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56화 (156/169)

156화 신임 수석교수의 실력(4)

#1

황립 아카데미 대강당.

벌써 다섯 번째 맞이하는 개학식의 고리타분한 식순에 지겨워진 리즈 엘리엇은 애꿎은 대강당의 바닥을 발로 툭툭 차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쳇, 하여간 꼰대들... 대체 무슨 할 말들이 저리 많은 거야.”

160cm가 될까 말까 한 신장에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 거기에 아무리 많이 쳐줘도 10대 중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의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놀랍게도 황립 아카데미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기간트 학부의 2학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작은 신장을 배려한 것인지 가장 앞줄에 서 있는 그녀의 뒤편으로는, 대부분 그녀보다 20~30cm 이상 큰 신장을 지닌 건장한 체구의 남학생들이 쭉 도열 해 있는 상태였다.

리즈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작은 체구로 인해 가장 앞줄에 서 있던 그녀의 친구(이자 언니) 올리비아 그레이스가 말했다.

“조금만 참아, 리즈. 학장님 말씀만 끝나면 개학식은 끝이잖니. 끝나면 네가 좋아하는 브레딘 아저씨네 망고 빙수 사줄게.”

똑같이 제일 앞 열에 서 있다고는 하지만, 리즈 엘리엇보다 5cm는 큰데다 나이마저 2살이나 많은 올리비아 그레이스는 마치 친언니처럼 투덜거리는 그녀를 다독였다.

그런 올리비아 그레이스를 흘깃 노려본 리즈 엘리엇이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난 어린애가 아니야, 올리비아. 더 이상 망고 빙수 하나에 헬레레 널 따라나서던 작년의 내가 아니라고!”

“음, 그렇다기엔... 지난 학기에도 나와 함께 다섯 번이나 브레딘 아저씨네 가게를...”

“아무튼! 더이상 날 어린아이 취급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어.”

“그럼 망고 빙수를 먹으러 함께 가지 않겠다는 거니?”

“우이씨... 그게 아니라! 마, 망고 빙수를 먹으러 가는 건...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올리비아 그레이스는 자상하게 웃으며 리즈 엘리엇의 붉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먹으러 가겠다는 말이지, 리즈?”

잠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리즈 엘리엇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볼멘소리로 답했다.

“...그러던가...”

리즈 엘리엇의 시선이 다른 방향을 향하자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던 올리비아 그레이스의 얼굴에 일순간 안타까움이 서렸다.

제국 남부의 가난한 남작가 출신인 리즈 엘리엇과, 그와 인접한 곳에 3개의 영지를 아우르는 자작령을 소유한 그레이스 자작가의 영애 올리비아 그레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리즈 엘리엇의 아버지인 엘리엇 남작은 평민 출신의 기사로 혁혁한 공을 세워 작위를 하사받았으나, 황실이나 고위 귀족가에 이렇다 할 끈이 없었던 관계로 고작 수백의 영지민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얼마간의 땅덩어리가 전부인 영지를 소유하게 된 인물이었다.

비록 형편없는 영지를 소유한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전장에서 쌓은 적지 않은 명성과 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상위권에 이르는 출중한 실력, 결정적으로 2000rp급 기간트 크루거의 현역 오너라는 위치로 인해 주변 영주들은 결코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올리비아 그레이스의 아버지인 그레이스 자작은 유독 엘리엇 남작가의 저력을 높게 평가했고. 그의 가문이 남부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꾸준한 친분을 유지하며 결국 두 가문은 혼담이 오고 가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혼담의 주인공이 바로 자작가 영애 올리비아 그레이스와 리즈 엘리엇의 오빠이자 황립 아카데미 4학년에 재학 중인 조슈아 엘리엇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두 사람은 사실상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엘리엇 남매의 어머니는 조슈아가 6살, 리즈가 3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기에.

남부에 정착한 이후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 정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올리비아 그레이스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짙을 수밖에 없는 리즈 엘리엇이었다.

올리비아 그레이스 역시 그러한 성향이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아직은 19살 귀족 영애에 불과했기에 리즈 엘리엇의 투정을 온전히 받아주는 것 이외의 대처 방안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후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검이나 휘둘렀으면 좋겠다.’

올리비아 그레이스가 엘리앗 남작가의 남매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가 여타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게 검을 다루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었다.

특히나 상인으로서 거대한 부를 일구어내 끝내 귀족 작위까지 획득한 가문답게, 대부분의 구성원이 몸보다는 펜과 머리를 굴리는 일에 재능을 보이는 그레이스 자작가였기에.

검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 올리비아 그레이스는 가문 내에서 돌연변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검에 대한 재능으로 소문이 자자한 엘리엇 남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상급 엑스퍼트 상위권인 아버지를 뛰어넘을 것이라 예상되는 천재 엑스퍼트 조슈아 엘리엇.

기간트 조종술의 재능으로만 따지면 현 황립 아카데미의 재학생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 예비 오너 리즈 엘리엇.

엘리엇 남매는 수천 명의 귀족 자제들이 모여 있는 이곳 황립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사들이었고.

덕분에 꽤 훌륭한 재능을 지닌 올리비아 그레이스였음에도.

곁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두 재능으로 인해, 스포트라이트에서 한발 비켜선 채 그녀가 원하는 조용한 아카데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신임 수석교수라는 사람은 말을 좀 재미있게 하지 않았어?”

어느새 커다란 눈을 올망졸망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리즈 엘리엇으로 인해 답답했던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아 버리는 올리비아 그레이스.

그녀는 다시 한번 리즈 엘리엇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난 좀 별로였어.”

“응? 왜? 왜 별로였는데, 올리비아?”

“아무리 수석교수라고 해도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뜸 반말을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잘하는 애들 몇몇만 뽑아서 특별 교육을 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너무 거만해 보이는 분위기도 그렇고. 또...”

“잠깐! 잠깐만 올리비아!”

“응?”

“지금 완전 꼰대 같은 거 알아?”

“뭐어어어?”

“나한테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한 건 올리비아였잖아. 그런데 아주 잠깐 본 걸로 그렇게 사람을 매도하다니...”

“아니, 그건...”

아예 몸을 돌려 올리비아 그레이스를 향하게 한 리즈 엘리엇이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단상 위와 아래에 있던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눈치를 주었지만 이에 아랑곳할 그녀가 아니었다.

“뭐, 반말이나 거만한 분위기는 개인의 취향 차이니 그렇다고 쳐. 그런데 말이야, 그는 잘하는 학생 몇몇을 뽑아서 가르치겠다고 한 적은 없어. 그저 다른 교수의 강의에 참관한 다음 자기 마음대로 뽑겠다고 했을 뿐이라고.”

“그렇긴 하지만... 그럼 당연히 잘하는 학생을 뽑지 않을까?”

“그건 알 수 없지. 혹시 알아? 천재적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 꼴찌를 일등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음...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한 인간은 없어, 리즈.”

“그렇지? 근데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럼?”

“중요한 건 내가 반드시 저 수석교수가 말한 3인에 뽑혀야 한다는 거지.”

“뭐? 아니, 네가 왜? 지금도 네 성적은...”

이제는 숫제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올리비아 그레이스를 올려다보는 리즈 엘리엇.

“쯧, 올리비아는 융통성이라는 걸 가져야 해. 내가 실전 파트 이외의 강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서 그래?”

“아...”

“이제 알겠어? 수석교수의 강의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지긋지긋한 이론 강의들은 죄다 빼먹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리즈 엘리엇에게 납득당하고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리즈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 대단한 실기 성적을 이론으로 죄다 까먹고도... 학년 차석을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리즈 네가 저 수석교수에게 배울 게 있을까? 아무래도 한 학기 내내 대련이나 실전 위주의 강의만 할 것 같은데.”

직접 기간트를 움직이는 거라면 이미 4학년은커녕 조교수 중에서도 적수가 거의 없는 리즈 엘리엇이었다.

만약 평균 이하인 본신의 피지컬 이슈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부교수(대체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오너)들 수준에 도달해 있으리란 평가를 받는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니던가.

리즈 엘리엇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올리비아 그레이스의 물음에 답했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상관없어. 어차피 다른 사람의 가르침으로 발전할 수 있는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나버렸으니까.”

리즈 엘리엇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현 기간트 학부 실전 파트의 교수들조차,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본신의 피지컬 단련과 오러 임브레스 수련 그리고 실전 경험뿐이라는 것을 인정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수석교수에게 배울 것이 없다 한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지긋지긋한 이론 파트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가 말한 ‘3인’에 뽑히고 싶은 것뿐이었으니까.

‘뭐, 솔직히 뽑히지 못하면 조금 아쉽긴 하겠네.’

그러니까 딱 그정도였을 뿐이었다.

뽑히면 좋고, 뽑히지 않으면 조금 아쉬울 뿐인.

적어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인 부학장과 수석교수의 이벤트(?) 대련을 관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쳤다... 개학날부터 이게 무슨 일이래?”

“그나저나 괜찮은 건가? 상대는 그 아르헨 베를리오스님이라고.”

“상대가 될 리 없지. 부학장님은 크샨트의 ‘바흐만 기사단’을 홀로 상대해 킬 포인트 일곱 개를 기록한 실력자라고.”

“모르는 소리. 너 황립 아카데미의 수석교수가 어떤 자린지 모르냐? 그것도 기간트 학부 실전 파트의 수석교수라고. 지금껏 그 자리를 거쳐 간 인물 중에 부학장님만 못한 이는 단 한 명도......”

말 그대로 대이동이었다.

대강당을 가득 메웠던 수천의 인원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아카데미의 중심에 위치한 콜로세움(실내 대련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통해 엄청난 소란이 일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예정에 없던 이벤트를 준비해야 하는 관계자들만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

무려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콜레세움의 관중석에 6000에 가까운 인파가 각학년 별로 자리를 잡았다.

리즈 엘리엇과 올리비아 그레이스 역시 관중석의 제일 앞 열에서 대련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제국 오너 서열 20위권 이내의 강자와 베일에 가려진 ‘수석교수’의 대결이었기에 차분한 성격의 올리비아 그레이스조차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리즈 엘리엇의 반응은 조금은 시큰둥한 편이었는데.

“왜 그러니, 리즈? 기대되지 않니? 엄청난 실력자들의 대결이잖아.”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리즈 엘리엇이 답했다.

“그거야 어느 정도 비슷한 실력일 경우에나 그렇지. 부학장님은 진짜 괴물이란 말이야. 아무리 수석교수라 해도 상대가 될 리 없어.”

무시무시한 재능을 지닌 만큼, 안목이나 감각 역시 뛰어날 수밖에 없는 리즈 엘리엇이었다.

어린 시절 리즈 엘리엇을 둘러싼 자그마한 세계에서, 최강의 오너는 누가 뭐라 해도 그녀의 아버지 엘리엇 남작이었다.

하지만 그 자그마하던 세계가 황립 아카데미라는 커다란 범위로 확장된 이후,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판단되는 오너를 적어도 10명 이상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오너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던 이가 바로 부학장인 아르헨 베를리오스 백작이었다.

‘아버지가 열 명이 있어도 상대가 될까 말까 한 괴물.’

딱 한 번, 부학장이 아카데미의 정교수 다섯을 상대로 시범 대련을 선보였었던 날.

그녀는 그의 강력함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리즈 엘리엇의 목표는 언제나 변함없이 부학장 아르헨 베를리오스였다.

“절대로, 상대가 될 리가...”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쿠우우우우우우우웅

“............!”

타격 장면은 볼 수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라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소리로 판단하건데 단 한 번의 격돌이 있었고.

그 격돌의 결과...

헤드 부분이 날아가 버린 채, 콜로세움의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버린 것은 무려 출력 2700rp를 자랑하는 초고등급 기간트 크루거였다.

그리고 그 기간트의 주인은 제국 오너 서열 14위의 초강자 아르헨 베를리오스 부학장이었다.

“마, 마, 마, 마, 말도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리즈 엘리엇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고요한 콜로세움의 허공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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