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44화 (144/169)

144화 관문 요새에서 생긴 일(1)

#1

노이만 버젯.

그는 이펜타르크 제국 동부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인 ‘아르펜 백작’가의 서자로 태어났다.

영주로서나 기사로서나 제법 훌륭한 평가를 받는 전대 아르펜 백작(현재는 장남이 작위 승계)의 유일한 단점은 과도한 ‘여성편력’이었는데. 사실 대륙 최강국인 이펜타르크 제국의 고위 귀족에게 그 정도는 그리 큰 흠이라 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전대 아르펜 백작은 정실인 백작부인 이외에도 무려 다섯이나 되는 첩을 두었고.

백작부인이 낳은 2남 2녀를 제외하고도, 무려 11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이러하니 밝혀지지 않은 그의 자식이 얼마나 될른지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걸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목이 날아가기 딱 좋은 세상이었기에, 공식적인 전대 아르펜 백작의 자식은 1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노이만 버젯(당시 노이만 아르펜)은 그중 여덟 번째로 태어난 자식이었고, 남자 형제 중에는 네 번째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대 백작의 자식 중 어린 시절부터 특출난 재능을 보인 건 그가 유일했고.

제법 눈치가 빨랐던 노이만 버젯은 애써 평범함을 가장하려 했지만, 상급 엑스퍼트이자 고위 귀족인 전대 백작의 눈을 완벽하게 속이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다행히 노이만 버젯의 형제들은 눈에 띄는 재능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질투하거나 괴롭히지 않았고.

애초에 후계자로서 공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던 큰형은 아버지와 더불어 그가 지닌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 도움의 정점이라 할 만한 것이 바로 황립 아카데미 입학이었는데.

제국의 백작 이상 작위를 가진 가문의 후계자에 한해 무시험 입학이 허락되는 황립 아카데미였지만, 그 이외에는 제아무리 고위 귀족의 자제라 할지라도 1년에 한 번 치르는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입학이 허락되었다.

전대 백작의 자식 중 유일하게 이 시험을 통과해, 황립 아카데미 오너 학부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 바로 노이만 버젯이었고.

아버지와 후계자인 큰형은 매우 기뻐하며 그의 아카데미 생활을 최대한 지원해 주었다.

물론 여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낮췄던 노이만 버젯의 처세술과 졸업 즉시 제국 군부에 몸담겠다는 선언이 크나큰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군인으로서 입지를 다질 경우 아르펜 백작가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될 수 있을뿐더러, 만약 제법 괜찮은 성과를 내기라도 한다면 스스로 작위를 받아 새로운 가문을 일굴 수도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아르펜 백작가의 방계’라는 수식어가 붙겠지만, 제국의 백작 정도 되는 대귀족의 후광을 받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24세(오너 학부는 다른 학부에 비해 재학 기간이 길다)에 이미 중급 엑스퍼트에 오른 노이만 버젯은, 이후 15년간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적지 않은 공을 세웠고.

그 와중에 상급 엑스퍼트가 되었으며, 이후 황도를 지키는 세 개의 기사단 중 하나인 ‘레드 드레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1년간 복무하던 와중 남작 위를 하사받았다.

황도에 죽치고 앉아 훈련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는 레드 드래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임명된 것은 일종의 안식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사실상 남작 작위를 하사받기에 합당한 공적을 세웠는지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노이만 버젯은 정확하게 1년을 채운 뒤 남작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었다.

이미 혼인을 해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설계한 인생의 레일 위를 제법 잘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작가의 서자로 태어나 자신의 가문을 스스로 일으켰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문제는, 제국의 차기 황제 자리에 대해 제대로 된 교통정리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황제로 인해 발생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노이만 버젯에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제국 황위의 주인은 결정이 날 테고, 자신은 경쟁의 승리자인 차기 황제를 향해 충성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자신의 출신 가문인 ‘아르펜 백작가’가 제국 동부에서 발원한 ‘6황자’ 세력에 합류해 버린 것이다.

현 아르펜 백작인 자신의 큰형이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인지, 6황자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며 수십 귀족 가문 중 핵심으로 급부상했고.

이제는 아르펜 백작가의 방계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버젯 남작가’ 역시 6황자 쪽에 합류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까지 보내왔다.

‘아니, 하필이면 왜 6황자를... 그리고 내 영지가 서부 끝자락에 있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린가?’

무려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제국의 군인으로 살아온 노이만 버젯이었다.

그 덕에 제국 중앙과 서부를 장악한 황태자 세력과, 강력한 군세를 자랑하는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몸을 일으킨 3황자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6황자는...

‘케틸러스 후작가와 아르펜 백작가를 제외하면... 죄다 쭉정이들이야. 황태자는커녕 3황자와도 상대가 되지 않아.’

그런 판단에 다다른 순간, 큰형(아르펜 백작)의 친서를 태워버린 노이만 버젯.

그는 지체하지 않고 한직 중의 한직인 서부 국경 관문의 부사령관으로 자원했고.

마침 전 부사령관의 은퇴 이후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이 골치를 앓던 상부에서는 흔쾌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르펜 백작의 입장에서는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놈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테지만, 결말이 뻔히 보이는 수렁으로 끌려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은혜라면 지난 십수 년간 쓸만한 정보를 넘겨준 걸로 넘치게 갚았다.’

물론 아르펜 백작가 역시 노이만 버젯이 군부에서 출세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었지만, 군부와 관계된 여러 이권의 정보를 넘겨줌으로써 충분히 갈음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르펜 백작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해. 그래야지만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산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제국 동부의 6황자군에 합류한 아르펜 백작이 서부 국경 관문에 있는 노이만 버젯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안전한 서부 관문 요새에서 제국의 혼란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새를 찾아온 일단의 인물들로 인해.

그의 평온한 일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2

“히야... 이 녀석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버젯 남작님?”

관문 요새의 부사령관실.

그곳의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자그마한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한 얼굴을 한 채 연신 자신의 몸을 핥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리키며 호들갑스럽게 입을 연 이는 차기 ‘대륙 10강’의 가능성마저 점쳐지고 있는 남자이자 나이만 왕국의 초신성 칼튼 에거시였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관문 요새의 부사령관 노이만 버젯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아, 네... 차, 참으로 귀, 귀여운... 아니, 용맹한, 아니... 그러니까...”

가늘고 길게 살자는 인생의 좌우명을 지키기 위해, 고의로 실력을 정체시키는 노력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에게... 무려 대륙적인 명성을 떨치는 초강자의 방문은 사실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겪으며 스스로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어낸 그가 고작(?) 떠오르는 신흥 강자와의 만남만으로 이토록 어리숙한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

‘젠장, 저건 분명... 이게 말로만 듣던 권능인가? 최상급 몬스터의 권능이라면 이해가 되긴 하지만... 저 조그만 몸집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도대체...’

생김새로 보아, 그루밍에 여념이 없는 저 평범한 회색 고양이(검은 갈기가 달렸고 머리통이 비정상적으로 크긴 하지만)는 조금 전 요새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최상급 몬스터가 분명했다.

‘미치겠군... 나도 모르게 검을 뽑아버릴 것 같아. 그, 그것만은 안돼, 그러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노이만 버젯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음에도, 고작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동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으로 인해 전신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

믿어지지 않게도 이 최상급 몬스터의 ‘주인’이라는 인물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아무래도 진화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라... 힘조절이 잘 안되는 것 같아.”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동대륙인임을 감안하더라도, 절대 20대 중반은 넘을 것 같지 않은 얼굴의 사내였다.

하지만 40을 훌쩍 넘긴 노이만 버젯은 그의 반말에도 전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사실 화가 나지 않았으니 티를 낼 이유가 없었다.

이곳 부사령관실에서 저 두 사람(에 더해 몬스터 한 마리)과의 만남을 가지기 전, 황급히 독대한 황립 아카데미의 오너 학부 후배 크라임 듀란으로부터 저 동양인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칼튼 에거시는 현재의 실력만으로도 대륙에서 가장 강한 100인 안에 넉넉히 들어가리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더군다나 그의 젊은 나이를 감안하면 그가 지닌 잠재력은 능히 대륙 10강과 견줄만한 평가를 받는 초강자였다.

그런데 그런 인간보다 몇 배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오너라니?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려 최상급 몬스터를 고작 1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길들여 버린 지고한 경지의 마법사일 확률도 높단다.

‘그런 인간이 존재할 수가 있냐?’

하나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조차 너무나 힘든 일이거늘...

만약 그 말을 전한 이가 자랑스러운 황립 아카데미 오너 학부의 후배이자, 제국의 용병 중 손꼽히는 실력자인 동시에, 진중한 성격으로 유명한 크라임 듀란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헛소리로 치부하고도 남을 이야기였다.

그때...

미야아아아아아아악!

노이만 버젯의 불신 섞인 눈길을 느낀 듯, 이빨을 드러내며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내는 최상급 몬스터(추정).

따아아악

“시끄럽다.”

묘오오오오...

하지만 스노우라는 이름의 동대륙인이 가볍게 머리통을 후려치자, 금세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으며 풀이 죽는다.

‘저, 저런 걸 보면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살 떨리는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최상급 몬스터를 딱밤 한 방으로 잠재워 버리다니.

게다가 그 유명한 칼튼 에거시가 그를 대하는 태도만 보더라도 저 관계의 우위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너무나 명명백백했다.

“형님, 제국을 구경한 다음엔 저와 함께 나이만 왕국으로 가시죠. 중간에 엘프 왕국이 있긴 한데, 걔들은 괜히 콧대만 높고 볼 것도 별로 없어요.”

“그 말 그대로, 이파니에게 전해주도록 하지.”

“헉! 아, 안 돼요! 그 성질 더러운 공주님 귀에 그런 말이 들어갔다간...”

“그리고 난 제국에 일이 있다. 넌 네 나라로 돌아가.”

“대체 그 ‘일’이란 건 언제쯤 얘기해 주실 거예요?”

노이만 버젯이 주목한 것 역시 스노우의 입에서 나온 ‘일’이라는 단어였다.

이 시기에 제국에 발을 들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초강자가 하려는 일이라면...

‘어, 엄청난 변수다. 어쩌면 황위의 주인을 결정지을지도 모를...’

그리고 그때.

벌컥

부사령관실의 문이 열리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부관이 뛰어들어왔다.

“부사령관님!”

그리고는 이내, 노이만 버젯의 심장에 그리 이롭지 않을 듯한 말을 토해냈다.

“고, 공녀! 발렌타인 공작가의 공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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