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신임 수석교수의 실력(5)
#1
190cm 전후의 신장, 치렁치렁 무언가가 잔뜩 달린 제국 귀족의 예복을 입고 있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압도적인 근육.
아르헨 베를리오스라는 이름의 황립 아카데미 부학장의 외형은 교육자라기보다는 확실히 전장에서 닳고 닳은 전사 쪽에 가까워 보였다.
‘저 우스꽝스러운 옷이랑 깔끔하게 정리된 수염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베테랑 용병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그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는 잘 정련된 기사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거친 용병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는 뜻이다.
어쩌면 부학장이라는 직함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의 진정한 임무는 수많은 귀족(황족 포함) 자제들이 머무는 황립 아카데미의 보호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교육용 기간트(출력 400~700rp)를 제외한 43기의 기간트 부대를 이끄는 경비 병력의 수장쯤 되는 위치랄까?
‘내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이곳에서 적수가 없을 듯한 강자를 눌러버린다면, 3개월간의 아카데미 생활이 한층 편해지리란 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뭐, 이유 따윈 알고 싶지도 않고.’
나는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린 다음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거참, 한 판 붙자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기간트 대련을 할 만한 장소 정도는 있겠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아르헨 베를리오스가 음성 증폭 장치에서 입을 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긴 황립 아카데미다.”
“그래서?”
“그런 장소는 널리고 널렸다는 뜻이지. 단, 너와 나의 대련을 모두가 지켜볼 수 있도록 장소는 트라비아 콜로세움으로 정하겠다.”
“뭐, 어디건 좋을 대로 해. 대신,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잘려 나가더라도 서로 원망하는 일은 없도록 하지.”
“큭, 시원시원한 것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대체 무슨 의도로 싸움을 걸어오는 건지는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차피 대륙 최강이라는 이펜타르크 제국의 기간트 오너들의 수준이 궁금하던 차였다.
‘칼튼 녀석보다는 강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
한동안 여정을 함께한 칼튼 에거시는 황립 아카데미가 위치한 오베이트시의 성문 앞에서 헤어져 조국인 나이만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특별 훈련(을 빙자한 실험)을 이어왔던 녀석은, 체감상 드워프 왕국에서 처음 마주쳤을 적에 비해 족히 1.5배는 강해진 상태였다.
그만큼 현재 능력치 90대에서 수치 ‘1’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능력치 자체는 ‘93’으로 상승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변화가 없었지만. 훈련 때마다 얻어맞지 않기 위해 발악했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야말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높은 기동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에 비해 이 자는...’
본신의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현재의 칼튼 에거시가 최소 3명은 있어야 비벼볼 만한 강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아르헨 베를리오스(A-) : 58세, 이펜타르크 제국 황립 아카데미 부학장, 제국 오너 서열 10위권의 최상급 엑스퍼트
191cm, 99kg
파일럿 재능 ? 85/85(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안티가(B-) - 숙련도 0/100
크로스보우(B+) - 숙련도 0/100
가이아(A-) - 숙련도 0/100]
아슬아슬하게 잠재력 A등급(86~90)을 획득하지 못한 A-급 재능의 소유자였고. 이미 60세에 가까운 나이인 만큼(최상급 엑스퍼트로서 전성기의 끝 무렵이라 할 만한 나이) 한계까지 능력을 개화시키기는 했지만, 현재 능력치 85와 93(칼튼 에거시) 간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했다.
이는 제아무리 본신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한 오너가 좁힐 수 있을 만한 격차가 아니었다.
‘그래도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인데다, 엄청난 기간트를 가지고 있으니 제법 오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가지 착각을 하고 말았다.
지난 몇 주간, 오직 500rp급 기간트 브롱코스만을 사용했었던 관계로 녀석의 네스트인 은빛 팔찌를 내내 착용하고 있었고(동기화를 진행하지 않았기에 격납고에 수납할 수 없다).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기간트 크루거(2700rp, 이펜타르크제)의 선전을 예상한 이유 역시, 내가 탑승할 기간트가 브롱코스라는 가정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콜로세움.
경기장 중앙으로 집중된 수천의 관중의 시선.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손목에 찬 네스트에 마력을 불어넣자 소환된 것은...
파아아아아앗
“어? 아...”
타오르는 불꽃처럼 새빨간 신체와 어깨 위로 삐죽 솟은 포신이 인상적인 1700rp급 기간트 가이아였다.
“그러고 보니 숙소를 나올 때... 네스트를 바꿔 찼었군.”
#2
가이아에 마지막으로 탑승한 것은 북부 다르다넬 산맥에서 재앙급 몬스터를 사냥했을 당시였다.
그 이후로 탑승한 기체는 대부분 브롱코스였고, 아주 가끔 안티가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물론, 제대로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아나투레스의 교육을 위해 몇 차례 가이아를 소환한 바가 있긴 했지만.
파일럿 특성의 고유스킬 ‘원격조종(S)’만으로도 통제가 어렵지 않았었기에 탑승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뭐, 상대에겐 조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다른 오너들에 비해 본신의 실력 상승이 몇 배의 효율을 보이는 ‘파일럿(S)’ 특성 각성자였기에, 현재의 내 실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스스로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지난 몇 달간의 경험으로 인해 지구에 있을 때보다 이미 몇 배나 강해져 버렸던 데다. 황립 아카데미에 도착한 이후, 일주일 내내 최상급 몬스터들과 드잡이질을 벌이며 또 한 번의 스팩업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몸통은 노리지 말아야겠군.’
콕피트가 위치한 몸통이 꿰뚫리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아르헨 베를리오스가 죽어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를 다짐(상대 기간트와 가이아의 사이에는 무려 출력 1000rp라는 어마어마한 갭이 존재한다)을 하며 탑승 주문을 외웠다.
“테리마.”
오랜만에 탑승한 가이아의 콕피트.
그 안을 가득 채운 새하얀 알갱이(화이트 스펀)들이 기분 좋은 압박감을 선사한다.
나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려 7.5미터짜리 강철 거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기분 좋은 엔진 가동음과 함께 두 눈에서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하는 가이아.
이에 맞춰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등장한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크루거 역시 붉은빛 안광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오, 제법 멋진 녀석이로군.”
무려 출력이 2700rp에 달하는 제국의 초고등급 기간트인 만큼, 이제까지 거쳐온 전장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체였다.
신장은 대략 8미터 정도였고, 그간 보아왔던 제국의 벨런스형 기체들보다 조금 더 날렵한 몸매를 지닌 것으로 보아 무게는 대략 9톤 전후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전체적으로 광택을 죽인 검은색 베이스에 마치 온몸을 휘감듯 수놓아진 보라색 문양(전설상에 등장하는 신수 크루거)은 외형이 투박하기로 유명한 이펜타르크제 기간트답지 않은 멋스러움을 자랑했다.
“의뢰의 보상으로 저걸 달라고 해볼까?”
헬레나 발렌타인이 발렌타인 공작가의 이름으로 약속한 이번 의뢰의 보상은 2500rp급 기간트였다.
물론 2500rp를 넘어가는 순간 고등급이라는 수식어 앞에 ‘초’라는 글자 하나가 더해지는 만큼, 두 기체 간에는 제법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우기면 받아낼 수 있을지도.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고.”
좀 더 쉬운 방법으로는, 저 정도 보상은 두말하지 않고 내어줄 만큼 이곳 황립 아카데미에 크나큰 위기가 닥치는 것이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했지. 쩝...”
물론 헬레나 발렌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었지만, 사실 내 입장에선 그 ‘큰일’이라는 것이 발생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큰일에는 큰 보상이 따르는 법이니까.”
어쨌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전투를 앞둔 이 순간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을 만큼,
눈앞의 기간트가 내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는 사실이었다.
“뭐, 아무튼 그건 나중의 일이고.”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크루거로부터 발산된 엄청난 투기가 나를 향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과연 마스터를 눈앞에 둔 최상급 엑스퍼트답게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너의 역량에 의해 좌우되는 ‘투기’가 엄지를 치켜들어줄 만한 수준이었던 반면.
크루거로부터 감지되는 강자의 아우라는...
“뭐지?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3
이제 와 아우라를 느끼는 감각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으니, 그만큼 지금의 내가 탑승한 가이아와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크루거 사이에는 측정 불가능한 수준의 격차가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최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극에 이른 강자, 거기에 저런 초고등급 기간트를 타고 있는데도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다니... 확실히 많이 달라지기는 달라진 것 같군.’
비록 ‘-’가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아르헨 베를리오스는 A급인 본인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모두 개화한 파일럿 능력치 ‘85’의 수준급 오너였다. 여기에 본신의 능력과 기간트의 성능을 고려했을 때 희미하게나마 아우라가 느껴질 것이라 예상했건만.
‘수준 차이를 예측할 수 없군. 이렇게 되면 조금 더 힘 조절에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
파아앗
나는 1번 슬롯에 저장해 두었던 드워프제 기간트용 롱소드를 소환했다.
맨손으로 상대한다 한들 하등 어려울 게 없는 상대였지만, 수천의 인원이 지켜보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출 필요는 있었으니까.
스르륵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었기에, 오른손에 든 롱소드를 늘어뜨린 채 전방의 크루거를 가만히 주시하였다.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크루거 역시 굉장히 견고해 보이는 롱소드 한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고수끼리의 대련 혹은 전투에서 움직임에 방해되는 방패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동안 나와 상대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어쩌면 기간트의 성능 차이를 고려해 선공을 양보하려 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먼저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결국 먼저 발을 뗀 건 거대한 검보라색 기간트 크루거였다.
타아아아아아앗
‘오...’
예상보다 훨씬 더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마스터를 눈앞에 둔 ‘본신의 실력’과 잠재력을 완벽하게 개화했을 정도로 쌓아온 수십 년의 ‘경험’.
그것들이 어우러진 아르헨 베를리오스의 실력은 명백히 자신의 한계인 능력치 ‘85’를 넘어서고 있었다.
촤아아아아아아......
눈 깜짝할 새 100여 미터의 간격을 좁혀 버린 크루거의 롱소드가 빛살처럼 대기를 갈랐다.
말 그대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
하지만 너무나도 빠르고 강력한 그 일격이, 내 눈에는 마치 슬로우 효과가 걸린 영화 화면 마냥 느리게 재생되었다.
크루거의 검이 가이아의 몸통에 닿기 직전.
스륵
나는 처음으로 발을 움직여 아슬아슬하게 검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다.
크루거의 움직임이 감지된 순간 동화율은 이미 ‘100%’에 도달한 상태였고.
나는 이전과 비교해 또 한 차례 진화한 기간트와의 ‘일체감’을 느끼며 검 대신 왼쪽 주먹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우우웅
완전히 무방비상태인 크루거의 오른쪽 안면부.
그곳에 그림 같은 훅이 작렬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주먹에 적중당한 크루거의 헤드가 수천 개의 파편으로 화하며 사방으로 비산했고.
그러고도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거대한 강철 거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30여 미터를 튕겨 나간 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그대로 콜로세움의 바닥에 처박혀 버리고 말았다.
“허어...”
나 자신조차 놀랄만한 반응속도와 파괴력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탄성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
교수와 학생 가릴 것 없이, 하나 같이 입을 쩍 벌린 채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쯧, 너무 크게 저질렀나?”
애초의 목적은 십수 합 정도를 어울려주며 이쪽의 실력을 적당히 과시하는 것이었는데...
저절로 몸이 반응해 버린 탓에, 조금 과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말았다.
‘뭐,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지.’
나는 쓰러져 있는 크루거를 왼손 검지로 가리키며 외부 통신 마법진을 개방했다.
[대련은 끝났다. 뭣들 하나? 부상자를 살피지 않고.]
“앗!”
“이런...”
“부, 부학장님의 상태를......”
“빨리 움직여!”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교직원들이 콜로세움 바닥에 뻗어버린 크루거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