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황립 아카데미의 신임 교수(3)
#1
황립 아카데미 기사 학부 실전 파트 소속 정교수 브루노 힐과 부교수 타본 레바인.
두 사람은 거대한 실내 수련장의 중심으로부터 느껴지는 아찔한 존재감과 위압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 이건...’
한발 빨리 상황을 파악한 것은 역시나 능숙한 상급 엑스퍼트인 브루노 힐이었다.
‘어, 엄청난 마력이다! 아니, 그런데 대체 왜... 우리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두 사람이 느낀 강렬한 존재감과 위압감의 원인은 수련장의 중앙... 웬 몬스터에게 등을 기댄 채,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동대륙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이하리만치 짙고 섬뜩한 마력이었다.
황립 아카데미의 정교수씩이나 되는 브루노 힐이 최상급 엑스퍼트나 6서클 마법사를 만나 본 적 없을 리 만무했다.
당장 현 기사 학부의 학부장 월튼 후작이 최상급 엑스퍼트였고, 마법 학부와 엔지니어 학부의 두 수장 역시 6서클에 도달한 지 20년 이상 지난 마법사였다.
게다가 ‘히아신스관’의 전 주인 샌더슨 후작이나 스노우 이전의 실전 파트 수석 교수였었던 펠리스 백작 역시 최상급 엑스퍼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저런 식으로, 마치 뽐내기라도 하듯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상급 엑스퍼트의 극에도 이르지 못한 브루노 힐로서는, 대련이나 실전 훈련 시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마력을 단 한 톨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대,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설마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데... 저 자가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이유가 있나?’
무려 황립 아카데미의 핵심 중 핵심인 기간트 학부 실전 파트의 ‘수석 교수’라는 타이틀과, 거기에 더해진 발렌타인 공작의 직인이 찍힌 추천서만으로도 그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심지어 학장조차도) 없을 터였다.
아니, 만만하기는커녕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일 정도.
또로록
힐긋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직속 부교수를 바라본 브루노 힐이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정신 차리게, 타본. 어서 가서 인사드리도록 하지.”
그러자 얼빠진 표정으로 수련장 중앙의 몬스터와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타본 레바인이 화들짝 놀라며 앞서 걷기 시작한 상관의 뒤를 따랐다.
“허업! 네, 교수님!”
두 사람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자신들의 새로운 ‘수석교수’를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을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보던 스노우라는 이름의 동대륙인 수석교수는, 브루노 힐과 타본 레바인이 지척에 이른 순간까지도 어떠한 표정이나 자세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핀 브루노 힐이 입을 열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석교수님. 저는 수석교수님께서 관리하실 기간트 학부 실전 파트 소속 정교수 브루노 힐이라고 합니다.”
“부, 부교수 타본 레바인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석교수님!”
두 사람은 자신을 소개하며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
‘응?’
‘어...’
하지만 당연히 들려와야 할 답이 이어지지 않자 허리를 숙인 채로 당황해 버린 두 사람.
‘뭐, 뭐지? 혹시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건가? 동대륙에서는 금기시되는 어떤 동작이나 말을 무의식중에 해버렸다거나...’
‘허, 허리 아파... 오러를 돌려도 되나? 안 되겠지?’
그들의 당혹감이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쯤.
“반갑군.”
권태로움이 잔뜩 묻어있는 나지막한 음성이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슬그머니 신임 수석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허리를 바로 세우는 두 사람.
“아, 예... 저도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수석교수님!”
드디어 소문의 주인공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획득한 브루노 힐과 타본 레바인은 여전한 압박감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를 관찰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이곳을 찾아온 것은, 향후 강의 스케줄에 관한 신임 수석교수의 의향을 알아가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라는 인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캐내는 것 역시 두 사람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였다.
‘하필 앤더슨 그 자식이 내빼버리는 바람에...’
정교수 중 막내인 샬롯 윌러는 올 1월에 정교수 자리를 획득한 햇병아리였기에 애초에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길 수 없었고.
실전 파트 뿐만 아니라, 기간트 학부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경력(18년)을 지닌 (실전)파트장 클라크 보이드에게 일을 떠넘길 수도 없었다.
브루노 힐 자신보다 5년 늦게 황립 아카데미의 정교수로 부임한 플라워즈 백작가의 3남 앤서니 플라워즈야 말로 이 임무의 적임자였으나...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빨라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질 일을 직감한 앤서니 플라워즈가 아비의 와병을 핑계로 이틀 전 휴가를 떠나버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이 자리에 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막상 대면한 신임 수석교수는 그 무성한 소문들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왕지사 시작한 일을 헛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차분하게 ‘실전 파트’의 강의 스케줄을 브리핑해 나가기 시작하는 브루노 힐이었다.
“......정도가 지난 학기와 다를 뿐 대부분은 유사하게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학기인 만큼, 졸업시험을 앞둔 4학년들의 경우 원하는 이들에 한해 중급 기동 심화반을 운영하자는 제안이...”
스르륵
무려 20여 분 동안 묵묵히 설명을 듣고 있던 신임 수석교수가 천천히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만.”
제국 북부 귀족의 상징인 세 갈래 수염이 침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열변을 토하던 브루노 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곁에서 영상기록 마법 장치에 담긴 실전 파트 교수들의 강의 계획서를 열심히 넘기던 타본 레바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뭐야?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데? 아오...’
‘무, 무서워...’
워낙에 낮고 서늘한 음성이다 보니 더럭 겁부터 먹게 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임 수석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좋아, 훌륭하군. 모두 그대로 진행하도록.”
“네? 아니, 저 그게...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십니까? 수석교수님의 강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중 몇 개를 빼거나 강의 시간과 학점을 축소시켜야 하는...”
당황한 브루노 힐이 황급히 추가 설명을 이어가려 했으나, 그의 새로운 상관은 그저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 지난 학기처럼 정교수들이 의논해서 강의 스케줄을 완성하도록.”
“네? 그럼 수석교수님은...”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의 자세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수석교수가 말했다.
“훈련ㅂ... 학생들을 직접 확인한 이후 교육의 방향을 정하겠다. 교육 인원이나 방식 역시 그때 가서 정하도록 하지. 그러니...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더는 귀찮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알아들었나?”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한층 강렬해진 마력이 두 사람을 덮쳐왔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아래위로 흔드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2
황립 아카데미 입성 4일째.
발렌타인 공작가, 정확하게는 그 대단하다는 가문의 장녀인 헬레나 발렌타인과의 계약에 의해 3개월간 머무르게 된 이곳에서 배정받은 ‘히아신스관’이라는 이름의 숙소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저택이자 연구소였었던 지구의 집조차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뭐, 크기라면 그리 차이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인테리어쪽으로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군.’
지구의 건물도 세계에서 손 꼽히는 건축설계사와 국내 최고 대기업 건설사의 콜라보로 지어진 제법 멋들어진 건물이었지만, 드워프들의 기술과 제국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히아신스관’은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예술품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이곳에 입성한 지 4일째 되는 날,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온 건 내가 속하게 될 학부? 파트? 아무튼 그곳의 정교수와 부교수라는 자들이었다.
나는 이들과의 만남에 앞서, 3개월간의 평탄한 아카데미 생활을 위해 약간의 연출을 가미했다.
‘할 수 있지?’
묘오오오오오
심령으로 연결되어있는 내 물음에 몸길이를 2미터까지 부풀린(정확하게는 원래 크기에서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이지만) 토리가 잔망스런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마력을 사용해 스킬을 사용하거나 무기 혹은 신체를 강화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외부로 발산시키는 것만큼은 불가능했다.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정교수 브루노 힐과 나보다 살짝 어두운 피부색의 황인(그는 제국 귀족가의 남자와 사막 부족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인 20대 후반의 타본 레바인의 몸을 경직시킨 것은, 내 뒤편에 자리잡은 토리가 뿜어낸 야생성 짙은 마력이었다.
사실 이것은 토리의 권능에서 기인한 기예의 일종이었는데.
전투력 면에서는 사육장에 갇혀 있는 아나투레스는 물론, 북부 다르다넬 산맥에서 만난 나머지 세 가디언에 비해서도 다소 부족한 토리.
하지만 녀석은 무려 자유자재로 몸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수준급 권능이 존재했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달한 마력 제어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토리는 내 명령을 찰떡같이 알아들어 전신이 아닌, 내가 기대고 있는 복부의 일정부분을 통해서만 마력을 뿜어내는 기예를 선보였고.
이를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최상급 몬스터가 지닌 것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내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헬레나 발렌타인이 나에 대한 소문을 엄청나게 퍼뜨리겠다고 했으니. 이런 퍼포먼스를 추가해 어느 정도 소문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면, 나를 귀찮게 만드는 사건이나 인간은 대폭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어느 곳이든, 기선 제압이 중요한 법이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저게 대체 뭔 소리야?’
황립 아카데미의 3학기 강의 스케줄에 대한 브리핑이랍시고 브루노 힐이 주절거리는 말의 대부분을...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언어(C)’ 스킬 덕에 이미 익힌 지 오래인 하이델어(대륙 공용어)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오너가 ‘오버클럭’에 적응하는 과정을 무려 15개의 단계로 분류한 다음, 단계마다 각기 다른 훈련 방법을 적용해 0.01% 단위로 숙련도를 상승시키는 강의라던지.
초급과 중급(습득 가능자가 소수인 고급 기동은 아카데미 단계에서 익히지 않는다) 기동 각각에 무려 수백 개에 달하는 ‘패턴’을 만들어 더 많이 익힌 이에게 높은 학점을 주는 강의 같은...
도무지 왜 저런 쓸데없는 걸 가르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란 뜻이었다.
‘더 들어 봐야 귀만 아프겠군.’
결국 나는 브루노 힐의 열정적인 브리핑을 중단시켰다.
‘어차피 난 진짜 교수도 아니잖아.’
이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훈련병으로 등록이 가능한 건 최대 3명...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적(?)들이 의심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잠재력 있는 녀석들을 몇 정도 뽑아서 굴리는 게 좋겠군.’
저딴 복잡하기만 한 커리큘럼 100시간보다는...
훈련병 지정 이후.
서너 시간 정도 죽도록 굴리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게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