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관문 요새에서 생긴 일(5)
#1
스노우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브롱코스에 탑승한 것은 아니었다.
가이아를 꺼내기에는 상대의 현재 수준(86)이 너무나 낮았고(어디까지나 스노우의 수준에서), 그렇다고 안티가나 포세이돈의 존재를 밝힐 수는 없었기에 선택한 기체가 브롱코스였을 뿐이다.
‘지금 당장은 별 볼 일 없지만, 잠재력만큼은 퍽 대단한 녀석이니 인연을 만들어 놔서 손해 볼 건 없겠지.’
속도와 관련된 버프 스킬을 죄다 사용한데다, 급성장한 중력 조절(C) 스킬에도 완벽하게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기간트 기동에서만큼은 무려 1800rp의 출력 차를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최초 일격을 얻어맞은 이후, 극도로 경계심이 상승한 테일러 포지가 방어적인 태세로 전환하자 이전처럼 화끈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건 불가능해졌고.
두 기간트의 대련은 작은 쪽의 일방적인 공세와 이를 방어해 내기 급급한 큰 쪽의 일방적인 수세로 흘러갔다.
“크윽...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딴 저등급 기간트로 이런 기동을...”
물론 저등급 기간트에 탑승하고도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고등급 기간트들을 연파한 실력자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이펜타르크 제국 최강의 오너인 발렌타인 공작이 제페토에 탑승 한 채 1500rp급 전후의 기체에 탑승한 맨드라미 기사단의 오너들을 박살 내는 걸 목격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도... 제페토는 엄연히 전투용 기간트였다고!’
외부 장갑까지 장착된 800rp급 제페토와 자신의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는 저 은빛 기간트 사이에는 차마 넘볼 수 없는 성능의 격차가 존재했다.
게다가 당시 맨드라미 기사단의 주력 기체였던 크로셋(1300rp)이나 스페노(1400rp), 보르테가(1500rp)와 테일러 포지의 첼시(2300rp) 역시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기간트가 아니던가.
‘대체 저 스노우라는 자는 어떻게 생겨먹은 괴물이길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식 밖의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테일러 포지.
하지만 그의 심리상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은빛 기간트는 폭풍 같은 공격을 퍼부어댈 뿐이었다.
간혹 전신에서 옅은 붉은빛을 뿜어내며 초고속 기동을 이어가는 자그마한 은빛 기간트와, 자세를 낮춘 채 틈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거대한 청색 기간트.
제국 서부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기간트 브롱코스가 좌우로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접근, 순식간에 자세를 푹 낮추며 마치 바닥을 쓸 듯 첼시의 굳건한 다리를 향해 오른쪽 다리를 휘둘렀다.
첼시의 오너인 테일러 포지 역시 괜히 제국의 기대주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듯,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브롱코스의 공격에 반응하며 공중으로 훌쩍 몸을 띄웠다.
콰아앙
첼시의 육중한 무게를 감당해내지 못한 대지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브롱코스가 곧바로 허공을 향해 몸을 띄우며 상체를 한껏 뒤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은빛 기간트의 유려한 뒤차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공중으로 떠오른 와중이었기에 움직임이 제약된 첼시가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브롱코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얼핏 보기에도 2배에 이르는 덩치 차.
하지만 속절없이 뒤로 밀린 것은 브롱코스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테일러 포지의 첼시였다.
“크으으...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위력은 뭐냐고!”
교차 된 첼시의 두 팔을 타격하기 직전, 순간적으로 기체의 무게를 3배로 증폭시킨 탓에 브롱코스의 덩치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격력이 발휘된 것이었지만, 이를 알 도리가 없는 테일러 포지의 입장에서는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서 밀려나 4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선 두 기의 기간트.
비록 500rp급에 불과한 브롱코스라고는 하나, 현재 능력치(93)가 S급(95 이상)에 가까워지고 있는 칼튼 에거시마저도 전력을 다해야만 간신히 승기를 잡을까 말까 한 수준이란 걸 감안한다면.
어렵게나마 브롱코스의 움직임에 반응해 내고 있는 테일러 포지의 재능 역시, 스노우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대단한 수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저스틴 크로비스에 비하면 이쪽이 훨씬 더 재능이 있는 것 같군.’
대련을 시작하기 전 스노우가 내린 판단에 의하면. 테일러 포지의 실력은 엘가드 왕국에서 만났던 대륙급 강자들은 물론, 왕국 전쟁에서 활약했던 마라몬트 왕국의 용병 에이스들에 비해서도 손색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용병 에이스 중 가장 낮은 능력치를 보유했었던 저스틴(발터) 크로비스와 동일한 현재 능력치를 보유하긴 했지만, 최대 잠재력(89 vs 95)과의 거리가 월등히 먼 테일러 포지가 그만큼 훈련을 등한시했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었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나?’
저스틴 크로비스와 동일한 현재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재능의 한계가 높은 탓인지 오히려 더 뛰어난 반응 속도와 움직임을 보이는 테일러 포지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는 훈련을 게을리한 오너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럼 대체 왜... 모르겠군. 뭐, 특이 체질이라도 되나 보지.’
사실 그의 사정이 어쨌건 스노우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잠시 멈췄던 버프 스킬들을 다시금 시전하며 대지를 박찼다.
타아앗
순식간에 40여 미터의 거리를 ‘0’으로 만들어 버린 브롱코스가 첼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잽과 스트레이트를 연거푸 꽂아 넣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터엉
콰아앙......
하지만 이미 브롱코스가 낼 수 있는 최대 스피드에 익숙해진 첼시의 오너 테일러 포지 역시, 빠르게 자세를 낮춘 채 스텝을 밟으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주먹질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중력 조절(C) 스킬로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워낙에 작고 가벼운 브롱코스의 주먹이 낼 수 있는 위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공세를 견뎌내던 테일러 포지의 재능(S급)이 한순간 빛을 발했다.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가드에 가로막히자 반사적으로 스텝을 밟으며 뒤로 빠지려는 브롱코스.
순간 전신에서 은은한 붉은빛을 발산하기 시작한 첼시가 살짝 뒤로 뺐던 오른발을 전력으로 박차며 튕기듯 앞으로 쏘아졌고.
찬란한 붉은빛으로 물든 롱소드를 앞으로 쭉 내뻗었다.
스노우가 예상치 못한 뛰어난 반격에 당황한 것도 잠시.
“실드! 실드!”
그가 반사적으로 시전한 실드가 브롱코스의 전면에 생성되었다.
시간의 한계로 두 개의 실드를 생성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고.
콰지직
콰지직
연달아 두 개의 실드를 분쇄한 첼시의 롱소드가 브롱코스의 본체를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두 개의 실드로 찰나의 시간을 벌 수 있었던 브롱코스가 뒤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고.
츠팟
무시무시한 마력의 불꽃을 토해내던 첼시의 롱소드는 브롱코스의 전신을 감싼 두터운 마력장에 그 위력이 격감하며, 오른쪽 가슴에 자그마한 흠집을 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성인의 검지 길이에 불과한, 기간트의 몸집에 비하면 아주 작은 흠집.
하지만 이것의 의미를 아는 이에게 있어, 이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일대의 대사건이었다.
“닿, 닿았어... 미친! 진짜로 닿았다고! 하, 나도 아직 성공시켜보지 못했는데!”
적어도 칼튼 에거시가 스노우라는 인간을 알게 된 이후로, 그의 기간트에 일격을... 아니, 손을 대는 데 성공한 존재는 북부 다르다넬 산맥에서 조우했던 재앙급 몬스터가 유일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넘치던 칼튼 에거시 본인조차도 브롱코스는커녕, 첼시에 탑승한 상태에서도도 스노우가 탄 기체에 손끝이나마 스쳐본 경험이 없었다.
이는 비단 칼튼 에거시뿐만이 아니라, 한 단계 위의 강자로 평가받는 드워프 최강의 오너나 엘프 왕국의 공주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제국의 젊은 기사가 그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칼튼 에거시의 시선이 검을 뻗은 채로 굳어있는 첼시에게서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린 브롱코스에게로 옮겨갔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에 난 작은 상처를 확인한 브롱코스.
이내, 숙였던 고개가 바로 세워졌고.
파아아앗
여태껏 맨손으로 일관하던 브롱코스의 오른손에 철퇴가 달린 기다란 봉, 플레일이 소환되었다.
그 이외에 겉으로 드러난 변화는 없었으나 칼튼 에거시는 알 수 있었다.
“화, 화났다. 저 양반 열받았다고! 거기, 공녀님!”
“......?”
의아한 표정으로 칼튼 에거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헬레나 발렌타인.
그녀는 그 대단한 용병 대장(그녀의 기억에는 그렇게 남아있었다)에게 일격을 먹이는 데 성공한 자신의 호위기사를 내심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용병 에이스 넷이 한꺼번에 덤비고도 털끝(기간트는 털이 없지만) 하나 건드릴 수 없었던 괴물이 아니던가.
그런 대단한 업적을 자신에 비해서도 한참 못 미치는 실력의 테일러 포지가 이루어낸 것이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의 재능은 진짜야. 장차 제국 최강의 오너가 될 자질이 있어.’
하지만 그녀의 뿌듯한 마음은 이어서 들려온 칼튼 에거시의 음성에 산산이 부서지고야 말았다.
“당장 대련을 중지시켜야 돼... 저 양반 화났다고! 당신네 애송이의 목숨이 위험해!”
다급히 브롱코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헬레나 발렌타인.
과연, 그녀가 보기에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는 브롱코스였다.
‘마, 막아야 해!’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헬레나 발렌타인이 다급히 옆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떻게 막죠?”
칼튼 에거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2
훈련장 외곽에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던 찰나.
브롱코스를 중심으로 뻗어 나온 얼음의 대지가 거대한 훈련장의 절반가량을 잠식했고.
이어서 대지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얼음덩어리들이 첼시와 브롱코스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챈 헬레나 발렌타인과 칼튼 에거시는 기겁했지만,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최악의 상황만은 벌어지지 않길 기도하는 것 이외엔.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설 사이로 얼핏 얼핏 보이는 거대한 손과 주먹 그리고 얼음송곳.
콰아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어엉
[이, 이게 대체... 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얼빠진 얼굴로 정면의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던 칼튼 에거시의 입이 열렸다.
“공녀님의 호위기사... 형님이 마검사란 사실을 몰랐나 본데?”
비슷한 표정의 헬레나 발렌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대화를 나누는 편은 아니라... 엄청난 실력의 오너라고만...”
칼튼 에거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아아아...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그러셨소. 뭐, 죽지만 않는다면 뭔가 얻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헬레나 발렌타인과 칼튼 에거시가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왠지 후련한 표정으로 훈련장을 벗어나는 스노우의 뒤로 전신에 지독한 상처들을 새긴 채 너부러진 청색 기간트의 모습이 보였다.
칼튼 에거시가 재빨리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설마...”
“쓸데없는 걱정이로군. 설마 대련 상대를 죽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 아까는 진짜 뭔 일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요. 그리고...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기 직전까지 팬 것 같은데...”
“사람은, 특히 기간트 오너쯤 되면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거야 패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여름의 끝 무렵.
이펜타르크 제국의 서부 관문 요새에서 생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