아아아아아
대경실색한 재앙급 몬스터가 황급히 몸을 뒤집으며 동시에 이능을 발동하려 했지만.
서걱
남은 마력을 쥐어짜 한계까지 강화한 대검이 녀석의 목을 훑고 지나가는 쪽이 한발 빨랐다.
콰드드드드득
목을 날려버렸음에도 안심하지 못한 스노우가 곧바로 재앙급 몬스터의 가슴에 붉은빛에 휩싸인 대검을 박아 넣었고.
..................
탓
일순간 찾아온 정적 속에서 잡고있던 검의 손잡이를 놓아버리자.
어느새 녹색으로 돌아온 재앙급 몬스터의 머리 잃은 몸뚱어리가.
쿠우우우우웅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차가운 대지 위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