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스펙 업(4)
#1
[훈련병의 경험치가 최대치에 이르렀습니다.]
[훈련병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파일럿 재능 ? 92/97(현재/최대치) -> 93/97(현재/최대치)]
훈련병으로 지정한 지 고작 5일 만에 파일럿 능력치가 상승한 것은 나로서도 제법 의외의 상황이었다.
물론 무려 A+급에 도달해 있는(잠재능력은 S급, S급은 +,-가 존재하지 않는다) 칼튼 에거시의 현재 능력치가, 정말로 고작 5일간의 스킬 효과 적용만으로 상승했을 리는 없었다.
‘훈련병으로 등록되기 전부터, 이미 상당한 경험치가 쌓여 있었겠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엘가드 왕국 토벌대에 합류하기 이전의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나와의 첫 만남에서 있었던 대련으로부터 시작해, 토벌 과정에서 녀석이 겪은 일들은 무려 90대를 돌파한 파일럿 능력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만한 전투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스펙 업을 한 것은 비단 칼튼 에거시만이 아니었다.
[최초로 훈련병의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훈련병 슬롯이 2 -> 3으로 늘어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훈련병 탐색 범위가 증가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훈련 효율이 상승합니다.]
훈련병 지정으로 등록이 가능한 훈련병의 슬롯이 2개에서 3개로 증가했고. 탐색 범위와 훈련 효율이 역시 업그레이드되었다.
‘뭐, 슬롯이나 탐색 범위야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가 있으니 확실하게 체감이 되는데... 훈련 효율 증가? 이건 좀 애매하군.’
사실 이런 경우 때문에 종종 불친절하게 느껴지곤 하는 ‘메시지창’이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스텟(힘, 민첩 수치 등등)이나 몇몇 스킬의 경우, 가시적인 숫자를 표기해 주지 않아 상승 폭을 어림짐작하는 수밖에 없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슈와아아아아악
쉬이이이이이이익......
능력치가 상승한 직후, 한동안 무아지경으로 검무를 춰대던 칼튼 에거시의 첼시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찌나 격렬한 춤사위였는지 첼시의 전신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을 정도.
천재 중의 천재인 만큼, 녀석은 스스로에게 일어난 변화(발전)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칼튼 에거시 정도의 천재가 아니라 한들, 무려 능력치 90대에서 일어난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뭐, 일단 능력치 90대에 진입한다는 것 자체가... 천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당연한 말이었지만, 70이나 80대에서 능력치 ‘1’이 상승하는 것과 90대에서 ‘1’이 상승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난 간극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 단순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파일럿 능력치 ‘92’의 칼튼 에거시 셋이 한꺼번에 덤빈다 한들, 능력치 ‘93’의 칼튼 에거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뭐, 내겐 ‘파일럿 능력치 92’의 칼튼 에거시나 ‘파일럿 능력치 93’의 칼튼 에거시나 별반 다를 것도 없었지만.
[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제부턴 쉽지 않을 겁니다, 형님!]
스스로의 성장에 고무된 칼튼 에거시가 기고만장하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교관 된 도리’로서 훈련병의 교만한 마음을 억눌러 줄 의무가 있었다.
나는 ‘능력치 93의 칼튼 에거시’에게 맞춰 아주 살짝 텐션을 끌어올렸고.
콰아아아아아아앙
[끄어억!]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꾸에에에에엑!]
쿠당탕탕탕탕....
[아아악!]
녀석의 머리와 심장에 ‘겸손’이라는 두 글자가 각인 될 때까지 매타작을 멈추지 않았다.
#2
재앙급 몬스터를 처치하며 토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
나는 엘가드의 수뇌부에게 한 가지 새로운 제안을 건넸고.
이 새로운 제안으로 인해 왕궁에서는 드워프 대신들의 회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회의를 하건 말건, 다크서클이 턱까지 늘어지건 말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결론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지 간에, 내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할 리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느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결단코 ‘그렇지 않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칼튼 에거시와의 대련?
사실 칼튼 에거시를 봐주는(?) 건 일종의 유희(스킬에 대해 알아보려는 의도도 일정 부분 존재했지만)나 마찬가지였기에, 이것은 충분히 ‘느긋함’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칼튼 에거시와의 대련 등, 엘가드 왕국에서 보내는 낮의 시간이 각종 유희와 향락으로 도배된 느긋함의 연속이었다면.
엘가드 왕국에서 보내는 ‘밤’은 하루하루가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는 진정한 의미의 ‘스펙 업’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3
펄럭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루흐의 날개(레비테이션 스킬 인첸트)를 멋들어지게 착용한 뒤, 오른손 검지에 착용한 반지 형태의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츠팟
일순간 반지로부터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고, 빛이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은 내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붉은 색깔의 전신 갑옷이었다.
“레비테이션.”
망토에 각인 된 주문을 외우자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레비테이션 스킬의 효과가 적용되지 않던 기간트와는 달리, 드워프 명장에게 선물 받은 전신 갑옷 ‘델토르’는 착용 후 스킬을 펼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긴, 어쨌든 갑옷일 뿐인데 망토의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단순히 스킬의 효과가 적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신 갑옷으로 인해 ‘루흐의 망토’의 우스꽝스러운 외형이 완전히 가려진다는 것 역시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중력 조절, 실피드.”
나는 중력 조절 스킬을 이용해 무게를 최대한 줄인 뒤, 중급으로 성장한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강력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공중으로 떠올랐던 몸이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쉬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왕궁의 내부에서 갑작스럽게 날아오른 인영을 발견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이에 놀라거나 경계심을 띠는 드워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멀어지는 검붉은 전신 갑옷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들까지 존재했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0일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차림새를 한 채 왕궁의 정원에서 하늘로 날아올랐으니.
이는 드워프들에게도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 없는 장면이었던 셈이다.
레비게이션 스킬을 이용해 5분 동안 최대한 먼 거리를 이동한 뒤.
타앗
지상에 착지한 나는 격납고에 잠들어있던 바이크를 소환해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심처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렇게 약 20여 분을 달리자, 지난 10여 일간 신세를 지고 있던 꽤 넓은 크기의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터에 도착한 나는 바이크를 격납고로 돌려보낸 뒤.
지난 며칠간 행해왔던 루틴을 그대로 반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안티가, 포세이돈.”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포세이돈(A)이 출격합니다.]
파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아앗
은은한 빛무리가 사라지고, 더이상 원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두 기의 기간트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손목에 차고 있는 붉은색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자.
파아아아아앗
청색의 포세이돈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적색 기간트 가이아가 소환되었다.
내 앞에 도열하고 있는 위풍당당한 3기의 기간트.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루틴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아나투레스 소환.”
화아아아아앗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한번 빛무리가 터져 나왔고.
제라스와 가이아에 못지않은 덩치를 지닌, 전직 가디언이자 최상급 몬스터 아나투레스가 소환되었다.
윤기가 흐르는 황금빛 털 아래에 감춰진 강철 같은 근육질 신체.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긴 팔과 짧지만 두꺼운 다리.
단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하는 새빨간 눈동자.
재앙급 몬스터를 수호하던 네 마리 가디언 중, 단연 최강이란 평가를 받았었던 이 최상급 중의 최상급 몬스터는...
“끼이이이이이이잉...”
어찌 된 일인지 잔뜩 위축된 것처럼 자세를 웅크린 채.
붉디붉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세 기간트와 내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나는 녀석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한쪽 입가를 씨익 들어 올렸다.
“흐흐흐... 버틸 만큼 버텼잖아. 이제 그만 ‘각인’을 받아들는 게 어때? 그럼 편해질 수 있을 거야. 고통 끝, 행복 시작이라고.”
두 눈을 끔벅거리던 아나투레스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4
최상급 몬스터 아나투레스는 본래 북부 다르다넬 산맥, 그중에서도 북쪽 끄트머리를 영역으로 하는 수백의 안티가 무리 중 하나였다.
평범하디 평범한 중급 몬스터에 불과한 안티가.
사실 ‘무리’가 지니는 힘을 제외하면 안티가라는 개체가 가지는 힘은 중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하위권에 속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렇다면 아나투레스는 대체 어떤 곡절로 인해 최상급 몬스터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상급 몬스터 ‘버두락’을 사냥하는 도중 부상을 입은 안티가 한 마리가 무리에서 도태되었고.
부상의 고통과 굶주림에 반쯤 정신이 나간 녀석은, 손에 잡히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간에 닥치는 대로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렇게 녀석의 입속으로 들어간 것들 중에는 강력한 마취 효과와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초파’라는 풀이 존재했는데.
고통을 잊기 위해 계속해서 이 풀을 섭취한 안티가는 환각 증세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어느새 대륙의 끝인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최북단 절벽에까지 이르게 된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해안과 마주한 어마어마한 높이의 절벽에서 추락하는 안티가.
다행히도 절벽의 중간 지점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이 존재했고.
무수한 우연과 행운이 겹쳐 생명이 간당간당한 상태의 안티가는 그 동굴 안으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동굴은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품은 ‘영초(靈草)’의 군락지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닥치는 대로 영초를 먹어 치우는 안티가.
영초의 탁월한 효과로 몸과 정신을 회복한 녀석은 당장에 동굴을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인지하고는 그곳에서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절벽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녀석에게서는 더 이상 중급 몬스터 안티가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은신을 위해 나무의 그것과 닮아있었던 털의 색깔은 윤기가 좔좔 흐르는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전에 비해 3배 이상 커진 신장은 5미터를 훌쩍 넘어갔다.
그리고 이전이라면 100마리가 넘는 동족이 달라붙어야 겨우 사냥이 가능했었던 상급 몬스터를 그리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본능적인 이끌림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재앙급 몬스터를 찾아간 아나투레스는 그날로 그 위대한 존재의 가디언이 되었다.
만약 재앙급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이 흘렀다면.
어쩌면 아나투레스 스스로가 ‘재앙’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한낱 중급 몬스터 안티가에 불과했던 아나투레스를 최상급 몬스터로 이끈 운명은.
그에게 ‘재앙’이 아닌 ‘가디언’의 자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작된 운명의 장난.
이제 아나투레스는 ‘재앙’도 ‘가디언’도 아닌.
한 인간의 ‘소환수’로 전락하기 직전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