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43화 (143/169)

143화 관문 요새의 사람들

#1

별다른 위험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국의 국경지대인 만큼 서부 관문의 성벽에는 꽤 성능이 뛰어난 마력감지기가 배치되어있었다.

무려 엘가드 왕국으로부터 구입한 드워프제 마력감지기로, 서부 관문에서는 주로 성벽을 향해 접근하는 몬스터들의 등급을 알아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마력감지기가 배치된 이후 처음으로 감지된 거대한 마력으로 인해, 서부 관문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력을 다룰 있다는(초급 유저) 이유만으로, 군 생활이 편하기로 유명한 이곳 제국의 서부 관문에서도 꿀보직으로 손꼽히는 마력감지기 전담병 자리를 꿰찬 폴.

그는 성벽의 좌측에 우뚝 선 망루 안에서, 불과 3주 전에 자신의 보조로 들어온 한스와 함께 육포를 질겅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니까. 어찌나 심하게 얻어맞았는지 엉금엉금 기어서 술집 문을 빠져나갔지.”

“정말요? 정말 펠튼씨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고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십인장 두 놈이 쪽도 못 써보고 당해버렸다고!”

“그런데 괜찮을까요? 혹시나 항명으로...”

“큭, 항명은 무슨... 군복 벗고, 그것도 술 처먹다 주먹다짐 좀 한 걸 가지고 찌른다? 그런 놈은 이곳 서부 관문에선 얼굴 들고 다니길 포기해야지.”

“아...”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 만큼, 이곳 제국 서부 관문에서의 생활은 무척이나 무료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국경지대와는 달리, 변경백이 존재하지 않는 서부 관문 요새는 제국의 다른 영지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형태였고.

군인을 제외한 인원 역시 고작 1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런 환경이었기에, 들끓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은 군인들의 오락거리는 술과 여자 그리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통 그 싸움은 요새 내에 한 줌에 불과한 술집 여인들로 인해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결국 펠튼씨가 사라를 차지한 건가요?”

“아니, 녀석은 프로도에게 머리가 깨져서 의무실로 실려 갔지.”

“네에? 아니 그럼 사라는...”

“몰라, 그쯤엔 너무 취해서... 정신을 잃었거든.”

“에이, 그게 뭐예요?”

“크하하하하하하...”

수다를 떨어대던 폴은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올려놓은 수정구에 마력을 주입했다.

지이이이이잉

투명한 수정구에 미약한 푸른빛이 감돌며 망루의 전면에 거치된 마력감지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근무태도야 어쨌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어 마력감지기를 작동시킨 시간만은 철저하게 기록되고 있었기에, 절대로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틈을 보일 수는 없지.’

어린 시절, 고향으로 돌아온 은퇴 기사에게 아양을 떨어가며 한 수 얻어 배운 마력 호흡법.

오러 임브레스를 수련하기 전 기초를 닦는 과정인 이것을 10여 년간 꽤 공들여 수련했고, 그 결과 어중간한 재능 정도는 있었던 것인지 초급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스무 살이 훌쩍 넘어 겨우 도달한 경지였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는 건 힘들었지만.

덕분에 다른 병사들에 비해 힘이 세지고 건강하며, 미약하나마 몸속에 마력을 품을 수 있게 된 그였다.

덕분에 처음부터 십인장급으로 대우받으며 꿀보직 중의 꿀보직인 마력감지기 전담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폴은 일반적인 십인장들에 비해 훨씬 더 적게 일하고도 무려 3배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자신의 직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와 마법사를 제외한 관문 요새의 3000병력 중,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이는 고작 다섯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섯 중 셋이 3교대로 마력감지기 전담병 역할을 맡고 있었다.

폴의 마력을 머금은 마력감지기가 그 길고 거대한 몸체를 천천히 움직이며 국경지대를 훑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연 움직임을 멈추더니.

위잉위잉위잉위잉위잉......

마력을 품은 존재를 감지했다는 걸 알리는 램프의 불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어, 뭔가 내려왔나 본데?”

“모, 몬스터일까요?”

폴은 피식 웃으며 의자 깊숙이 묻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렘노스산의 몬스터가 요새를 향해 접근하는 건 월례 행사와 같은 것이었으니까.

“겁먹을 것 없어. 어차피 성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살될 테니까. 어디 보자, 어떤 불쌍한 녀석이 산을 내려... 어? 으허어어어억!”

폴이 마력감지기 전담병이 된 이후로 8년 3개월.

그는 맹세코, 마력 반응을 표시하는 감지기의 스크린에 이토록 선명한 붉은 점이 찍혀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이건 알트라스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큰...’

4년 전, 상급 몬스터 중에서도 꽤 강한 개체로 알려진 알트라스가 산을 내려와 요새의 성벽 일부를 박살 낸 적이 있었다.

당시 기간트 2기가 출동해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지만, 폴의 기억에는 그 거대한 4족 보행 몬스터가 내뿜던 위압감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고.

그건 당시 알트라스의 출몰을 표시하던 스크린의 거대한 붉은 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보다 몇 배는 거대한 붉은 점이라니...

“비, 비상! 비상이다, 한스! 최상급! 최상급 몬스터가 산을 내려온 거야!”

“커허어어억! 꺼어억...”

“이런, 정신 차려, 한스! 숨 셔! 숨 쉬라고!”

퍼억퍼억

“커억! 아, 아파요!”

“살아났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마. 혹시라도 저 붉은 점의 이동속도가 빨라지면 곧바로 튀어나와서 알리라고!”

“네? 아, 넵!”

놀란 듯 숨을 꺽꺽거리는 한스의 등짝을 두어 차례 후려쳐 정신을 차리게 만든 폴.

그는 영 미덥지 못한 눈길로 잠시 한스를 흘겨보다 재빨리 망루의 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리며 외쳤다.

“비이사아아아아아아아앙!”

#2

렘노스산을 벗어나 대략 20분쯤 평지를 걷자, 드디어 이펜타르크 제국 서부 국경의 관문 요새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문을 산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지어 놓았군.”

스노우의 말에 답한 것은 칼튼 에거시와 함께 그의 양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레이븐 파티의 리더 크라임 듀란이었다.

“네, 사실 엘가드 왕국이 저 험한 페랄 산맥을 넘어 제국을 침공해올 리도 없고. 렘노스산과 가까운 곳에 관문을 지을 경우, 시도 때도 없이 몬스터들의 공격에 시달릴 것을 우려해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 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떨어진 곳에 지었는데도, 달에 몇 번은 몬스터들이 출몰한다고 하니... 요새를 설계한 사람이 옳은 결정을 내린 셈이죠.”

크라임 듀란의 설명을 들을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곳 제국의 서부 국경 관문에 대해 매우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었는데.

‘레이븐’은 몬스터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용병 파티였기에, 서부 국경을 매우 빈번하게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파티의 리더가 이곳의 정보에 빠삭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막과 페랄 산맥으로 가로막힌 서부를 제외한 나머지 3면이 모두 타국과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는 제국의 특성상, 몬스터 사냥 파티가 활약하기 가장 좋은 환경은 당연히 이곳 서부 국경지대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 그리고 2년 전 이곳으로 부임해 오신 부사령관님이 황립 아카데미 오너 학부의 까마득한 선배님이시라, 저희 파티의 사정을 많이 봐주시는 편입니다.”

크라임 듀란의 말에 따분한 표정으로 걸어가던 칼튼 에거시가 반색하며 말했다.

“오, 부사령관이라면 요새의 2인자잖아? 이거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비록 스노우의 마법(스킬) 덕분에 일반적인 노숙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한 여정을 즐겼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문명이 선사하는 풍요로움에 비할 수는 없었다.

크라임 듀란이 말했다.

“하하하, 에거시 경이라면 아마도 요새의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실 겁니다.”

그때, 조금 멍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스노우의 입이 열렸다.

“듀란, 네 선배라는 자가... 혹시 너와 비슷한 키(185cm)에 갈색 수염을 기른 털복숭이인가?”

“네? 털복... 아,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멍한 시선을 유지한 채 오른손 검지로 정면을 가리키는 스노우.

“성벽 위에서 이쪽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군... 아, 방금 옆에 있던 허여멀건한 녀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꽤 아프겠는데?”

“......?”

크라임 듀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관문 성벽 위에 있는 사람의 수염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거리가 2km 정도는 될 텐데? 고위마법사라 가능한 건가? 정말 대단하군...’

#3

따아아아아악

“커헉!”

부사령관 노이만 버젯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폴은 억울했다.

“아니, 왜 때리십니까! 전 매뉴얼대로 따랐을 뿐이라고요!”

“이런 멍청한 녀석! 무턱대고 최상급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하면 끝이냐? 하나, 둘... 자, 저길 좀 봐라! 한둘도 아니고 아홉이나 되는 인간이 함께 있는데, 그걸 최상급 몬스터가 쳐들어온다고 무턱대고 호들갑을 떨어?”

물론 최상급 몬스터 홀로 관문 요새를 향해 접근하는 것과, 10명에 가까운 인간 무리와 함께 다가오는 건 상황이 많이 다르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니, 마력감지기로는 저들의 마력을 구분할 수 없는 걸 어떡합니까? 너무 가까운 탓에 몬스터의 마력이 죄다 잡아먹어 버렸다구요!”

“크흠...”

마력감지병 폴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부사령관 노이만 버젯.

하지만 폴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보긴 뭘 보란 말이에요? 제가 부사령관님 같은 상급 엑스퍼트인 줄 아세요.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걸 육안으로 어떻게 구분하란 겁니까?”

마력감지기의 탐지 범위인 2km 안으로 막 들어온 탓에, 마력을 이용한 시력 강화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초급 유저 폴로서는 몬스터건 사람이건 그저 까만 점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마저도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점의 존재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그걸 몰랐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게 분명할 만큼 작디작은 점이었다.

사실 평범한 병사라면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요새의 2인자인 부사령관에게 이처럼 대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폴은 이곳 서부 관문 요새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 병사 중 하나인데다, 그중에서도 귀하디귀한 마력 사용자이자 마력감지기 전담병이었다.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도, 부사령관 노이만 버젯과 베테랑 병사 폴은 꽤 자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였기에 이 정도 대거리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머쓱해진 노이만 버젯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몬스터와 인간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흠, 듀란 녀석의 용병 파티로군. 설마 저들이 최상급 몬스터를 잡았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러자 불퉁한 표정으로 뒤통수에 돋아난 혹을 만지작거리던 폴이 말했다.

“고작 저등급 기간트 한 기가 전부인 파티가 최상급 몬스터를? 하, 마음만 먹으면 여기 요새 인원을 전멸시키고도 남을 괴물을 그들이 무슨 수로 잡아요.”

그의 말을 들은 노이만 버젯이 다시 한번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전멸? 오냐, 내 다른 건 몰라도 네 녀석만큼은 기필코 저 몬스터 앞에 던져주도록 하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으헉!”

두 사람이 성벽 위에서 투닥거리는 사이.

최상급 몬스터와 녀석을 둘러싼 9명의 인간은 조금씩 관문의 성벽과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접근하고 있는 성벽의 반대편.

즉, 제국 방향으로 난 관문 요새의 동문(東門)을 향해.

매우 고급스러운 외형의 마차 한 대가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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