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47화 (147/169)

147화 관문 요새에서 생긴 일(4)

#1

엑스퍼트로서의 재능으로만 따지자면, 기간트 오너로서의 그것에는 비할 바가 아닌 테일러 포지였다.

하지만 그건 그가 타고난(비록 대기만성형이기에 아직까지 만개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너’의 재능이 천재 중의 천재라 할 만했기에 그런 것일 뿐, ‘엑스퍼트’로서의 재능 역시 그의 세대에서 5% 이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대단히 뛰어난 수준이었다.

애초에 테일러 포지가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 곧바로 발렌타인 공작가의 기사단에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부터가 오너와 엑스퍼트, 두 분야 모두에서 최상위권의 재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고.

사실 막 기사단에 입단할 때만 하더라도, 오너보다는 엑스퍼트 쪽 능력을 조금이나마 더 높게 평가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엑스퍼트로서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그만큼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35세가 된 현재, 능숙한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있는 테일러 포지의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불과 2미터 앞에서 덤덤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저 동대륙인은 매우 위험한 인간이라고.

그러한 감각과는 반대로, 그로부터 단 한 톨의 마력조차 느낄 수 없었기에 테일러 포지가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볼레스경의 마력도 어렴풋하게 느낄 수는 있었는데...’

완숙한 최상급 엑스퍼트인 기사단장은 몰라도, 불과 1년 전 최상급의 경지에 오른 가레트 볼레스의 마력은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던 테일러 포지였다.

‘그럼 저 스노우라는 자가 단장님과 비슷한 수준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맨몸으로 맞붙어서는 단 1%의 승산조차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대련은 ‘기간트 오너’로서 맞붙는 것이었다.

‘기간트 전투라면 다를 것이다.’

이는 본신의 힘으로는 싸워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기사단장과의 대련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2500rp급 기간트를 타는 단장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패배를 거듭하고 있긴 했지만. 그 차이는 점차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고, 최근에는 100합이 넘도록 대련을 지속할 수 있게 된 테일러 포지였다.

‘저자의 기간트가 가이아라면 내게도 승산이 있을 거야.’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는 사이, 어느새 훈련장에 도착한 테일러 포지.

그는 훈련장 외곽에 모습을 드러낸 헬레나 발렌타인의 모습을 확인하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했다.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그 승리를 공녀님께 바친다!’

#2

테일러 포지의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도, 헬레나 발렌타인의 내심은 그가 승리할 가능성 따윈 이미 완전히 배제한 상태였다.

‘테일러경의 실력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열 명이 되어 덤빈다 한들, 대장에게 승리하는 건 불가능해.’

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스노우의 사기적인 강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저런 초강자와의 대련은 테일러경에게 좋은 경험이 될 테지. 내가 보기에 그는... 아버지(공작은 6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첫 번째 아내를 얻었다)나 베일리쉬 후작님의 뒤를 이을 재능을 지니고 있어.’

이미 100세를 넘긴 오르핀 발렌타인 공작과 70대인 페리슨 베일리쉬 후작이 건재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 뒤를 이을 만한 ‘대륙 10강’의 후보가 등장하지 않고 있는 이펜타르크 제국이었다.

30세를 넘긴 이후부터 비정상적인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는 테일러 포지.

그는 헬레나 발렌타인이 그녀 자신과 더불어, 차기 ‘대륙 10강’으로 기대를 걸고 있는 유망주 중 하나였다.

‘엑스퍼트로서의 재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는 아직 젊으니 더 발전할 수도 있겠지.’

현 대륙 10강의 면면(대륙 10강의 말석인 용병왕조차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강자)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아무리 오너로서의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 중, 오너로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지닌 자들만이 대륙 최강의 10인이라 불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시간을 조금 더 먼 과거로 돌려본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도(즉, 최상급 엑스퍼트로서도) 그 자리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존재했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 대륙급 규모의 전쟁(신마전쟁 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현 오르비스 대륙은, 그야말로 강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이었기에 그 자격 요건이 매우 빡빡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런저런 사항들을 모두 배제하더라도...

‘궁금해... 엘가드 왕국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하던데, 혹시 대장의 실력이 더 강해진 건 아닐까?’

이미 ‘스노우’라는 오너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린 헬레나 오도넬이었기에.

다시금 그의 기간트 전투를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흥분해 버린 상태였다.

#3

50여 미터의 간격을 둔 채 각자의 기간트를 소환했을 때, 테일러 포지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저 작달막한 기간트는?’

신장이 고작 6미터에도 못 미치는 날렵한 체형의 은색 기간트.

일반적인 훈련용 기간트에 비해 꽤 화려한 외관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기간트의 성능은 대체로 그 크기에 비례하기 마련이었고. 대륙에 존재하는 몇몇 이레귤러 기체들 역시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 크기의 차이를 보일 뿐, 저렇게 작은 기간트가 기준 출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뭐지? 설마 날 놀리는 건가? 아니면 날 우습게 봐서?’

본인의 실력부터가 제국의 웬만한 근위기사를 능가하는 헬레나 오도넬이 ‘엄청난 실력의 오너’라고 표현한 인물인 만큼, 그가 소환한 기간트가 기준 출력(1000rp) 이상만 되었더라도 그저 고개를 갸웃하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저 기간트는 아무리 봐도...

‘500? 600? 아무리 봐도 그 이상은 아니야. 외부 장갑도 장착되지 않은 기체라고. 빌어먹을...’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테일러 포지.

그의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었고, 꽉 깨문 입술로부터는 비릿한 맛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 그가 충성을 맹세한 헬레나 발렌타인 공녀가 없었다면 냅다 욕설부터 갈겼을 테지만, 그 공녀가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상대인 만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테일러 포지는 첼시(2300rp)의 외부 통신 마법진을 개방한 뒤, 최대한 자신의 기분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 기간트로 대련에 임하실 생각입니까?]

그러자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은빛 기간트로부터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연한 소릴 하는군. 참고로 이 기간트의 이름은 브롱코스다.]

[......]

너무나 여상스러운 그 음성에 할 말을 잃어버린 테일러 포지는 물론, 훈련장 외곽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노이만 버젯, 헬레나 발렌타인)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스노우의 브롱코스’가 지닌 힘을 익히 알고 있는 칼튼 에거시는 예외였다.

“뭐, 이해해. 솔직히 겪어보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나 역시 그랬고...”

“네?”

“에거시경, 지금 뭐라고?”

노이만 버젯과 헬레나 발렌타인이 그를 돌아보며 의문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육중한 파란색 기간트였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하필 상대의 기간트가 첼시라니... 쩝.”

딱 한 번이지만, 칼튼 에거시 역시 첼시를 탄 상태로 스노우의 브롱코스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 역시 현재의 테일러 포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고작 500rp짜리 기간트로 2300rp의 첼시를 상대하는 건 만용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스노우라는 인간은 그저 괴물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사실 스노우 스스로 마법의 사용을 제한한 초반에는 제법 그럴듯한 승부가 이어졌었다.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지. 성능이 족히 수십 배는 차이가 나는 기간트로 그럴듯한 승부를 펼치다니!’

물론 스노우 역시 각종 버프들을 총동원한 상태였지만, 칼튼 에거시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얼음 계열을 비롯해 온갖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나마 나니까 200합이나 버틴 거지. 저런 애송이 녀석은...’

사실 칼튼 에거시와 테일러 포지의 나이 차이는 고작 2살에 불과했다.

#4

파아아아앗

첼시의 오른손에 기간트용 롱소드가 소환되었다.

테일러 포지가 두 개의 무기 슬롯에 등록한 무기는 대검과 롱소드였는데, 호위기사인 그에게는 방패의 효용성이 그리 크지 않은 탓이었다.

두 개의 무기 중 롱소드를 선택한 것은 상대 기간트의 크기가 매우 작았기 때문인데.

보나 마나 빠른 움직임과 작은 몸집을 이용해 회피 위주의 전투를 펼칠 것이 뻔했기에, 묵직한 일격과 방어에 특화된 대검보다는 훨씬 더 빠른 공격을 펼칠 수 있는 롱소드가 더욱 효율적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저따위 저등급 기간트로 펼치는 기동이야 뻔한 수준이겠지만.’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기간트의 몸집이 작다고 해서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간트의 무게가 가벼울수록 움직임에 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간트의 등급과 오너의 역량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너의 역량은 몰라도 고작 500~600rp급으로 보이는 상대 기간트가 선보일 수 있는 기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스노우의 브롱코스가 첫발을 떼기 전까지만 해도, 테일러 포지는 이러한 사실에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여전히 덤덤하기 그지없는 스노우의 음성이었다.

[선공을 양보할 필요는 없겠지?]

제 할 말을 끝낸 스노우는 테일러 포지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옅은 붉은빛에 휩싸인 브롱코스의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츠팟

순간적으로 테일러 포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은빛 기간트.

[뭐, 뭐야!]

순식간에 100%에 다다른 동화율.

숨 쉬듯 자연스러운 오버클럭.

거기에 더해진 매토템과 가속 스킬.

마지막으로 브롱코스의 전신에 스며든 중력 조절 스킬까지.

그 결과는 테일러 포지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초고속 기동이었다.

스르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첼시의 후방에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브롱코스.

타앗

가볍게 대지를 박차며 떠오른 이 유려한 외관의 은빛 기간트는, 무려 공중에서 720도로 회전한 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첼시의 헤드를 그대로 후려갈겨 버렸다.

[크어어어어어억!]

외부 통신 마법진을 통해 들려온 테일러 포지의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쿠당탕탕탕탕

공중으로 떠올라 5미터가량을 튕겨 나간 뒤 훈련장 바닥에 처박히는 첼시.

“......”

“......”

이를 목격한 노이만 버젯과 헬레나 발렌타인의 입이 쩍 벌어졌고.

오직 칼튼 에거시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저건 방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당해보기 전엔 알 수가 없다고. 저 괴물의 무시무시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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