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30화 (130/169)

130화 스펙 업(2)

#1

엘가드 성으로 복귀한 지 11일째.

나는 모종의 이유로 여전히 엘가드 왕국에 머물고 있었다.

재앙급 몬스터라는 미증유의 위협으로 인해, 왕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신의 요람(용광로)의 가동이 중단될 위기에서 벗어난 드워프족.

그들은 토벌대가 복귀한 지 10일이 넘어가는 현재까지도 연일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토벌대의 수장이었던 오펠로 브롬의 경우, 왕국의 몇몇 대신들과 함께 라플론 광산의 채굴 정상화와 지난 토벌에서 획득한 엄청난 양의 몬스터 부산물들의 처리에 대해 논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는 토벌대에 참가하지 못한 드워프 국왕 파이톤 그레이엄의 심술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었는데.

그가 토벌 성공 축하연을 핑계로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과 함께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모든 업무를 오펠로 브롬과 소수의 대신들이 떠맡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수의 선택받은 대신들이 국왕의 토벌대 합류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들이라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엘가드 성 복귀 후 8일 차였나?

오랜만에 마주친 오펠로 브롬의 눈가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오펠로?’

‘빌어먹을 자식,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속이 좁아지는군.’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죠. 근데 진짜 괜찮습니까?’

‘젠장, 이 일만 끝마치면 은퇴다. 은퇴하고 술이나 퍼마실 거라고!’

나는 불쌍한 늙은 드워프에게 ‘리커버리(C)’ 스킬을 걸어준 뒤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엘프 공주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이파니)은 복귀 후 7일째가 되는 날 엘가드 왕국을 떠났다.

재앙급 몬스터를 처리하고 왕국으로 복귀하는 여정에서부터 느낀 것이었는데. 이파니는 나를 대함에 있어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녀의 신분이 대륙의 강대국 중 하나인 엘프 왕국의 첫 번째 공주라는 걸 감안하면, 아무리 내가 선보인 실력이 충격적이었다 한들 조금 과할 정도로 저자세를 취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 이파니는 내게 이후의 행보에 관해 물어왔고.

딱히 비밀로 할 이유가 없는 다음 행선지를 말해주자, 그녀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었다.

‘이펜타르크 제국이라...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면 제국에서의 일을 마친 이후엔 꼭 저희 왕국에 방문해 주세요.’

‘글쎄, 일정을 장담할 순 없을 것 같은데.’

‘두 달... 아니, 석 달 안에만 방문해 주셔도 됩니다. 하르세리안 왕국의 공주로서 정식으로 의뢰를......’

‘엘프 왕국의 의뢰라... 나쁘지 않군. 하지만 내 몸값은 꽤 비싸다.’

‘무조건 엘가드 왕국 이상의 보상을 약속드리죠.’

‘좋아, 3개월 안에 찾아가도록 하지.’

‘고마워요!’

엘프 공주 이파니는 내 손을 붙잡은 채 한참이나 흔들어 댄 후 하르세리안 왕국으로 떠나갔다.

아마도 복귀 이후 5일 차에 서신으로 전해진 헬레나 오도넬(발렌타인)의 의뢰를 수락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엘가드 왕국과의 협상을 끝마치는 대로 그녀와 함께 하르세리안 왕국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엘프제 기간트는 못 참지.’

예상대로라면, 정령력 증폭 마법진을 탑재한 엘프제 기간트는 대륙의 모든 기간트 중 내 전투력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체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마침 이동 경로가 딱 맞아떨어지는군.’

오르비스 대륙 북부의 지도는 엘가드 왕국 -> 이펜타르크 제국 -> 하르세리안 왕국 -> 나이만 왕국(남), 판 왕국(북) 순으로 되어 있었기에.

엘가드 왕국에서 이펜타르크 제국으로 건너가 일을 처리한 다음, 곧바로 하르세리안 왕국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최적의 루트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루트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대륙 북부의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나이만 왕국 출신 칼튼 에거시 역시, 육로를 통해 이동할 경우 이 루트를 따라 돌아가야만 했는데.

‘나이만 왕국이라면, 그곳까지 곧장 가는 배편이 있을 텐데?’

‘으윽, 배라면 질색입니다. 멀미가 심해서...’

‘아무리 그래도, 육로를 이용하면 여정이 3,4배는 길어지지 않나?’

‘어차피 마스터가 되면 남는 게 시간일 텐데요, 뭘. 이참에 형님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경계’의 근처에도 다가서지 못한 주제에 마스터를 운운하는 이 녀석이 여전히 엘가드 왕국에 눌러앉아 있는 이유는...

사실 내가 저지른 경솔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젠장, 호랑이 교관 스킬의 효과가 그 정도로 뛰어날 줄이야...’

#2

시간을 조금 되돌려 엘가드 왕국으로 복귀한 지 5일째 되는 날.

연일 쏟아지는 드워프들의 선물 공세가 서서히 귀찮게 느껴질 때쯤, 눈이 번쩍 뜨이는 선물(소환형 전신 갑온 ‘델토르’)을 받은 스노우는 그것의 성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칼튼 에거시와 함께 훈련장으로 나섰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려 500rp급 기간트의 공격(비록 50%의 힘으로 때리긴 했지만)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한 갑옷의 사기적인 성능에 한껏 고무되었다.

‘이 정도면 마스터의 기습도 무서울 게 없다.’

당연히 방어력만 믿고 마스터와 맨몸으로 부딪히는 멍청한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단지 기간트를 소환하고 탑승할 찰나의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이면 충분했으니까.

기간트에 탑승하지도 못한 채 죽어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전신 갑옷 ‘델토르’는 스노우에게 있어 천금의 가치가 있는 선물이었다.

‘형님,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지? 분명 제대로 후려쳤는데...’

‘멀쩡해서 유감이란 거냐?’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나저나 이거 진짜 대박이네. 어떻게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할 수가 있지?’

칼튼 에거시가 탐욕에 젖은 눈으로 갑옷의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정작 선물을 들고 온 브람스가의 후계자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린 상태였다.

사실 그는 맨몸(갑옷만 입은 채)으로 기간트의 공격을 받아보겠다고 했을 때 한사코 반대했었지만, 정상적인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진 두 천재 오너를 만류하는 데는 실패하고야 말았다.

‘자, 잘못하면 스노우님이 크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델토르의 자체 방어력으로는 명백한 한계가...’

기어이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르는 두 오너.

브롱코스의 거대한 주먹에 강타당한 스노우가 맥없이 수십 미터를 날아가 훈련장 바닥에 처박힐 때는 눈앞이 깜깜해졌었던 브람스 가문의 후계자였다.

‘와, 왕국의 영웅이 우리 가문의 갑옷 때문에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신의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올랐고, 신의 요람에 다시금 쇳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설적인 업적의 일등 공신이 바로 스노우였다.

그로 인해 왕국 전역에서 연일 축재가 끊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인물이 자신의 가문에서 선물한 갑옷의 테스트를 하다 심각한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당장에 자신의 수염을 뽑아버리겠다며 달려들 드워프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설자란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온 그가 본 것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전신 갑옷 델토르와 갑옷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스노우였다.

‘어, 어떻게? 대체 마력을 얼마나 퍼부었길래...’

기간트의 공격으로부터 저토록 멀쩡하다는 것은 그 충격을 델토르 특유의 마력장으로 대부분 상쇄했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개발 단계에서 거친 수천 번의 실험을 통해, 최상급 엑스퍼트라 한들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마력장의 위력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비슷한 수준의 최상급 엑스퍼트가 전력으로 펼친 일격에 직격당할 경우, 마력장이 파괴되고 갑옷에 상처가 남지만 갑옷을 입은 최상급 엑스퍼트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전달되지는 않는 수준.

사실 이마저도 기존에 존재하는 갑옷들에 비하면 엄청난 수준임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델토르의 경우, 소환과 해제를 통해 순식간에 탈착이 가능하다는 이점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기간트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으라고 만든 게 아닌데...’

게다가 흥이 오른 두 오너는 뜬금없이 대련을 이어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브롱코스에 탑승한 것은 델토르를 장착한 스노우였고.

그의 상대는 2300rp급 기간트 첼시에 탑승한 칼튼 에거시였다.

그리고 유일한 목격자인 브람스 가문의 후계자는 대련이 이어지는 동안 몇 번이고 자신의 두 눈을 부비적거려야만 했다.

20분간 이어진 대련 내내 신장 5미터짜리 소형 기간트 브롱코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는...

고등급 기간트 첼시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3

나이만 왕국의 자랑 칼튼 에거시는 분명 기간트 조종의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였다.

게다가 본신의 실력 또한 최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상위권에 도달해 있었으니.

종합적인 전력으로 볼 때, 대륙급 강자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은 실력자임이 자명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엘가드 왕국의 의뢰를 받아 참여한 토벌전으로 인해, 드높았던 그의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해버린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비린토스와 보스페로스라는 최상급 몬스터를 상대로 훌륭히 제 몫을 해낸 오펠로 브롬과 이파니슬라 르 바라탄, 두 대륙급 강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그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오너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서도, 아나투레스(스노우가 명명)란 이름을 부여받은 최상급 몬스터를 제대로 제어해내는 데 실패해 버린 것이다.

물론 이파니가 합류한 이후로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걸 감안한다면, 다른 세 가디언에 비해 아나투레스가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 내내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만 했었던 굴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스노우라는 이레귤러의 존재는 칼튼 에거시의 심령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칼튼 에거시가 상상 속에서 그려왔던 ‘완성된 자신’과 비교해도 몇 배 이상 뛰어난 실력을 지닌 오너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는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여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기를 쓰고 벽을 박살내거나 뛰어넘으려고 도전하는 타입과도 거리가 멀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개구멍을 찾거나 벽을 우회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작금에 당면한 시련에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실력을 지닌 스노우의 옆에 거머리처럼 찰싹 들러붙는 것이었다.

‘그럼 뭐 하나라도 더 얻어 갈 수 있지 않겠어?’

마침 가디언인 최상급 몬스터를 포함한 수백 마리 몬스터의 사체를 넘겨받았다는 적절한 핑곗거리까지 있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에게 팔자에도 없던 형님이 생겼다.

물론 상대가 자신에 비해 10살 이상 어려 보이긴 했지만...

‘싸움 잘하면 형님이지, 뭐.’

애초에 실력자들의 나이를 외모로 판단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로 치부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엘가드 성에 머무른 지 9일째 되던 날이자.

비굴할 정도로 들러붙어 브롱코스 VS 브롱코스의 대련(을 빙자한 구타)을 치른 지 4일째 되는 날.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기어이 증명해 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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