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관문 요새에서 생긴 일(3)
#1
사실 메시지창이나 훈련병 프로필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성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창’에 대한 연구.
이는 던전 시대의 개막 이후 지구의 학자들로부터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로 취급받아 왔지만. 수백 가지 의견이 난립을 거듭할 뿐,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연구 결과를 내놓은 이는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메시지창에 관해서라면, 각성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럴듯한’ 이론들이나마 이따금 등장하곤 했었지만.
세계 유일의 ‘S급 파일럿’ 특성 각성자인 나만이 확인할 수 있는 ‘훈련병 프로필’은 달랐다.
이것에 관해서는 오로지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내야만 했는데.
프로필 최상단에 나타나는 일종의 ‘소개 글’을 훈련병의 ‘정체성’이라고 정의한 것 역시 오로지 나 혼자만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프로필 최상단에 표시되는 짧은 문장을, 훈련병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라 판단하기로 한 것이다.
‘뭐, 솔직히 맞건 틀리건 별 상관은 없으니까.’
어쨌든 내가 내린 ‘훈련병 프로필’의 정의에 따르면, 내 뒤를 따라 쫄래쫄래 훈련장으로 이동 중인 이 ‘테일러 포지’란 녀석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테일러 포지(S) : 35세, 이펜타르크 제국 발렌타인 공작가의 공녀 헬레나 발렌타인의 호위기사.
188cm, 90kg
파일럿 재능 ?86/95(현재/최대치)......]
일단 상급 엑스퍼트로 추정되는 본신의 실력의 경우,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논외로 친다면.
우선 고작 35살이라는 나이에 무려 A급에 턱걸이(A급 : 86~90) 중인 파일럿 능력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물론 ‘86’이라는 숫자는 마라몬트나 엘가드 왕국의 근위기사 중에서도, 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소수의 프로필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뛰어난 수치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똑같이 턱걸이라곤 해도 무려 S급(95이상)에 걸쳐 있는 잠재력과 현 파일럿 능력치가 무려 ‘10’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걸로 봤을 때...
테일러 포지란 녀석은 기간트 훈련에 그리 열정적으로 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연령대에 엇비슷한 잠재력을 지닌 칼튼 에거시(37세, 93/97)나 헬레나 발렌타인(36세, 90/93)의 두 능력 간 수치 차이가 ‘5’ 이내인 것과는 명백히 비교되는 프로필상의 숫자가 이를 증명했다.
‘게다가, 어쨌든 저만한 능력을 지니고도 고작 호위기사라는 정체성 하나만을 지니고 있다는 건...’
얼핏 꽤 대단한 집안의 자제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펜타르크 제국 제1의 명문가라 할 수 있는 발렌타인 공작가와 ‘혼담’이 오고 갈 수 있을 만한 위치의 가문 출신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급이 비슷한 가문의 인간이었다면 ‘약혼’이나 ‘결혼’, 하다못해 최소한 ‘사랑’에 관련된 키워드 정도는 떴을 테지.’
또한 맹목적으로 헬레나 발렌타인을 추종하고 있음에도, 단 하나의 부정적인 키워드가 섞여 있지 않은 것으로 봤을 때... 상당히 심지가 곧은 인간이라는 사실 역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오르비스 대륙으로 넘어오기 전엔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던 ‘훈련병 지정’ 스킬과는 달리.
그 효용성으로 인해 제법 자주 사용했었던 ‘훈련병 탐색’ 스킬이었기에, 훈련병 프로필의 첫 줄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키워드들로 장식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오르비스 대륙으로 넘어온 이후 확인한 이들의 프로필에서 부정적인 키워드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음... 프로필을 확인한 녀석들 대부분이, 평생 수련에만 매진한 기사들이라 그런 걸까?’
아무튼 결론은... 천재적인 재능에 비해 수련을 등한시한 듯 보이는 헬레나 발렌타인의 열렬한 추종자 녀석이, 뭔가에 잔뜩 심사가 뒤틀린 듯 내게 시비를 걸어왔고.
나는 딱히 걸어온 시비를 피하는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내 안전이 보장된다는 확신이 설 경우에 한해서지만.’
안티가만 보유했을 당시에 용병왕 같은 놈이 시비를 걸어왔더라면?
‘고민할 게 뭐 있어? 일단은 도망부터 치고 봐야지.’
복수?
그런 건 100%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때나 감행하는 거다.
애초에 도망쳐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강해지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완벽한 안전과 끝없는 강함의 추구’라는 두 개의 키워드야말로...
나라는 인간의 ‘정의’라 할 수 있었다.
#2
사실 테일러 포지는 자신을 앞서 걸어가고 있는 스노우라는 자에 대해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막 검을 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 지체 높은 공작가의 영애와 그 공작가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인 자작가의 차남으로 처음 만난 이후 쭉 연모의 마음을 키워왔고.
철이 든 이후 자신이 공작가의 영애의 배필이 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현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오직 공작가의 기사가 되어 호위로나마 그녀의 곁에 남겠다는 일념만을 품고 살아왔다.
테일러 포지의 메시지창에 나타난 수치에서 유추한 스노우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결코 훈련을 등한시하는 타입의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불과 32세에 상급의 벽을 돌파하며 빠르게 두각을 드러낸 엑스퍼트로서의 재능과는 달리, 기간트 오너로서의 기량은 그가 투자한 훈련 시간에 비례해 매우 더디게(어디까지나 S급 잠재력에 비해) 상승했다.
그러니까 처음 기간트 콕피트에 탑승한 이후 10여 년간은 그러했다.
물론 재능이 재능이어던 만큼, 매우 더디게 발전한 수준조차 제국 황립 아카데미의 오너 학부에서 내내 5위권 이내를 유지했을 정도였기에.
주변에서도,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자신의 발전이 더디다 생각하지 않았다.
테일러 포지는 엑스퍼트로서도, 기간트 오너로서도 평생 수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으며. 두 분야 모두 동 세대 내 최상위권 실력을 드러낸 특별 케이스였던 만큼, 황실과 고위 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헬레나 발렌타인의 가문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테일러 포지의 경우 현 테일러 자작의 뒤를 이어 영지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그가 발렌타인 가문의 기사단에 합류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발렌타인 가문의 기사로 합류한 지 9년이 지난 시점.
이미 공작가 내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테일러 포지의 기간트 조종실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32세에 발렌타인 공작가의 오너 기사단인 ‘맨드라미 기사단’ 중 중위권이라 평가받았던 테일러 포지.
그는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한 33세에 발렌타인 가문 직속 32명의 오너 중 10위권 이내를 넘보기 시작했고.
34세에는 맨드라미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 그리고 기사단 내 최강의 오너인 ‘가레트 볼레스(41세, 2600rp급 유니크 기간트 파우스트의 주인)’를 제외하고는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현재는 이펜타르크 제국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인 가레트 볼레스의 뒤를 이어, 기사단 내 NO.2 실력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천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기사단 내에서 5위권 이내에 들어가는 실력자임을 인정받은 1년 전, 테일러 포지는 그토록 갈망하던 헬레나 발렌타인의 호위기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불만족스러웠던 점은, 그가 보호(?)해야 할 헬레나 발렌타인이 벌써 5년째 공작가를 떠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이상한 점은, 무려 공작가 영애의 행방을 알고 있는 이가 가문 내부에 전무(적어도 그가 소통할 수 있는 인물들 중에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
가문을 떠났던 공녀가 공작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알게 된 두 가지 사실로 인해 테일러 포지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한없이 여리여리해 보이는 헬레나 발렌타인 공녀가 엑스퍼트로서의 능력은 물론, 기간트 조종실력 역시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자란 사실이었다.
‘그, 그래도 지금의 발전 속도라면... 그리 오래지 않아 공녀님의 실력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공녀’로서의 삶이 아닌 ‘강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헬레나 발렌타인에게 있어,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어지간한 근위기사 정도는 찜쩌먹을 수준인 테일러 포지는 썩 괜찮은 대련 상대였고.
그녀가 이제껏 필요로 하지 않았던 호위기사의 역할을 허락한 것 역시 그러한 쓸모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 포지를 놀라게 한 두 번째 이유는 다름 아닌 헬레나 발렌타인의 숨겨진 신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얼굴을 익혀온 데다, 그에 대한 조사 역시 완벽하게 끝낸 헬레나 발렌타인은 테일러 포지를 호위기사로 선임함과 동시에 자신의 두 번째 신분이 ‘아헨달의 일곱 번째 그림자’임을 밝혔다.
‘이럴 수가! 공녀님이 그 유명한 아헨달의 그림자, 그 거대한 정보 길드의 일곱 간부 중 하나였다니...’
이 역시 공녀의 숨겨진 실력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이긴 했지만, 이미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를 끝마친 테일러 포지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이후 공녀를 뛰어넘기 위해 수련에 매진하던 테일러 포지.
그에게 호위기사로 선임된 이후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고.
그것이 무려 서부 국경까지 공녀를 호위하는 것임을 알게된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고, 공녀님과 단둘이... 저, 정신 차려, 테일러 포지! 넌 공녀님의 일개 호위기사일 뿐이다!’
하지만 연모하는 마음이야 접었다 한들, 수십 년을 추앙해온 헬레나 발렌타인 공녀와의 여행(?), 그것도 단둘만의 여행에 설레는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서부 관문으로 향하는 목적이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 대체 그자가 누구이길래 공녀님이 친히 그 먼 곳까지...’
알 수 없는... 아니, 사실 출처가 명확한 분노와 질투심이 테일러 포지의 뜨거운 가슴에 불을 지폈고.
그 불은 지난 며칠간 이어진 여정 동안 서서히 그 크기를 키워갔다.
그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그 분노와 질투심의 실체와 마주한 직후, 대련을 위해 함께 훈련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재.
‘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설마 최상급 엑스퍼트인가? 공녀님께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엄청난 기간트 조종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계약한 기간트가 가이아라는 것 말고는 없었는데... 그, 그래도 그나마 가이아라면 승산은 있어. 600rp는 어지간한 실력 차이로는 결코 메꿀 수 없는 수치라고. 그런데 묘하게 거슬리는 저 고양이는 대체 뭐지?’
스스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스노우로부터 느껴지는 강자 특유의 여유로움과 감조차 잡히지 않는 본신의 능력, 거기에 더해 최상급 몬스터인 토리(현재 몸길이 30cm가량으로 소형화 중)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위압감(놀랍게도 권능 발현 이후, 어느 정도 마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공녀님은 허언이나 과장을 모르시는 분이야. 그런 분이 엄청난 실력이라고 평가할 정도라면... 적어도 볼레스경과 비슷한 실력은 되지 않을까? 그, 그래도 상관없어. 볼레스경의 기간트는 그 미친 파우스트(2600rp)라고! 가이아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테일러 포지가 머릿속을 멤도는 상념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요새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훈련장에 도착했다.
약 50여 미터의 간격을 둔 채 마주 선 두 오너.
어떻게 안 것인지. 서부 관문 요새의 부사령관인 노이만 버젯과 칼튼 에거시, 마지막으로 헬레나 발렌타인이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이외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곳이 요새 외곾에 위치한 기간트 훈련장이었던 데다, 부사령관인 노이만 버젯이 접근 통제령을 내린 탓이었다.
그리고 훈련장 위에 두 개의 빛무리가 잠시 머문 후 나타난 두 기의 기간트.
이를 확인한 세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쯧, 내 이럴 줄 알았다.”
“뭐, 뭐지 저 작은 기간트는? 아무리 봐도 전투용은 아닌 것 같은데? 700... 아니, 600... 아니야! 아무리 봐도 500rp급......”
“저건... 브롱코스? 설마... 아무리 대장이라도 테일러의 첼시를 브롱코스로 상대하겠다고? 아니, 대장이라면 혹시 모르는...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고작 500rp급 훈련용 기간트로는 불가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