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파사이산의 몬스터(2)
#1
“분명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이펜타르크 제국 용병 길드 소속 파티 중에서도 제법 이름 높은 몬스터 사냥 전문 파티, ‘레이븐’의 러더인 크라임 듀란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물론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6명의 파티원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매우 작은 소리였다.
책임감이 강한 타입의 리더인 그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약한 소리를 끊어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크라노가 개체당 영역을 넓게 쓰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레이븐은 7인으로 구성된 실력있는 몬스터 사냥 파티였다.
이펜타르크 제국 용병 길드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길드를 통한 의뢰보다는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몬스터 사냥에 투자하는 자타공인 길드 내의 ‘아웃사이더’들.
물론 도무지 거절하기 힘든 대가를 제안하는 경우에 한해, 가끔 용병다운 일을 맡기도 하지만, 그런 건 벌써 9년간 이어져 온 파티의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파사이산행의 목적은 그런 드문 경우와 파티의 정체성인 몬스터 사냥이 적절하게 뒤섞인 일이었는데.
이펜타르크 제국 3대 마탑 중 하나인 ‘드락샤르’ 소속 고위 마법사(6서클 최상위)가 상급 몬스터 ‘크라노’의 사체 확보를 의뢰해온 것이다.
‘레이븐’의 전력으로는 상급 중에서도 중위권 이하에 속하는 몬스터 1마리를 사냥하는 것이 ‘안전을 보장하는 선’에서의 한계.
강철같은 8개의 다리를 지닌 몸길이 7미터, 신장 5미터가량의 곤충형 몬스터 ‘크라노’는 상급 중 중위권에 해당하는 몬스터였고.
리더인 크라임 듀란을 비롯해 파티원 중 몇몇은 이미 녀석을 사냥해본 경험이 있었던 데다, 마탑의 마법사가 내건 보상 역시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 더해 의뢰 자체가 레이븐 파티의 정체성인 ‘몬스터 사냥’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크라노라면 서식지가 꽤 정확하게 알려진 몬스터로 대륙 북부의 파사이산과 남부의 대수림, 서부의 파이란 고원에 제법 많은 수의 개체가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 곳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크라노가 서식한다고 알려진 장소가 바로 페랄 산맥의 북부 끝자락인 파사이산이었고.
마침 그곳은 레이븐 파티의 근거지인 이펜타르크 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식지이기도 했다.
크라노의 경우 매우 단단한 방어력으로 유명한 몬스터였는데. 녀석의 외형은 거미와 유사한 하체와 사마귀를 닮은 상체가 결합 된 모습이었고, 주요 공격 수단은 네 개의 팔 중 아래쪽 두 개에 달린 거대한 낫과 입 주위에 돋아있는 두 개의 관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부식독이었다.
상급 몬스터인 만큼 제법 강력한 사냥감이기는 했지만, 무리를 짓지 않는 데다 1개체당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매우 넓었고. 번식기를 제외하면 다른 개체의 영역을 침범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에, 레이븐 같은 소수정예 파티가 사냥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몬스터였다.
게다가 비록 800rp급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무려 기간트(제페토, 이펜타르크제, 오너 크라임 듀란)를 보유하고 있는 레이븐 파티의 입장에서는 크라노의 부식독에 대처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이것이 썩 가성비 좋은 의뢰라는 내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대체 왜... 한 놈도 보이지 않는 거냔 말이다!’
인상을 쓰며 전진하고 있던 크라임 듀란의 곁으로, 동료이자 파티의 세 상급 엑스퍼트 중 하나인 길레온 화이트가 다가왔다.
“대장도 느꼈지? 이거... 뭔가 심상치 않아.”
“그래. 이 정도면 벌써 서너 마리의 영역을 지나쳐 오고도 남았을 거리인데... 놈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이대로 계속 진행해도 괜찮을까?”
“그 마법사 놈이 위약금을 제법 세게 걸었어. 자칫하면 반년 치 수입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혹시 상황이 이런 걸 알고...”
그때 보라색 로브를 입은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인영이 두 사람 사이로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음흉한 드락샤르의 마탑놈들이라면, 뭔가 수작을 부렸다 한들 이상할 건 없지.”
목소리의 주인공의 일행 중 유일한 마법사(5서클)인 에블린이었다.
그녀는 이펜타르크 제국 3대 마탑 중 하나인 ‘펠리시에’ 출신이었고.
냉기 계열에 특화된 펠리시에와 화염 계열에 특화된 드락샤르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앙숙이었다.
“쉽게 단정 짓지 마, 에블린. 그리고 음흉함이라면 오히려 펠리시에 쪽이...”
스르르륵
에블린의 머리 위에 생성되는 얼음 화살을 확인한 길레온 화이트가 황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말을 바꾸었다.
“...아닌 드락샤르지. 확실해. 그 마법사 영감, 어쩐지 생긴 것부터가 영 음험하더라니.”
“말조심해, 길레온. 지켜볼 거야.”
“알았으니까, 이 화살 좀 치워주겠어.”
길레온 화이트는 자신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얼음 화살을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파티의 원년 멤버인 두 사람의 실없는 대화를 듣고 있던 크라임 듀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이븐은 제페토의 오너인 크라임 듀란을 포함한 상급 엑스퍼트 셋과 5서클 마법사 하나, 그리고 3인의 중급 엑스퍼트로 이루어진 강력한 전력의 용병 파티였다.
일곱 명 모두 어지간한 국가나 영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빡빡한 조직 생활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는 지독한 아웃사이더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퍽 느슨하게 운영되는 데다, 조직의 위계질서랄 것도 거의 없으며, 결정적으로 어지간한 영지 소속의 기사나 마법사로는 꿈도 꾸지 못할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이 파티에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사망이나 은퇴로 몇 번의 멤버 교체가 있기는 했지만, 벌써 10년째 별탈 없이 파티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리더인 크라임 듀란의 능력이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엑스퍼트로서의 실력은 물론이고 황립아카데미의 오너 학부를 무려 3위(327명 중)로 졸업했을 정도로 뛰어난 기간트 조종술을 지닌 그는, 제국의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세 진영의 영입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는 실력자였다.
불과 3개월 전에는 세 진영 중 한 곳에서 무려 2000rp급 기간트를 미끼로 영입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애초에 특정 세력에 속할 생각 따윈 없었던 데다, 황좌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서 패배한 쪽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거절했었던 크라임 듀란이었다.
‘이대로라면... 3마리는 고사하고 1마리도 쉽지 않을 것 같군.’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크라노 3마리의 사체를 보관하기 위해, 드락샤를 마탑 소유의 상급 아공간 아티펙트까지 빌려온 참이었다.
지독한 마법사놈들은 마탑 소속 마법사의 의뢰임에도 불구하고 아공간 아티펙트의 대여비까지 꼬박꼬박 챙겼기에, 시일이 지체될수록 이번 의뢰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흠칫
크라노의 기척을 감지하기 위해 한껏 날카로워져 있던 크라임 듀란의 감각에 포착된 엄청난 존재감.
‘이, 이건...’
문제는, 절로 몸이 떨려올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무언가가 그들의 지척으로 접근할 때까지... 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상위권인 크라임 듀란의 감각이 그 어떤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뭔가 있다. 전투 준비!”
“뭐, 뭐야, 이건...”
크라임 듀란에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길레온 화이트 역시 무언가의 존재를 눈치챈 듯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타아아아앗
파파팟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동료들답게, 리더의 외침을 듣자마자 일사불란하게 포지션을 잡아가는 레이븐 파티.
무려 기간트를 보유한 파티였기에, 레이븐의 사냥 전략은 오로지 크라임 듀란의 제페토를 보조하는 방향으로 치우쳐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가 기간트를 꺼내 들만한 수준일 경우에 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행 중 최강자인 두 상급 엑스퍼트의 감각이 말해주듯.
파사이산의 정상 부근에서 그들이 마주하게 된 상대는 인간 본연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아니, 어지간한 기간트 몇 기를 동원하더라도 상대할 수 있을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대장, 이거 아무래도... 완전 좇 된 것 같은데?”
“......”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길레온 화이트의 농담에도, 크라임 듀란은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산 정상 부근의 거대한 바위 위에 나타나, 나른한 눈길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몬스터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버린 탓이었다.
네 발로 선 몬스터의 몸길이는 4미터가량이었고, 발끝부터 머리까지의 높이는 대략 2.5미터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전신이 윤기가 흐르는 회색 털로 뒤덮여 있었고, 마치 어둠을 불길로 형상화해놓은 듯한 검은색 갈기가 목 주위를 빙 두른 채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몬스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마력의 기운과 존재감에 압도된 일행의 한가운데에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는 이가 있었다.
“귀, 귀여워...”
“헉!”
“......”
“에블린?”
“미쳤어요?”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친 소리인 건 분명했지만, 사실 에블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녀석에게서 발산되고 있는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과는 달리, 몸통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커다란 머리통과 배부른 고양이를 빼다 박은 얼굴은 ‘귀엽다’라는 것 이외엔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화, 확실히... 저 얼굴만은 그런 소리가 절로 나올 만도 하군. 자르칸이 진화한 녀석인가?’
4족 보행 몬스터인 자르칸 역시 파사이산에 서식하는 녀석이었는데. 태생은 중급에 불과했지만, 극히 드문 확률로 상급까지 진화가 가능한 몬스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저건 아무리 봐도...’
고작 상급 몬스터 따위가 뿜어낼 수 있는 존재감이 아니었다.
‘최상급이야. 자르칸이 최상급까지 진화할 수 있는 몬스터였단 말인가?’
고작(?) 상급 몬스터 1마리 정도를 사냥하는 것에 특화된 레이븐 파티의 전력으로는 감히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는 괴물이었다.
손목에 차고 있는 테네시를 흘깃 일별한 크라임 듀란이 말했다.
“내가 기간트를 소환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산밑으로 달려. 혼자는 위험하니 둘씩 흩어진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 그럼 대장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이대로는 어차피 모두 죽는다. 운이 따라주면... 한두 명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러니까 대장은 어쩌고!”
“닥쳐, 길레온! 시간이 없다.”
타아앗
그 말과 동시에 땅을 박차는 크라임 듀란.
그가 손목의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자.
파아아아아앗
6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흑색 기간트 제페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리마!”
달리던 자세 그대로 탑승 주문을 외친 크라임 듀란의 몸이 제페토의 콕피트로 이동했고.
최대한 동화율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마력엔진의 출력을 높였다.
747, 758, 772...... 798
순식간에 최대출력에 가까워진 제페토의 전신에서 은은한 청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장!”
“멍청아! 대장의 명령을 따라! 빨리 움직이라고!”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빨리 뛰어, 이 새끼야!”
에블린의 채근에 못 이긴 길레온 화이트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아악!”
“대자아아아아아앙!”
쿠우우우우우우웅
뿔뿔이 흩어지려는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간 제페토가 수십 그루의 나무를 파괴하며 대지 위로 처박히고 말았다.
이어서 들려오는 다소 깜찍(?)한 몬스터의 하울링.
묘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제페토가 단 일합조차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충격에 발이 멈춰 버린 레이븐의 파티원들.
그런 그들을 장난기와 난폭함, 잔혹성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몬스터가 사냥을 개시하기 위해 뒷다리에 힘을 주려던 순간.
쿠웅쿠웅쿵쿵쿵쿵쿵쿵......
[젠장! 뭘 멀뚱히 서 있어. 걸리적거리니 다들 꺼지라고!]
파사이산의 정상에 빼곡하게 들어선 거대한 나무들 틈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무언가로부터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콰아아아아앙
일행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몬스터에게 달려드는 그것은, 제페토보다도 작은 신장을 지닌 멋들어진 생김새의 은빛 기간트였다.
그리고...
쉬이이이이이이익
츠팟
쉬이이이이이익
[만만한 놈이 아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상대하도록.]
허리춤에 매고 있던 롱소드의 발검을 시작으로 엄청난 연격을 퍼붓기 시작한 은색 기간트와 똑같은 생김새의 기간트가.
뒷짐을 진 채,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느긋한 걸음으로 나무들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단 한 차례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한 첫 번째 기간트로부터 악에 받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그걸 알면 첼시로 바꿔 타게 해주던가아아아아!]
그런 두 기의 기간트를...
레이븐의 파티원들이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