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42화 (142/169)

142화 제국으로

#1

“6서클... 맞겠지? 내 살다 살다 저렇게 다양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처음 본다.”

“흠... 사실 그가 6서클급 마법을 사용하는 걸 직접 보진 못했어. 그래도 최상급 몬스터를 길들인 걸 보면, 그보다 낮은 수준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지.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렇고.”

“너... 네 스승님의 마력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었냐?”

“마탑을 뛰쳐나오기 직전엔 그랬지.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네 스승님... 무지 유명한 6서클 마법사잖아?”

“그래서 조금 헷갈린다고. 헷갈리긴 하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7서클은 아니겠지...”

“서, 설마. 그는 그 유명한 칼튼 에거시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간트 오너라고.”

“나도 알아. 아마도 대륙 역사상 최강의 마검사일 테지.”

“역사상 최강...”

“어디까지나 마검사 중에서는 말이야.”

레이븐 파티의 5서클 마법사 에블린과 대화를 주고받던 길레온 화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느 대륙을 말하는 거지? 그는 동대륙인이라고.”

“하, 어디건 그게 대체 뭔 상관이야, 멍청아. 여기건 저기건 간에, 저런 실력을 지닌 마검사가 존재했었다는 이야기 따윈 들어본 적도 없다고!”

오르비스 대륙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마검사 이야기의 주인공만하더라도, 최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기사가 5서클 마법 몇 가지를 사용하는 수준이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등장한 저 스노우라는 동대륙인 오너는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조차 가볍게 능가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대한 덩치의 최상급 몬스터와 노닥거리는 스노우를 바라보던 길레온 화이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긴, 아무렴 어때. 그가 아니었다면 우린 죄다 죽은 목숨이었을 텐데.”

마치 고양이라도 되는 양 애교를 떨고 있는 저 괴물에 의해서...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물론 오너로서의 능력도 경이로운 수준임에 틀림없었지만, 마법사인 에블린으로서는 그의 마법적인 역량에 좀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다채로운 속성 마법에 모두 능통할 수 있는 거지?’

그를 만난 첫날, 파사이산의 중턱에서 똑똑히 목격했었다.

냉기와 화염, 바람, 대지 등 속성을 가리지 않고... 수십 마리 상급 몬스터 무리를 향해 폭격을 쏟아붓던 그의 신들린 듯한 마법 연계를.

‘무영창에 딜레이조차 거의 없었어. 그것도 모든 속성의 마법이... 이건 스승님도 불가능한 일이야.’

물론 그녀의 스승은 구현 계열 마법을 주력으로 하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6서클에 오른 지 벌써 30년이 넘어가는 베테랑 마법사임은 분명했고, 주력이 아니라 한들 그가 구사하는 마법이 범상할 리 없었다.

하지만 저 스노우라는 마검사처럼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4서클 이상의 마법 수십 개를 난사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학파 출신일까? 분명 동대륙의 마법은 아니야. 개성이 강하긴 하지만 분명 서대륙식 마법이었어. 아, 정말 미치도록 궁금해. 물어보고 싶다. 물어보고 싶어...’

하지만 다소 삭막해 보이는 인상과 곁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최상급 몬스터로 인해.

감히 그에게 다가설 용기를 내지 못하는 에블린이었다.

#2

파사이산을 내려온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마치 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레게 호수였다.

달리 ‘요정의 호수’라고도 불리는 레게 호수였기에, 손바닥만 한 크기에 계급에 따라 두 쌍에서 다섯 쌍의 날개를 지니고 있다는 요정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안타깝게도 요정들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에블린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사실 성질이 사납고 인간에게 질 나쁜 저주를 내린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레게 호수의 요정들은 신통한 힘을 지닌데다 호기심이 왕성해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아요. 인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다만 워낙에 장난이 심해 호되게 당한 인간들이 많다 보니 소문이 좋지 않게 난 것뿐이에요.”

“그럼 지금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네? 아니, 그야 당연히...”

그녀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내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오고 있는 토리를 향했다.

“아, 이 녀석 때문이로군.”

“네, 마력에 예민한 요정들에게 저 몬... 토리의 등장은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아쉽군. 가능하면 몇 마리 잡아가고 싶었는데...”

“네? 아니, 어째서... 그, 그런 짓을 했다간 정말로 요정왕의 분노를 사버릴지도 모른다고요.”

“요정왕?”

“네, 이곳 레게 호수의 요정들을 다스리는 존재죠. 사실 지난 100여 년간 그 모습을 봤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진실한 힘은 대륙의 7대 재앙에 버금갈 정도라는 전설이 있어요.”

오, 이건 정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데?

사실 손바닥만 한 요정 따위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조금 궁금한 정도?

하지만 재앙급 몬스터에 버금간다는 ‘요정왕’이란 녀석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재앙급 몬스터라는 녀석을 잡고 얻은 경험치... 진짜 장난 아니었었지.’

드워프들의 광산에서 녀석과 사투(?)를 치른 이후 획득한 경험치로 내 전투력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을 하나 더 잡는다면?’

하지만 에블린의 말에 따르면, 요정왕이란 놈은 그 옛날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인간의 영웅들과 함께 싸운 반신(半神)격의 존재라는 모양이다.

‘쩝, 그런 녀석이라면... 굳이 시비를 걸어 죽이는 건 좀 찝찝하겠군.’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정말로 강력한 저주라도 걸리면 큰일이 아닌가.

나는 아무런 소동 없이 레게 호수를 지나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3

파사이산을 떠나 레게 호수를 거쳐 렘노스 산을 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4일.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20일가량은 걸렸을 길고 험난한 길이었지만, 최하 중급 엑스퍼트로 이루어진 일행에게는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여정이었다.

마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상급 이상의 몬스터들은 무려 최상급 몬스터가 포함되어있는 우리 일행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걸 감지할 능력조차 없는 중급 이하 몬스터들의 습격은 꽤나 빈번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처리하는 데는 레이븐 용병 파티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했다.

상급 엑스퍼트 셋과 5서클 마법사 하나 그리고 중급 엑스퍼트 셋은 결코 무시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고, 그들을 이끄는 크라임 듀란은 최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노련한 전사였다.

촤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퍼어어어어어엉

꾸에에에에엑

근처에 오크 군락이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수십의 마운틴 오크들이 일행을 습격해 왔고.

크라임 듀란을 선두로 한 엑스퍼트들의 검과 5서클 마법사인 에블린의 마법에 의해 순식간에 정리되어 버렸다.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칼튼 에거시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에도 느꼈지만, 다들 실력이 상당한데요?”

“뭐, 제법 호흡이 잘 맞는 것 같군. 그리고 마법사의 수준이 꽤 높아. 저 정도 수준의 전투마법사는 흔하지 않지.”

“알고 보니 제국 3대 마탑 출신이더군요. 그중에서도 무려 장로의 제자랍니다.”

“냉기 계열 마법을 주로 다루는 것 같던데...”

“그녀가 수학한 마탑이 그쪽 계열로는 대륙 최고라더군요.”

“호오...”

스노우의 주력 전투 수단은 누가 뭐라 해도 냉기 계열 특성인 ‘서리바람(B)’에서 파생된 고유스킬들이었다.

그런 만큼, 대륙 최고의 냉기 마법 전문가 집단이라는 ‘펠리시에 마탑’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구에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어쩌면 특성의 등급을 상승시키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새로운 특성인 ‘테이머(A)’를 각성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특성의 등급이 상승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

이미 등급 상승을 이뤄낸 스킬이 버젓이 존재하지 않는가?

기존 C등급에 불과했던 물의 정력과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스킬이 모두 B급으로 상승했고. 원래라면 이것 역시 절대로 불가능하다 알려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했지. 다른 특성이나 스킬들도 등급업이 가능할 거야. 틀림없어.’

사실 등급이 오르지 않았을 뿐, 대부분의 고유스킬과 공용스킬들은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떨어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둔 상태였다.

다만 본신(本身)의 상태로 아무리 스킬을 남발해 봐야, 그것들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로 스킬을 사용해야만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아마도, 그 성장이 한계치에 다다르면 정령 스킬과 같이 ‘진화’를 한다는 것이 스노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파일럿(S)’ 특성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해볼 뿐.

‘뭐, 아무렴 어때.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대륙 최고의 ‘냉기 계열 마법 전문가 집단’과 인연이 있는 에블린에 대한 관심도를 조금 높여도 좋을 듯했다.

그는 이펜타르크 제국에서의 ‘의뢰’를 마치는 대로, 펠리시에 마탑을 방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성장 혹은 진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4

파사이산과 레게 호수, 마지막으로 렘노스산을 넘으면 드디어 이펜타르크 제국의 서부 국경 관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간간이 산을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외부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서부 국경이었기에, 관문에 주둔하는 국경수비군은 고작 3000여 명에 불과했고. 기사단 전력 역시 30명으로 구성된 1개 기사단과 5기의 기간트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5기의 기간트조차 1500rp 1기와 1200rp급 1기, 1000rp급 1기, 900rp급 2기로 제국의 어지간한 남작가가 보유한 전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서부 국경 발령은 제국의 고위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있어 일종의 유배 혹은 좌천이나 다름없었는데.

수십 년간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서부 전선의 특성상 공을 세울 기회가 전무(全無)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등급 몬스터를 사냥해 황실이나 권력자에게 바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문제는 이곳 서부 국경수비군의 전력으로는 제대로 된 사냥을 실시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사실에 있었다.

반면, 일반 병사들에게 있어 이곳 서부 국경지대에 배치되는 것은 꿈에서라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는데.

의욕을 잃어버린 수뇌부가 훈련을 빡빡하게 시킬 리 만무했고(간혹 부임 초기에 열정을 보이는 이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얼마 가지 못하고 동태눈깔이 되어 버린다), 사실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으니 훈련을 빡빡하게 시킬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군기가 엄정한 여타 국경지대나 내전이 한창인 중앙군과는 달리 신변을 위협받을 일도 없었으니...

병사들에 있어선 그야말로 ‘꿈의 직장’이라 할만했다.

노이만 버젯은 드물게도 서부 국경에 배치된 것을 만족하는 귀족 장교였다.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그는 1200rp급 기간트의 오너이자 이곳 서부 관문의 2인자이기도 했다.

백작가 서자 출신인 그는 뛰어난 재능을 높이 산 백작에 의해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곳을 졸업한 뒤 곧장 제국의 군인으로 임관해 지난 15년간 무수한 전장을 거쳐왔다.

그리고 나이 40이 넘어 ‘남작’ 작위를 하사받은 그는, 황위 쟁탈전에 휘말린 가문과 거리를 두기 위해 이곳 서부 국경 배치를 자원했다.

노이만 버젯이 판단하기에 아버지의 가문이 밀고 있는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채 10%도 되지 않았다.

‘헛된 꿈을 꾸는 거지. 쯧...’

물론 가장 많은 수의 귀족가문이 가담한 만큼 당장에 눈에 띄는 열세는 아니었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을 아무리 끌어들여 봤자지. 내실이 없다고. 결국 황위는 크리스토퍼 황태자나 3황자인 메슈트가 차지할 거야.’

그렇게 되면 가문이 몰락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재수 없으면 역모로 몰려 죄다 죽어나갈지도 모르지.’

다른 귀족가에 비해 서자인 자신을 잘 대해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함께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이제 아르펜이 아닌 버젯이야. 버젯 남작이라고.’

남작이 되고 작은(정말로 작은) 영지까지 하사받음과 동시에 버젯이라는 성까지 주어졌기에, 아르펜 백작가의 실책이 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미미했다.

그 미미한 가능성마저 없애버리기 위해 선택한 서부 국경행이 아니던가.

제국을 뒤덮은 전란으로부터 가족(아내와 두 딸)을 보호하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출셋길마저 스스로 차단해 버린 참이었다.

‘옳은 선택이었어. 지금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제국의 변방에서 몸을 웅크린 채, 한시라도 빨리 환란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기다리는 중년의 귀족이자 기사 노이만 버젯.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사령관님! 큰일입니다! 몬스터! 몬스터가 관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몬스터? 이봐, 그게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인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렘노스산의 몬스터들이 국경지대에 출몰하는 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놈들은 서부 관문의 높은 성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 사살되거나, 운이 좋은 몇몇은 렘노스산으로 꽁무니를 뺐다.

그렇기에 노이만 버젯은 부관의 호들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부관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에.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최, 최상급 몬스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허억!”

‘안분지족’만이 유일한 목표인 노이만 버젯의 일상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순간까지는 그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