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관문 요새에서 생긴 일(2)
#1
“헬레나 오도넬... 아니, 이젠 헬레나 발렌타인인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만. 당분간은 발렌타인으로 지내야 할 것 같군요, 대장.”
“큭, 아직도 날 대장이라고 부르는 건가? 이제는 그쪽이 고용주의 입장인데 말이지.”
“그런가? 뭐, 어쩔 수 없죠. 제 길지 않은 인생 중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어서 그런지... 대장이란 호칭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걸요.”
“호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런데... 용케도 내가 도착하는 날짜에 맞춰 이곳을 방문했군.”
다소 서늘하게 느껴지는 스노우의 말투에 헬레나 발렌타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대장은 제가 속한 ‘아헨달의 그림자’에 의해 ‘블랙 등급’ 관리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어요.”
이전 사막 왕국 카이샨과 마라몬트 왕국의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정체를 밝힌 이펜타르크 제국의 황태자 직속 비밀기사단 ‘칼리드’ 소속 기사, ‘네드 험비(맷 스팅리)’를 통해 용병 오너 헬레나 오도넬의 진짜 신분을 전해 들은 바 있었던 스노우였다.
사실 ‘훈련병 탐색’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관련자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정보의 경우,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훨씬 더 다채로워지기에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헬레나 발렌타인 역시, 네드 험비를 통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짧지 않은 기간 스노우라는 인간을 겪어본 그녀로서는, 그가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닐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에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헨달의 일곱 그림자(7인의 최고 간부)’의 직권으로, 대륙에 단 2인에 불과했던 ‘블랙 등급’ 관리 대상을 3인으로 늘려 그의 지난 행적을 낱낱이 파헤치는 과감함을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스노우가 물었다.
“블랙 등급? 그건 뭐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조직, 그것도 무엇보다 은밀함을 중요시하는 정보 조직 내의 특급 정보들을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헬레나 발렌타인이 판단하기에, 이 스노우라는 인간은 ‘대륙 3강’이라 일컬어지는 절대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었고.
이런 강자와의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쪽이 가진 패들을 오픈할 필요가 있었다.
“쉽게 말해, 대상의 정보 수집을 위해 투입하는 요원들의 수준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블랙 등급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요원들이 투입되죠.”
“높은 수준이라면?”
“대장의 과거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상급 엑스퍼트 5인과 그들을 서포트하기 위한 각 왕국 지부의 전력이 투입되었죠. 하지만 대장의 과거는... 적어도 오르비스 대륙에서의 스노우라는 인간의 과거는, ‘대수림’에서 브라이드 영지의 기사 ‘테리 헤링스’를 만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끊겨버리더군요. 뭐, 사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사실 완전히 다른 세계로부터 불시착한 장소가 ‘베헤르디아 대수림’이었으니, 그 이전의 행적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스노우가 말을 이었다.
“과거의 행적을 캐는 게 전부인가?”
헬레나 발렌타인이 살풋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과거보다 중요한 건 현재, 그리고 미래죠. 대장이 카이샨 왕국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아헨달의 그림자 소속 최상급 엑스퍼트가 대장의 행보를 ‘관찰’ 시작했어요.”
이말 만큼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스노우였다.
“최상급? 너희 조직에는 최상급 엑스퍼트가 남아돌기라도 하는 건가? 고작 미행 따위에 그런 고급 인력을 낭비한다고?”
“그야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낭비가 될 수도 있고, 적절한 인선이 될 수도 있죠. 그리고... 사실 저희가 보유한 최상급 엑스퍼트는 그리 많지 않아요. 하지만 ‘블랙 등급’의 인물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전력이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대장의 경우엔, 그 최상급 엑스퍼트조차 500미터 이내로는 절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고요.”
사실 은신 기술을 익힌 최상급 엑스퍼트라면 ‘마력탐지(C)’ 스킬이나 ‘천리안(C)’ 스킬로는 잡아낼 수 없다. 마력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상태로 모습을 감춘 상대를 포착해내는 건 ‘훈련병 탐색’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 스킬의 범위는 고작해야 반경 5미터(본신일 경우) 정도에 불과했다.
스노우가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스터에 근접한 최상급 엑스퍼트였더라면, 수백 미터 밖의 존재가 흘리는 미약한 마력을 간파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실상은 어지간한 상급 엑스퍼트만도 못한 마력 감지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기에. 500미터가 아닌 50미터 이내로 들어와 첩보 활동을 벌였다 한들, 알아차리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을 터였다.
피식 웃은 스노우가 말을 이었다.
“그 친구에게 웬만하면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해둬. 내게 걸리는 순간 적어도 다리 한쪽은 부러트려 버릴 테니까.”
사실상, 감시를 붙여도 상관없다는 허락이나 다름없었지만.
헬레나 오도넬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안타깝지만, 더 이상 스노우님을 ‘관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왜지?”
천천히 들어올려진 헬레나 발렌타인의 손가락이 둘만의 독대 자리에 끼어든 자그마한 회색 고양이를 가리켰다.
“제아무리 은신의 달인이라 한들, 최상급 몬스터의 감각까지 속이지는 못하는 것 같더군요. 토리라고 했죠? 스노우님이 저... 아이를 길들인 이후로는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무심코 토리를 바라보던 스노우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럼 가끔 엉뚱한 곳을 향해 하악질을 해댄 이유가...”
헬레나 발렌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2
이펜타르크 제국 최고의 가문인 발렌타인 공작가의 공녀이자, 대륙 3대 정보 조직 중 하나인 ‘아헨달의 그림자’의 일곱 간부 중 하나인 헬레나 발렌타인.
예상치 못했던 그녀와의 이른 만남은 ‘의뢰’와 ‘보상’이 명시된 두 장의 계약서에 서로의 사인을 마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엘가드 왕국에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이미 대부분 합의가 끝난 상황이었기에 계약을 마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의뢰주가 발렌타인 공작가의 공녀 헬레나 발렌타인이 아니라... ‘아헨달의 그림자’의 일곱 번째 그림자 헬레나 오도넬이로군.”
“발렌타인 공작가는 황위 계승 경쟁에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서요.”
“그래? 그럼 지금 네 행동은 공작의 뜻을 저버리는 게 아닌가?”
“상관없어요. 이 계약에는 발렌타인 공작가의 공녀 헬레나 발레타인의 의중은 눈곱만큼도 들어 있지 않으니까. 오로지 ‘아헨달의 그림자’의 간부인 헬레나 오도넬의 독단에 의해 성사된 계약일 뿐이에요.”
“큭, 굉장히 억지스럽긴 한데... 나야 계약만 제대로 이행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제가 이래서 대장을 좋아하죠.”
“너와 내가 함께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네, 아무래도 눈에 띌 테니... 그리고 전 당분간 황도에 머물러야 해요.”
“좋아 그럼 3개월 뒤에 보도록 하지.”
“네, 부탁드릴게요. 그곳은 누군가의 헛된 욕망으로 인해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곳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레나 발렌타인은 현재 이곳 서부 관문 요새의 책임자(사령관의 휴가로 인해)인 노이만 버젯 남작과 면담을 가진 후, 내일 아침 일찍 황도로 되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헬레나 발렌타인보다 먼저 방을 나와, 관문 요새에 소속된 사용인 중 하나의 안내를 받아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고.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복도의 끄트머리 부근 벽에 등을 기댄 채, 부리부리한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젊은 사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헬레나 발렌타인의 호위기사라고 했던가?’
헬레나 발렌타인은 상급 엑스퍼트이자 엄청난 실력을 지닌 기간트(2000rp, 비에리) 오너였기에, 제국 서부의 끝자락을 목표로 하는 긴 여정에도 거창한 규모의 호위단을 대동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부의 역할을 겸하는 단 한 명의 호위만을 대동했는데. 딱히 관심이 없었던 지라, 헬레나 발렌타인과의 재회 당시에는 얼굴 정도만 흘깃 확인하고 지나쳤던 참이었다.
뚜벅뚜벅......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요새 사용인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고(그에게는 발소리를 내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것은 오직 정제되지 않은 내 발소리뿐이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하며 헬레나 발렌타인의 호위기사를 무심히 지나쳐 가려던 순간.
과연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복도 벽에서 등을 뗀 녀석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대체 공녀님은 왜 이 먼 곳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신 걸까?”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너무 전형적이라서,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아름다운 공녀를 모시는 호위기사, 그리고 연모하는 공녀가 관심을 쏟는 대상에 대한 전형적인 질투... 이거야말로 정말 지독할 정도로 진부한 클리셰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때깔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놈이로군.’
조금 전에는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녀석은 180대 후반의 훤칠한 키와 갑옷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잘 단련된 근육이 인상적인 완벽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엘프 왕자인 카일 어네스트에 뒤지지 않는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젊은 기사였다.
게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롱소드는 얼핏 보기에도 드워프들이 만든 검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명품임이 분명해 보였으니, 그의 가문 역시 보통은 아닐 것으로 예상되었다.
나는 약간의 호기심을 감춘 채 최대한 감정이 배제된 눈길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냐, 넌?”
내 짧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잔뜩 찡그린 녀석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정말 더럽게 잘생기긴 했군.’
한껏 인상을 구겼는데도 감추어지지 않는 미모에는 내심 감탄이 나올 정도.
‘흠, 카일 녀석은 종족 자체가 다르다 보니 그리 큰 감흥이 없었는데, 이 녀석은 다르군. 그나저나... 목적이야 뻔한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실력은 될까?’
강자의 아우라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선 아직 최상급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내 주위에 워낙 괴물 같은 녀석들이 득시글거렸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것이었지, 사실 이 세계에서 상급 엑스퍼트라 함은 어느 국가에서건 강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초엘리트 인재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른쪽 손목에 새파란 팔찌가 자리하고 있는 걸로 보아, 녀석은 기간트 오너가 확실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첼시 같은데... 2300rp급 기간트를 탈 정도면 꽤 실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훈련병 탐색.’
지이이이이잉
희미한 빛이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녀석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뒤이어 나타난 메시지창.
[테일러 포지(S) : 35세, 이펜타르크 제국 발렌타인 공작가의 공녀 헬레나 발렌타인의 호위기사.
188cm, 90kg
파일럿 재능 ?86/95(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허어...”
테일러 포지의 훈련병 프로필을 확인한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호오... S급? 턱걸이이긴 하지만 S급은 S급이지. 그런데 정체성이... 공녀의 호위기사, 달랑 그거 하나라고? 하, 진짜 웃기는 놈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