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파사이산의 몬스터(4)
#1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는 칼튼 에거시의 브롱코스를 일별한 스노우.
부우웅부웅붕붕붕붕붕......
그는 오른손에 들린 드워프제 기간트용 플레일로 몇 차례 원을 그리며 무게감을 확인한 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최상급 몬스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검은 갈기를 제외하면, 영락없는 먼치킨 고양이로군.’
물론 이상할 정도로 머리통이 거대하긴 했다.
일반적인 고양이와 비교하자면 몸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최소한 두 배는 넘을 듯 보였는데, 그로 인해 무시무시한 최상급 몬스터로서의 위엄이 급감할 정도로 폭발적인 귀여움을 뽐내고 있었다.
물론 강자의 아우라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스노우였기에, 고작 귀여움 따위(?)로 그의 긴장감을 무디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 500rp급에 불과한 브롱코스를 타고 승리를 자신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래도... 잡는 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지.’
물론 최상급 몬스터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온몸이 찌릿찌릿 떨려올 정도로 강렬하긴 했다.
하지만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났었던 브라이드 백작령의 최상급 엑스퍼트 알버트 자작이나, 크로스보우를 탔을 당시 마주쳤던 용병왕처럼 ‘대적 불가’라는 느낌이 엄습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재앙급 몬스터의 네 가디언 중 최약체였던 보스페로스나 프리가모스와 비슷한 수준이랄까?
스노우가 판단하기에, 그런 수준의 상대라면 안티가 정도의 패만 꺼내더라도 100%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작 300rp의 출력 차라 한들, 엄연히 전투용 기간트인 안티가와 훈련 및 잡다한 용역에 사용되는 브롱코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게다가 고유스킬 ‘변형(S)’에 의해 한계까지 개조된 스노우의 안티가는 ‘원형 안티가’에 비해 2배에 가까운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강력한 기체였다.
‘뭐, 그래서 더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만약의 경우, 가이아로 바꿔탄 뒤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즉,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살 떨리는 강자와의 승부를 즐길 수 있는 요건이 갖춰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칭 ‘대(大)나이만 왕국 제1검’을 평생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기회는 날아가 버리고 말겠지만.
‘용병왕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재능에 약소국이라곤 해도 한 나라의 실세... 그런 쓸모 있는 노예를 놓칠 순 없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전투에 임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한 스노우였다.
#2
마음을 먹은 순간 어느새 동화율은 100%의 벽을 뚫어 버린다.
타앗
무방비하게 울려대던 기간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는 순식간에 가벼운 마찰음으로 변해버렸다.
지난 며칠간 거의 온종일 사용하다시피 한 ‘중력 조절(C)’ 스킬은 어느새 능숙함을 넘어 달인의 경지에 접어들었고.
그 한계 역시 무려 20~500%까지 상승한 상태.
순간적으로 무게를 0.9톤까지 감소시킨 기간트의 신체에 ‘매토템(C)’과 ‘가속(C)’ 버프가 연달아 추가되자.
스르르륵
마치 조금 전의 최상급 몬스터가 그러했듯 브롱코스의 은빛 잔상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춘다.
묘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심상치 않은 기세와 마력을 감지한 최상급 몬스터가 순식간에 털을 곧추세우며 몸을 날렸다.
파앗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최상급 몬스터가 몸을 날림과 동시에, 녀석이 있던 자리에 남은 잔상을 반으로 가르며 대지를 강타하는 브롱코스의 플레일.
브롱코스가 시도한 단 한 번의 공격은 전투 개시를 숨죽여 기다리던 장내의 인간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미미미미미... 미친! 봐, 봤어? 지금 저거?”
“마법? 에블린, 방금 그거 마법이었냐? 근거리 공간 이동?”
“아,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맞나? 부, 분명 그런 엄청난 마법을 발동시킬 만한 마력의 유동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 저건 대체 뭐지? 저 기간트가 특별한 건가? 그렇다기엔 저건 분명 브롱코스... 설마 오너가 마법사...”
“정신 차려, 에블린!”
패닉에 빠진 것은 비단 레이븐 파티뿐만이 아니었다.
대지 위에 주저앉은 채 기대(그 기대가 어느 쪽이건)감 가득한 눈길로 스노우의 브롱코스와 최상급 몬스터를 번갈아 바라보던 칼튼 에거시 역시, 입을 쩍 벌린 채 불과 몇 초 전 목격한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브롱코스로 저게 된다고? 500rp, 오버클럭을 일으켜 봐야 520rp 정도가 한계일 텐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그 누구보다 스노우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자신하는 칼튼 에거시였고.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쪽 세상에 떨어진 이후로 스노우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도 칼튼 에거시였고, 손수 만져준(?) 기간이 가장 오래된 인간 역시 칼튼 에거시였으니까.
“아니, 100번 양보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저 괴물이니 저런 미친 속도를 낼 수는 있다고 쳐! 낼 수는! 그런데 고작 브롱코스 같은 저등급 기간트의 프레임이나 관절이, 어떻게 저런 초고속 기동의 반동을 버티는 거냐고? 분명 두세 번도 못 버티고 박살이 나는 게 정상일 텐테?”
두세 번은커녕, 마치 점멸 마법을 방불케 하는 최초의 공격 이후.
연달아 십여 번 이상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거대 고양이와 강철 거인이었다.
스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츠륵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두 괴물의 술래잡기에, 애꿎은 파사이산 정상 부근의 대지만 초토화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최초 브롱코스의 위협적인 공격에 온몸의 털을 빳빳하게 일으켜 세우며 경계심을 나타냈었던 최상급 몬스터가 보인 변화였다.
한 번, 두 번...
초고속 기동을 기반으로 한 브롱코스의 공격과 엄청난 반응속도로 이를 회피해내는 두 괴물의 공방.
그리고 그것이 10회가 넘어가고, 20회를 넘겼으며, 기어이 30회마저 넘겨 버리자...
어느새 곧추세웠던 전신의 털을 제자리로 되돌린 최상급 몬스터는 사납게(그래봤자 귀여울 뿐이었지만) 일그러뜨렸던 표정마저 풀어버린 뒤, 다시금 노랗게 변한 눈빛을 말똥말똥 빛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군.”
“맞아, 주인이 놀아 줘서 신난...”
“이건 저 녀석이 미친 거냐, 아니면 우리가 미친 거냐?”
어느새 제자리에 주저앉아 지친 몸을 달래며, 두 괴물의 기상천외한 전투(?)를 관전하는 레이븐 파티.
그리고 그 옆에 비슷한 포즈로 주저앉아 있는 브롱크스의 콕피트 내부에서, 해탈한 표정으로 똑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칼튼 에거시.
“저게 뭐야? 진짜 놀고 있네...”
그러다 문득 불과 몇 분전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 떠오른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설마 진짜로 노예로 부려 먹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미친 인간이라도 농담이랑 진담 정도는 구분을...”
하지만 불행하게도 칼튼 에거시는 스노우라는 인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빌미로 어떻게든 자신을 괴롭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안돼! 힘을 내라고! 지금 놀고 있을 때가 아니야!”
#3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가 사용자에게 호감을 품습니다.]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호감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가 70%를 돌파하면 ‘제압’ 상태가 아닌 몬스터를 ‘포획’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 12/100]
츠팟
스르르르륵
초고속이동을 지속하는 와중,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확인한 스노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감도?’
이런 게 존재한다는 말은 S급 테이머인 파트리스 오보노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두들겨 패서 빈사 상태로 만들지 않아도, 테이밍이 가능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호감도... 얼핏 생각하면 그닥 쓸모없어 보이는 스텟일 수도 있었지만, 아나투레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았다.
‘하도 두들겨 팼더니 초기 충성도가 개판이었지.’
물론 이건 S급 몬스터의 ‘지고한 격’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혹독하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만약, 폭력을 주고받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은 채 호감도가 높은 상태에서 테이밍을 성공시킨다면?
‘초기 충성도가 꽤 높게 나올지도 몰라.’
그 말인즉, 충성도 90에 더욱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비록 아나투레스에 비해서는 부족하겠지만, 어쨌든 최상급 몬스터의 스텟을 공유받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거... 쓸만한 노예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기간트에 탑승한 채 최상급 몬스터의 스텟의 일부나마 공유받을 수 있다면, 대체 얼마만큼의 전투력 폭증을 기대할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대놓고 소환수로 부리기엔 상당히 거북한 외형의 아나투레스와는 달리, 이 자크라토스라는 녀석은 제국 황도의 한복판에 꺼내놓는다 한들 겉모습으로 인해 난리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조금 다른 이유로 난리가 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유니콘이나 페가수스, 선더버드, 셀레스터 등, 멋지고 귀여운 소환수나 사역마를 거느리고 다니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30여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최상급 몬스터가 대략 10배쯤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녀석의 모습은 영락없는 먼치킨 고양이.
지구에 있는 쌍둥이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키우게 된 고양이 역시 먼치킨이었고, 그 녀석의 이름은 ‘토리’였다.
‘내가 네 집사가 되어주마. 오늘부터 네 이름은 토리다.’
아나투레스 때도 느꼈지만, 다섯 글자는 애완동물(?)의 이름으로는 너무 길었다.
스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아앙
스르르륵
콰아아아아앙
나는 혹시라도 녀석이 다칠까 걱정되어 최대한 주변의 땅을 내려치기 위해 애썼다.
혹시라도 대충하는 걸 싫어할지도 몰라 최선을 다하는 연기를 시전하는 노력까지 기울였다.
그리고 그 결과...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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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전투를 가장한 술래잡기가 70회를 넘기는 순간.
[호감도 76/100]
최상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호감도가 70을 넘어섰다.
그리고 떠오르는 메시지창.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포획 시도가 가능합니다.]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를 포획하시겠습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포획한다.”
그 순간.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자크라토스의 전신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포획에 성공하셨습니다.]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내친김에 각인까지 곧바로 내달렸다.
“각인한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또다시 터져 나오는 찬란한 빛.
“이게 된다고?”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각인에 성공하셨습니다.]
[이제부터 A+급 몬스터 자크라토스의 충성도가 표시됩니다.]
연달아 첫 번째 시도에 성공하는 포획과 각인.
“이거 어쩌면...”
적어도 기간트의 증폭 효과를 등에 업고 있는 순간에는.
지구 최강의 테이머 파트리스 오보노보다.
“내 쪽의 테이밍 능력이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