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토리와 아나투레스
#1
“그럼, 4일 뒤에 뵙겠습니다, 수석교수님.”
“뵈,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수석교수님!”
기간트 학부 실전 파트의 정교수와 부교수라는 자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인 다음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흐음...”
“헉!”
허깨비처럼 나타나 문을 열어주는 하플링 때문에 좀 놀란 것 같긴 했지만 뭐...
본래는 상시 문 안과 밖에 대기 중이었을 사용인들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식사를 가져다줄 때 이외엔 그 누구도 수련장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건 대부분 소환수인 하플링들의 몫이었다.
녀석들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뿐, 그에 버금가는 지성과 훨씬 더 섬세한 손재주를 지니고 있었기에 ‘사용인’으로서 매우 뛰어난 자질을 지닌 종족이라 할 수 있었다.
스르륵
나는 토리의 몸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뗀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뮤오오오오오오...
한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토리 역시 고양이 기지개를 켜며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지겨웠구나, 토리.”
묘오오오오
“그래, 잘 참았어.”
나는 토리의 회색 털을 쓰다듬으며 아공간에 넣어 두었던 커다란 고깃덩어리 하나를 꺼내 녀석의 입에 물려주었다.
찹찹찹찹...
신나게 블량슈(몸길이가 최대 7미터까지 자라는 4족 보행 초식 동물, 맛이 매우 뛰어난데다 사육이 불가능해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고개를 뜯는 토리를 놔둔 채 천천히 굳어있던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온전히 휴식을 취한 황립 아카데미 입성 첫날을 제외하면.
오늘까지 3일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히아신스관의 수련장에서 보냈다.
현재에 이르러, 강자와의 실전이 아니라면 성장이 거의 불가능해진 기간트 오너로서의 훈련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수련의 목표는 총 3가지였는데.
첫 번째 목표는 최근 들어 크게 성장한 본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토리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충성도를 높이는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 목표는...
“아나투레스 소환.”
[S-급 소환수 아나투레스를 소환합니다.]
파아아아아아앗
제법 강렬한 빛과 함께 8미터에 육박하는 금색 털복숭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인’이 새겨진 이후로는 사육장의 회복 효과가 적용된 덕분에 이전의 꼬질꼬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죽도록 얻어맞고 구른 탓에 누리끼리해졌던 털은 한올 한올 도색이라도 해놓은 듯 윤기가 좔좔 흐르는 황금색을 띠고 있었고.
얼굴을 비롯한 전신의 상처 역시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르르르르르르르...
생생한 몸 상태 덕분인지 두 눈에선 새빨간 안광이 번뜩였고.
거기에 더해 전신에서 매우 반항적인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아주 기가 살았군.”
묘오오오오오오오오!
어느새 블량슈 고기를 죄다 먹어 치운 뒤, 내 옆으로 다가와 전신의 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아나투레스를 노려보고 있는 토리.
사실 야생에서 마주친다면 아나투레스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게 뻔했지만, 주인인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인지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나투레스가 잔뜩 기세를 올리고, 토리가 전의(戰意)를 드러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 3일간,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목표(세번째 목표는 아나투레스의 충성도 상승)를 한꺼번에 이루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아나투레스 vs 스노우, 토리의 대련이었다.
3일간 수차례 벌어진 대련에서 모두 승리한 아나투레스는 한동안 쭈그러들었던 자존감이 회복된 듯 콧대를 높인 상황이었고.
수적 우세로 인해 간신히 대련다운 대련을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아나투레스에게 숱하게 두들겨 맞은 토리는 약이 바짝 올라 있는 상태였다.
나는 회색 털을 가시처럼 세운 채 살벌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정해, 토리. 기억하지? 그래도 오늘 아침엔 우리가 한 방 먹여줬잖아. 이번엔 좀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묘오오오오오오오오!
심령으로 연결된 탓에 내 의지를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토리.
녀석은 잔뜩 세웠던 털을 가라앉히며 내 몸에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심령으로 연결된 또 하나의 소환수 아나투레스는...
크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층 더 반항적인 기세를 흘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사실 이런 식이면 아나투레스의 충성도를 높이는 데 썩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어차피 잘해줘도 안 오르는데, 뭐...”
나라고 처음부터 이런 차별 대우를 하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각인 과정의 차이 때문인지, 아무리 좋은 먹이를 주고 잘 대해주려 해도 아나투레스의 충성도는 도통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충성도 36/100(83/100)]
각인 당시 아나투레스의 충성도는 33.
그러니까 현재까지 ‘3’이 올랐다는 뜻인데, 고작 30대의 낮은 충성도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지독할 정도로 느린 페이스였다.
게다가 충성도가 상승한 세 번의 상황을 되짚어 보면...
33 -> 34 : 안티가에게 죽도록 얻어터진 뒤 처음으로 ‘재생’ 스킬에 의해 치유 받았을 때.
34 -> 35 : 이펜타르크 제국 서부 관문 도착 전, 렘노스의 어느 산등성이에서 가이아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뒤 ‘재생’ 스킬에 의해 살아났을 때.
35 -> 36 : 황립 아카데미 도착 이틀 차, 소환되자마자 으르렁거리길래 안티가를 소환해 매타작을 벌인 후 사육장으로 돌려보냄. 5시간 후 재소환 하니 충성도 ‘1’ 상승.
이런 판국이니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은 모질게 다뤄야(패야) 충성도가 오른다.’
기간트를 이용해 그렇게 두들겨 팼음에도 기간트 탑승 시의 충성도가 82 -> 83으로 오른 것만 봐도 이것이 정답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반면 토리의 경우는...
[충성도 77/100(87/100)]
아나투레스보다 뒤늦게 테이밍되었음에도 충성도가 무려 8이나 상승했다.
두들겨 패기는커녕, 가끔은 맛있는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성도가 올랐으니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나투레스에 비해 기간트에 탑승한 채 교감(?)하는 시간이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간트 탑승 시의 충성도 역시 무려 ‘3’이나 상승한 상태.
‘하긴, 처음부터 덩치 큰 개냥이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
아무튼 이제 기간트 탑승 시 충성도를 3만 더 올리면 테이머 스킬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고유스킬 ‘스텟 공유’가 가능해진다.
물론 토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스텟을 지니고 있을 게 확실한 아나투레스 쪽이 ‘스텟 공유’의 대상으로 훨씬 더 적합할 테지만.
‘이쪽은 언제 충성도 90을 달성할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으니...’
사실 꼭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토리의 경우는 정석적인 ‘소환수’로 함께하는 편이 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교감 능력이 상당한데다 지능까지 뛰어난 녀석이었기에, 명령 수행 능력이 매우 탁월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리 이녀석...
‘사육장으로 역소환 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지.’
딱 한 번 사육장으로 역소환했을 때, 충성도가 하락하는 것은 물론 한동안 까칠하게 구는 걸 확인한 뒤로는 더 이상 사육장으로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의 권능과 뛰어난 마력 제어 능력으로 인해 애완동물로 위장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데다.
소환해두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뛰어난 마력 회복 속도 덕분에 시간당 고작 100(마력 총량 27399) 정도의 마력이 소모될 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오른손 검지에 끼고 있던 은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파아아아아아앗
강렬한 빛과 함께 검붉은색 드워프제 갑옷 ‘델토르’ 내 전신을 감쌌다.
사실 아무리 본신의 실력이 상승했다 한들, 방어력을 몇 곱절로 상승시키는 이 갑옷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나투레스와 제대로 된 대련을 치르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크르르르르르르르르...
묘오오오오오오오오...
델토르의 소환이 대련의 시작이라는 것을 학습한 두 최상급 몬스터가 나직한 울음과 함께 전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내 시작된 것은 어지간한 상급 엑스퍼트조차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초신속의 세계에서의 전투였다.
파츳
뮤오오오오오오!
대련 시작 이후 대략 20분.
잔상조차 제대로 남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아나투레스의 손톱이 토리의 뒷다리를 스쳤다.
무려 20여 분 만에 양측을 통틀어 처음으로 터진 유효타였고.
이것만으로도 대련의 양상이 꽤나 박빙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고작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상처를 입었었지.’
하지만 1분이든 10분이든 유효타는 유효타였다.
속도나 공격력에 비해 비교적 방어력이 낮은 토리의 다리에서 선혈이 튀었다.
“힐! 힐! 힐! 리프레쉬!”
비교적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테이머(A) 특성의 고유스킬 ‘재생(A)’ 대신, 효과는 떨어지지만 즉발기인 ‘힐(C)’ 스킬을 상처 부위에 퍼부었고. 덤으로 지친 토리의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리프레쉬(C)’ 스킬까지 시전했다.
비록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로 시전하는 스킬의 위력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한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최상급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리 역시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속도 하나만큼은 아나투레스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는 토리가 끊임없이 녀석의 어그로를 끌었고.
“그리스, 바인딩, 록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
온갖 버프를 두르고서야 간신히 두 괴물의 움직임의 끝자락이나마 잡을 수 있었던 나는, 토리가 만들어낸 아주 작은 틈을 노려 스킬 폭격을 퍼부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벌써 몇 번이나 합을 맞춘 토리와의 합공은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스킬 폭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몸을 반전시킨 토리가 아나투레스를 향해 달려들었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탓에 또다시 상처를 입고 말았지만, 덕분에 몇 개의 공격이 아나투레스의 몸에 적중했다.
물론, 기간트에 탑승하지 않은 채로 시전한 스킬이 최상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아나투레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대련을 위해 안티가의 무기 슬롯에서 빼 온 알브레하트의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500, 1000, 1500, 2000......
무려 2000의 마력을 잡아먹고도 고작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천고의 아티펙트를 그대로 아나투레스를 향해 내뻗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순식간에 길이가 늘어나는 알브레하트의 지팡이.
크롹!
토리의 몸통을 걷어차는 순간, 자신의 머리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들어오는 길쭉한 막대기에 화들짝 놀란 아나투레스가 황급히 대지를 박차며 몸을 피했고.
“쳇...”
회심의 일격이 빗나갔지만, 아나투레스가 크게 거리를 벌린 덕분에 짧게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힐! 힐! 힐! 힐!”
그리고 나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어느새 울상을 한 채 다가온 토리의 상처를 치료했다.
묘오오오오오오...
하지만 녀석의 커다란 얼굴이 울상이 되어버린 이상,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했다.
“알았어, 이 녀석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확실히 승부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또 한 번의 사실상 패배.
덕분에 아나투레스가 한층 더 기세등등해진 꼴이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S-급 소환수 아나투레스의 충성도가 상승합니다.]
[충성도 37/100(83/100)]
뜬금없이 상승한 충성도로 인해 조금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완전 제멋대로잖아? 대체 충성도가 상승하는 기준이 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