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35화 (135/169)

135화 기간트 \'브롱코스\'(1)

#1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나직하게 울려 퍼진 파이톤 그레이엄 국왕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상석이 있는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맥락 없이 던져진 국왕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엘가드 왕국의 내무대신 도리안 니하람이었다.

“오래 기다리다니... 혹시 스노우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

“잘 알고 있군.”

“그건...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스노우경에게도 충분히 양해를 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 해도 보름은 너무 길었어. 게다가 이건... 어차피 결론이 정해진 회의 아니던가?”

국왕의 말에 도리안 니하람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어쩌다 보니 반대파의 대표 격처럼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 역시 국왕의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였다면, 도리안 니하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플렉시온급 마정석을 엘가드 왕국의 소유로 만들고자 수를 썼을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드워프족의 성향과는 달리 계략을 사용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데다.

자신의 그러한 성향이 왕국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굳게 믿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토벌대에 참가했었던 오너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 가능성을 타진해본 결과...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오펠로님이나 다른 오너들의 증언 중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무력을 동원하는 건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짓이나 마찬가지야.’

스노우라는 용병은 왕국 최강의 전사 오펠로 브롬이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을 뻔한 재앙급 몬스터를,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잡아내 버린 괴물이었다.

심지어 대륙급 강자 셋(오펠로 브롬, 이파니, 칼튼 에거시)을 상대로 여유로운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바 있지 않던가.

‘자칫하면 엘가드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지도...’

게다가 하이엔드급 기간트를 제작해 주는 대가로 플렉시온급 마정석을 제외한 모든 부산물의 권리를 넘기기까지 했으니, 이쪽에서는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왕국의 거대한 위기를 타파해준 영웅이자 은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국왕 파이톤 그레이엄의 말이 옳았다.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것도.

이 회의의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도.

도리안 니하람은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난 보름간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물론 회의 석상에서만) 국왕의 입에서 방향성이 제시되는 순간, 더 이상의 회의는 무의미했다.

도리안 니하람은 왕립 병기창의 수장인 핀트 발레트를 비롯한 ‘찬성파’들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스노우경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부족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다만, 그가 원하는 데로 하이엔드급 기간트를 제작해 주되... 제작 기간에 최대한 여유를 두어 통보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제작 기간이라... 그래, 얼마가 좋겠나?”

“1년 정도는...”

“너무 길다.”

“그렇다면 8개월...”

“핀트경, 실제 하이엔트급 기간트의 제작 기간이 어떻게 되지?”

돌아가는 상황에 반색하고 있던 엘가드 최고의 엔지니어 핀트 발레트가 지체없이 답했다.

“플렉시온급 마정석이 준비된 이상 4개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파이톤 그레이엄 국왕이 잠깐의 고민 후 입을 열었다.

“6개월 주지. 왕국의 은인에게 선사하는 것이니 꼼꼼히, 실수 없이, 완벽하게 만들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이미 스노우의 그간 행적은 낱낱이 파악되어 엘가드 왕국의 수뇌부에게 보고된 상황이었다.

물론 루페른 왕국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지만.

베른 요새를 떠난 이후의 행적만 보더라도 그가 꾸준히 위험한 전장만을 찾아다니고 있음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스노우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이기는 했지만, 만약 6개월 안에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하이엔드급 기간트는 그대로 엘가드 왕국의 소유로 남을 수도 있었다.

파이톤 그레이엄 국왕이 내무대신 도리안 니하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의 성향에 맞지 않게 2개월의 시간을 추가하는 꼼수를 허락해 줌으로써, 왕국을 위해 구정물에 손을 담그는 것조차 마다않는 내무대신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

‘어차피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지.’

뜬금없이 드래곤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이상, 재앙급 몬스터를 홀로 해치울 수 있는 강자에게 불행할 일이 발생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강자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애초부터 스노우의 제안을 거부할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던 파이톤 그레이엄 국왕이었다.

보름 가까이 시간을 끄는 것을 방관했었던 이유 역시, 그러한 강자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은 그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지.’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드워프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지난밤 스노우와 가진 독대 자리에서 왕국을 떠나겠다는 통보를 들은 바 있었던 드워프 국왕이었다.

‘여기서 안되면 이펜타르크 제국에 제안을 넣을 거라니...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지.’

플렉시온급 마정석의 희귀도를 생각하면, 하이엔드급 기체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자신이 타지도 못할 ‘트리스탄(국왕의 재능이 낮아 실질적으로 타는 기체는 1400rp급 아트론)’의 제작에 성공한 이후로, 왕국의 기간트 제작 기술이 얼마만큼 거대한 발전을 이루었던가.

때문에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한 스노우의 태도에, 독대하는 내내 그를 달래며 기간트 제작을 약속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왕지사 만들어줄 기간트라면...

어쩌면 오르비스 대륙 최강자일지도 모를 사내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왕국의 기간트 제작 기술이 총망라된 최고의 기간트를 만들어주겠노라.

굳게 다짐하는 파이톤 그레이엄 국왕이었다.

#2

엘가드 왕국은 살기 좋은 나라였다.

힘 있는 자들이야 어디서건 잘 먹고 잘 사는 게 당연하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반 백성들에게 살기에 좋은 나라라는 뜻이었다.

사실 이건 매우 수평적인 드워프 사회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절대적이긴 했다.

드워프의 왕국에도 분명 왕족과 귀족이 존재했지만, 다른 국가의 왕족이나 귀족이 의례 그렇듯 ‘절대적인 특권’을 누리는 계층은 아니었다.

지난 보름간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엘가드 왕국에서 귀족(왕족은 드워프 국왕과 딱 한 번 마주한 왕세자 이외에는 보지 못했다)이라함은 부여받은 ‘권리’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의무’를 짊어져야만 하는 불쌍한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따라붙는 ‘명예’를 대단히 중요시 하는 것 또한 드워프 사회의 특성이었기에.

귀족의 삶을 후회하거나 포기하려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 엘가드 왕국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뿐이었는데.

그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었고.

주로 실력있는 기간트 엔지니어나 기사(오너)들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다른 국가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기간트 엔지니어의 사회적 위치가 오너와 비등비등한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자글자글한 주름의 늙은 드워프는 그런 기간트 엔지니어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엘가드 왕국 왕립병기창의 수장 핀트 발레트.

그는 현존하는 드워프제 기간트 대부분의 설계와 제작을 총지휘한 인물로, 실질적인 대륙 최고의 기간트 엔지니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나와 독대를 나누고 있는 이유는, 지난 보름간의 회의 과정에서 도출된 결론을 내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려 3000rp급 기간트의 소유 여부가 결정되는 순간임에도, 나는 아주 작은 긴장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뭐, 국왕이 직접 약속했는데. 설마 말을 바꾸기야 하겠어?’

플렉시온급 마정석이라는 인질이 내 손안에 있는 데다, 지난밤 날이 새도록 술잔을 나눈 드워프 국왕 파이톤 그레이엄으로부터 이미 약속을 받아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둘의 대화는 하이엔트급 기간트의 제작 여부 자체가 아닌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6개월이라... 좀 긴 것 같긴 한데... 뭐, 좋습니다. 만들어주는 쪽에서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제가 감수해야겠죠.”

“하하하하하, 역시!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아, 기체의 성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참에 이 손으로... 대륙 최고의 기간트를 만들어 볼 작정이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제 선에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늙은 드워프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브롱코스 세 기만 팔아주시죠. 값은 제대로 지불하겠습니다.”

핀트 발레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브롱코스를요?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만... 그걸 어디에 사용하시려고... 스노우님께는 별 쓸모가 없을 텐데요?”

나는 그의 물음에 즉답하는 대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멘트를 던졌다.

“브롱코스... 직접 타보니 500rp급 기체치고는 매우 잘 만들어진 기간트더군요.”

“하하하하하, 그렇습니까? 제가 설계에 참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대륙의 500rp급 기간트 중에는 녀석의 성능을 따라올 기체가 없죠.”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나 역시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체감하기론, 대거에 비해 성능이 최소 50% 이상 뛰어났었지.’

내가 타본 500rp급 기간트라고는 루페른 왕국의 대거와 엘가드 왕국의 브롱코스가 전부였다.

그리고 엘가드 특유의 마력회로 기술이 탑재된 브롱코스의 성능은, 루페른 기간트의 특장점인 ‘동화율 증폭(스펀)’ 기능이 장착되지 않은 대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외관의 점수까지 포함한다면...’

솔직히 나라면, 두 배의 돈을 주고서라도 브롱코스를 선택할 것 같았다.

거듭되는 칭찬에 한껏 고무된 핀트 발레트가 흔쾌히 브롱코스 세 기의 판매를 수락했다.

사실 왕립병기창의 수장인 그에게 있어, 왕국이 100여 기 이상 보유하고 있는 저등급 기간트 세 기의 판매를 결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브롱코스 한 기의 판매가격은 7만 골드(대거 5만 골드).

핀트 발레트는 무상으로 세 기를 제공하려 했지만, 단순히 구입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던 나는 끝까지 정당한 값을 치르겠다 우겼고.

그로서는 내 고집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사실 내가 브롱코스를 구입하려는 이유는...

칼튼 에거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마침 다음 목적지에서 꽤 유용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엘가드 왕국을 떠나기로 한 당일.

나는 특별한(?) 기능이 추가된 저등급 기간트 브롱코스 세 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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