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54화 (154/169)

154화 신임 수석교수의 실력(2)

#1

현재 내가 머무는 히아신스관과 지구에서 살던 대저택 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거 목적 이외의 공간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구의 경우 대저택 면적의 70%가량을 ‘전용 탈 것’을 개발하기 위한 개인 연구소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곳 히아신스관은 무려 기간트 대련이 가능한 실내 수련장이 전체 건물의 2/3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립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 중 가장 중요한 사안이 제국의 기둥이 될 ‘오너’의 양성이기도 했으니.

아카데미 내의 가장 특별한 숙소인 히아신스관에 머물게 될 이 역시 오너일 확률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었고, 그를 위한 수련장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련장에서 한바탕 땀을 흘린 나는 최신식 시설(오르비스 대륙 기준)이 갖춰진 샤워실에서 몸을 씻은 뒤.

실피드를 소환해 순식간에 몸을 말린 다음 속옷만 입은 채 수백 벌의 의상이 비치되어있는 방으로 향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내게 양해를 구한 몇몇 사용인들이 달라붙어 몸의 치수를 확인해 가더니, 그날의 해가 저물기도 전에 20여 평이 넘는 방 하나가 아카데미의 교수 정복을 비롯한 수백 벌의 옷들로 가득 채워졌었다.

나는 그중 활동하기 편할 듯한 아래위 한 벌의 검은색 활동복을 꺼내입었다.

일종의 트레이닝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멋진 옷이었지만)이라 조금 고민이 되긴 했지만, 드레스 코드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으리라.

드레스룸을 벗어난 나는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 벗어두었던 반지(델토르)와 팔찌(가이아)를 각각 오른손 검지와 왼쪽 손목에 찼다.

아무래도 수석교수로서의 첫 공식 석상인 만큼, 훈련용 기간트 브롱코스보다는 가이아의 네스트를 착용하기로 한 것이다.

묘오오오오오오...

반지와 팔찌를 놓아둔 선반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토리가 나른한 울음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토리도 나도 일주일만의 외출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일주일 전 통과했었던 건물의 현관으로 향했다.

뚜벅뚜벅뚜벅......

츠츠츠츠츠츠......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토리의 외형은 영락없는 평범한 회색 먼치킨 고양이였지만, 목 주위를 빼곡하게 뒤덮은 검은 갈기로 인해 발산되는 강렬한 개성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스르르륵

현관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히아신스관의 현관문 앞에는 십수 명의 사용인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들의 대표격인 귀족 부인(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 부인이었다)이 천천히 허리를 숙이자 나머지 사용인들 역시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수석교수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그녀의 매우 우아한 목소리였다.

“정문 앞에 마차와 하버 부교수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수석교수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역시나 우아함이 넘치는 자세로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대강당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네?”

“그쪽...”

“마틸다라 편히 불러주신다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수석교수님.”

“그래, 마틸다. 당신의 걸음으로 대강당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제 걸음으로는 대략 20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20분? 그렇다면 오래간만에 하는 외출이니...

“적당하군. 걷겠다.”

“네? 아, 네. 즉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석교수님.”

귀족 부인 마틸다의 눈짓을 받은 남자 사용인 하나가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정문까지 모시겠습니다, 수석교수님.”

부담스러울 정도로 깍듯한 태도.

어머니뻘은 될듯한 여자에게 하대하는 게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닌 오르비스 대륙이었다.

‘이곳에는 이곳만의 질서와 규칙이 있는 거니까... 쩝.’

현관에서 정문까지는 고작 100여 미터 남짓한 거리였기에 안내까지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이 역시 그녀의 일일 터였기에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마틸다와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선 히아신스관.

어느새 마차를 치워버렸는지, 정문 앞에는 키가 2미터에 가까운 젊은 부교수 게일 하버만이 멀뚱히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가 해맑게 웃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수석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수석교수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답했다.

“대강당으로 가지.”

“넵!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수석교수님!”

“말끝마다 수석교수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조금 전 마틸다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수석교수란 말을 강조한단 말이지.

“아, 넵!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흐흐흐...”

멋쩍게 웃은 게일 하버가 뒤통수를 긁적인 뒤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옆을 흘깃 바라보자.

묘오오오오오오...

눈을 맞추며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내는 토리.

나는 피식 실소를 흘린 뒤 녀석과 함께 껑충한 키의 게일 하버의 뒤를 따랐다.

#2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 내부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바글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이펜타르크 제국 황립 아카데미의 대강당이었고.

곧 있으면 치러질 개학식을 위해 5000명이 넘는 학생들과 400여 명의 교직원들이 운집한 상태였다.

대강당에는 각자의 개성을 지닌 수천 명이 모여있었으나, 그 수천 인원이 대화의 주제로 삼은 것은 대부분 똑같은 대상에 관한 것이었다.

5년 만에 부임한 신임 수석교수.

제국의 명망 높은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대부분인 이곳 황립 아카데미에서도 ‘수석교수’라는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설만 한 파괴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것도 아카데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너 지망생’들의 성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기간트 학부 실전 파트의 수석교수였으니.

그 영향력은 이룰 말할 수 없이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나 대중의 관심이 쏠리면 쏠릴수록, 그에 관한 부정적인 반응 역시 반드시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젠장, 수석교수라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직책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받아봐야, 그자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말짱 헛수고란 소리잖아.”

엔리케 백작의 3남 루이스 엔리케.

황립 아카데미 2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방학 기간 고향에서의 꿀 같은 휴식을 마치고 복귀한 기숙사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무려 자신이 입학하기도 전에 사라졌던 ‘수석교수’직의 부활.

그리고 그 수석교수가 ‘실전 파트’의 모든 성적을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말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이스 엔리케는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5번의 학기동안 단 한 번도 기간트 학부의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우등생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지의 후계자는 자신보다 11살이나 많은 큰형의 차지가 될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기에.

그의 목표는 백작인 아버지로부터 적당한 독립 자금을 뜯어낸 뒤 황실 근위기사단에 입단, 언젠가 새로운 성을 하사받아 자신만의 가문의 일구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4학년까지 내내 수석의 자리를 지켜 낼 수 있다면, 이는 결코 불가능한 꿈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2등과의 차이로 인해 예민해져 있는 루이스 엔리케였기에, 절대적인 변수라 할 수 있는 수석교수의 등장이 결코 달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거... 아버지에게 부탁드려야 하나? 제대로 한 번 인사를 드려달라고.’

루이스 엔리케의 가문인 엔리케 백작가는 제국 중동부의 알토란 같은 곡창지대를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고, 황립 아카데미에 자식을 입학시킨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매 학기 그를 담당하는 교수들과 그 윗선들에게 상당한 ‘성의’를 표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제국의 기조는 이런 성의 표시에 매우 관대한 편이었고, 그런 이유로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듯한 인식이 박혀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대놓고 ‘부정’을 저지를 경우, 그에 대한 처벌 역시 매우 무거운 편이었기에 티가 날 정도로 성적을 조작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이 또한 사람의 일이었기에, ‘성의’에 대해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고.

아주 사소한 정도의... 이를테면 거의 엇비슷한 성적을 기록한 학생의 등수를 나눠야 할 경우, 이전에 받았었던 ‘성의’의 크기가 개입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용인되는 수준이었다.

사실 루이스 엔리케는 이런 성의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성적을 기록했었기에 그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지만...

‘대놓고 성적을 조작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니...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냐고.’

꼴찌 학생에게 ‘숨겨진 가능성이 있다’라는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수석 자리를 준다 한들(물론 그런 미친 짓을 한 예는 없었지만),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는 아카데미 내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바로 ‘수석교수’라는 존재였다.

게다가 엔리케 백작가가 부유한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제국 전체로 따지면 그보다 부유한 가문이 적어도 20개는 넘을 터였다.

‘빌어먹을 마르퀴즈나 재수 없는 키지르라면 수석교수란 놈을 매수하고도 남는다.’

당장 각각 후작가와 백작가의 자제인 학년 순위 5위권의 두 녀석만 보더라도, 자신보다 더욱 커다란 부를 소유한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리즈 엘리엇, 그 맹랑한 계집애의 가문이 가난한 남작가라는 사실이지.’

무려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16세에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리즈 엘리엇. 그녀는 작은 체구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능을 드러내며 5학기 내내 루이스 엔리케에 이어 차석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천재였다.

게다가 1학년 1학기에는 40점 이상 벌어져 있었던 최종 성적(500점 만점)이, 2학년 2학기에는 고작 13점 차이로 좁혀져 버린 상황이라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루이스 엔리케가 이런저런 불길한 상념에 인상을 구기고 있자, 그의 절친인 홉킨스 백작가의 차남 빅터 홉킨스와 캐틀러 백작가의 장녀 에밀리 캐틀러가 그에게 다가왔다.

루이스 엔리케의 어깨에 손을 올린 빅터 홉킨스가 말했다.

“루이스, 왜 아침부터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냐?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빅터 홉킨스는 190가량의 신장에 100kg에 가까운 몸무게를 지닌 당당한 체구의 청년으로, 19세인 현재 이미 초급 엑스퍼트의 끝자락에 달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검사였다.

오너로서의 재능은 대충 중상위권이었으나, 뛰어난 본신의 무력으로 인해 언제나 10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우등생.

비교적 가까운 곳에 서로의 영지가 위치한 관계로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서로에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빅터 홉킨스의 옆에 선 아름다운 소녀 에밀리 캐틀러는 그의 약혼녀였다.

양쪽 눈꼬리가 위를 향하고 있어 조금은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뻔하지, 뭐. 또 혼자서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루이스?”

“쓸데없다니...”

“역시, 에밀리야! 아주 정확해!”

“고마워, 빅터. 루이스 넌 이걸 알아야 해. 생각이 많은 남자는 음침해 보여. 그리고 음침한 남자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법이라고.”

루이스 엔리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친구 커플을 바라보았다.

“제발 너희 둘 다 저리 꺼...”

이내 발끈한 그가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웅성웅성웅성웅성...

높다란 단상으로 통하는 문에서 처음 보는 얼굴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고.

기간트 학부의 정교수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앗, 저 사람이 소문의 신임 수석교수?”

“헉, 그런데 저건...”

에밀리 케틀러와 빅터 홉킨스가 단상 위에 등장한 인물을 보며 탄성을 토해냈고, 루이스 엔리케 역시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도, 동대륙인?”

오르비스 대륙 서부의 끝자락에 위치한 사막지대에도 황인종이 살고 있기는 했지만 분위기에서 풍겨오는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저자는 사막 부족 같은 게 아니었다.

루이스 엔리케가 생애 딱 한 번 목격한 바 있었던...

동대륙인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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