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스펙 업(5)
#1
내가 아나투레스의 각인을 시도하기 위해 북부 다르다넬 산맥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엘가드 성으로 복귀한 다음 날부터였다.
복귀 당일 밤에는 기쁨(광산 재가동)과 섭섭함(토벌대 제외)을 번갈아 토로하는 드워프 왕과 밤이 새도록 술잔을 나눠야 했었던 탓에, 도무지 몸을 뺄 수 없어 패스.
하지만 2일 차부터는 전투의 피로를 핑계로 더 이상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낮 동안은 드워프들이 들고 온 선물을 챙기며 인맥을 다진 뒤.
해가 저문 이후에는 왕궁의 정원에서 날아올라 북부 다르다넬 산맥의 내부로 향했다.
굳이 최상급 몬스터의 테이밍 장면을 노출할 이유가 없었기에 산맥의 안으로 안으로 이동했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바이크의 속도가 워낙 빨랐다) 꽤 커다란 면적의 공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터에 도착해 바이크를 격납고에 집어넣은 뒤, 떨리는 마음으로 아나투레스를 소환했다.
‘아나투레스 소환.’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사육장에 갇혀 있던 최상급 몬스터 아나투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끄륵?
바닥에 배를 깐 채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쥔 자세로 소환된 아나투레스.
녀석은 갑자기 바뀌어버린 환경에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휘휘 돌리며 새빨간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아나투레스의 시선이 별안간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고.
그 시선의 끝에는 다름 아닌 내가 서 있었다.
끄륵?
나를 발견한 녀석은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모로 꺾으며 짧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의문에 가득 찬 그 짧은 울음은 이내...
크르르르르르르르르......
경계심과 분노가 듬뿍 담긴 그르렁거림으로 변했다.
살기등등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아나투레스.
나는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이머 특성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귀동냥을 통해 전해 들은 개괄적인 것들일 뿐이었고, 당연히 디테일한 부분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실수한 부분은 엄연히 따지면 귀동냥으로 들었던 개괄적인 것들 중 하나였다.
S급 테이머인 파트리스 오보노가 말했었다.
‘포획에 성공했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돼. 각인을 새기기 전까진, 몬스터는 그저 몬스터일 뿐이니까. 소환수도 뭣도 아니라고.’
‘테이머(A)’ 특성의 고유스킬 ‘포획(A)’은 어디까지나 제압한 몬스터를 아공간인 사육장으로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즉, 사육장에 갇힌 몬스터는 몬스터로서의 자아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라는 뜻이었고.
이를 테이머의 소환수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인’이라는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런 대비조차 없이 무려 최상급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몬스터, 그것도 사육장의 고유효과인 ‘위압’으로 인해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최상급 몬스터를 지척인 거리에 풀어놓은 셈이었다.
크르르르르르르르르...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아나투레스가 자세를 낮춘다.
수북한 황금빛 털에 뒤덮여 있었지만, 녀석의 짧고 우람한 다리근육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젠장...’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본능이 내 목숨을 살렸다.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침과 동시에.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던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화아아아아앗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
사방으로 비산하는 돌무더기.
마치 점멸하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몬스터.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붉은색 강철 거인.
끼에에에에에에에엑!
타아아앗
내 앞을 막아선 가이아의 코앞(정말로 코가 맞닿을 거리)까지 접근한 아나투레스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토해내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오오...’
관성의 작용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 급정거와 동시에 수직으로 솟구친 그 말도 안 되는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퍼어엉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박차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전환한 아나투레스가 가이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언제든지 몸을 뺄 수 있도록 무게 중심을 뒤쪽에 둔 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겁먹었군.’
아무래도 미친 듯이 두들겨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관계로, 아직까지 가이아에 대한 두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상의 흔적이 전혀 없는데? 회복력이 엄청나. 그나저나... 이번엔 진짜로 뒈질뻔했군.’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곧바로 사육장으로 돌려보내 버리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지만.
맨몸으로 마주한 아나투레스의 무시무시한 아우라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나마 본능의 인도에 따라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테이밍을 시도하려다 죽은 멍청한 테이머이자 기간트 오너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뻔했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가이아와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아나투레스를 바라보며 스킬을 사용했다.
‘각인.’
화아아아아앗
아나투레스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발산되었고.
곧이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에 실패하셨습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마력은 차고 넘친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각인.’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에 실패하셨습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또다시 실패.
‘역시 맨몸으로는 무리인가?’
아나투레스 수준의 강력한 몬스터라면, 설령 S급 테이머인 파트리스 오보노라 할지라도 쉽사리 각인을 성공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테리마.’
나는 가이아에 탑승한 다음 재차 스킬을 시전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에 실패하셨습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에 실패하셨습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
.
.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에 실패하셨습니다.]
[S-급 몬스터 아나투레스의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젠장...”
기간트로 인한 증폭 효과에도 불구하고 연달아 10여 번의 실패가 떠버렸다.
[마력 14642/27399]
고작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무려 10000이 훌쩍 넘는 마력이 깎여나가 버렸고.
이는 그 어떤 스킬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마력 소모량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원체 강력한 몬스터인 데다, 제대로 기를 꺾어놓지 못한 탓인 것 같았다.
‘더럽게 비싸게 구는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건 다 네 녀석이 자처한 일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결심을 굳힌 나는 가이아를 소환 해제했다.
‘얼씨구...’
아나투레스는 가이아가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끔찍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쯧, 이걸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안티가.’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화아아아아앗
가이아를 돌려보낸 내가 소환한 것은 보유한 기간트 중 가장 저등급인 출력 800rp의 안티가였다.
멋들어진 금테를 두른 원숭이 머리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팔, 그리고 서대륙의 기간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렵하다 못해 마른 몸.
변형율을 한계까지 사용한 안티가에게서 본래의 모습을 유추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실 포세이돈(원명 제라스)과 가이아를 얻은 이후로는 내내 격납고에 잠들어 있었던 안티가였다.
‘마지막으로 탔던 게... 크로스보우가 자폭한 직후로군.’
사실 출력이 두 배가량 높은 기간트들을 두고, 굳이 저등급인 안티가를 사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딱히 비밀스럽게 해치워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내가 가이아도, 제라스도 아닌 안티가를 선택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말 안 듣는 개에겐 매가 약이지.’
그리고 안티가의 무기 슬롯 1번에는 최고의 명품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닌.
개(몬스터) 잡는 매가 장착되어 있었다.
#2
끄륵?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붉은색 괴물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자신에게 줄기차게 ‘각인’을 새기려 드는 조그마한 생명체뿐이었다.
‘각인’이 시도 된 순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아나투레스의 분노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크르르르르르르르르르...
약해 빠진 중급 몬스터로 태어나 최상급 중의 최상급으로 진화하는 와중 발달한 본능에 의하면, 저 조그마한 생명체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빠진 존재였다.
그런 주제에 감히 자신을 굴복시키려 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웬 요상한 공간에 갇힌 채, 온종일 기분 나쁜 감각에 짓눌려 있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로 아나투레스는 분노했다.
그리고 참지 않기로 했다.
쌓일 대로 쌓인 분노를 마음껏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노를 폭발시키기 전, 그 무시무시한 붉은색 괴물의 존재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치밀함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아아앗
붉은색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서 놈이 등장할 때와 흡사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크륵...
다행히 이번에 등장한 건 자신에 비해 한참이나 작고 연약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파앗
자신에게 각인을 새기려던 건방진 생명체 역시 모습을 감추었다.
아나투레스는 두 녀석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작은 녀석과 그보다 훨씬 더 작은 녀석이 힘을 합친다 한들, 자신의 상대는 되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크르르르르르르르르...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낸 아나투레스가 중급 몬스터였던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능력을 극한까지 진화시킨 ‘은신의 권능’을 펼치며 주위 환경에 녹아들었다.
비록 외견상 작고 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긴 붉은색 괴물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적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최상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아나투레스의 은신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간파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강력한 권능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소리와 기척, 마력을 완벽하게 숨긴 채 적을 향해 접근하는 아나투레스.
녀석의 손끝에서 길쭉한 손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대로 접근해 팔을 휘두르기만 하면, 적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릴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적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가 삽시간에 수십 미터로 늘어나.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륵
불꽃에 휩싸인 채 거대한 원을 그리며.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쿠아아아아아아아앙
주변을 초토화 시켜버리기 전까지는.
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수십 미터로 늘어난 막대기를 휘둘러 대는 적.
불붙은 막대기를 피하느라 은신은 깨져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아나투레스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한 기묘한 생김새의 상대가, 자신의 신장 정도의 길이로 줄어든 막대기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나투레스는 자신의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작은 괴물은 분명 붉은색 괴물보다 약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나투레스 자신보다는 훨씬 더 강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끼에에에에에에에엑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끄에에에에에에엑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지난 토벌전 때의 반복이었다.
즉,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얻어터진 후 사육장에 던져지길 반복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본능적인 반발심과 강인한 인내심을 무기로, ‘각인’을 거부하는 것이 아나투레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그날로부터 10여 일 내내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조그마한 인간이 시도하는 ‘각인’을 거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다른 괴물과 하나가 된 이후 시도하는 ‘각인’을 거부하는 건 엄청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가늘게 이어지던 인내심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나투레스는 더이상 얻어맞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녀석의 몸에서 엄청나게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이마에는 선명한 ‘인(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
아나투레스는 한 테이머의 소환수로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