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58화 (158/169)

158화 황제의 자리에 도전하는 자들

#1

이펜타르크 제국 황립 아카데미의 재학생 수는 정확하게 5788명이다.

그리고 제국의 중동부에 자리 잡은 이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의 면적은, 그 열 배 이상의 인구가 상주한다 한들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실제로 교직원(교수 포함)들과 사용인들의 수를 합하면, 적어도 강의가 열리는 시간 동안은 재학생 수의 두 배가 넘어가는 인원이 아카데미에 머무르는 셈이었고.

축제 등의 특별한 행사라도 있는 날이면, 정말로 학생 수의 열 배에 달하는 인원이 이곳의 문턱을 넘는 일도 있었다.

뭐, 사실 이곳 황립 아카데미의 부지가 넓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간트 훈련과 관련된 시설들이 몇 개나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긴 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개학식 이후 이틀이 지났다.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된데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마지막 학기인 만큼. 이 시기는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뜸한 시기라고 한다.

애초에 ‘자식을 잘 봐주십사’하는 목적의 선물 공세나 접대는 방학 기간 중 모두 끝마친 상황일 테니, 굳이 눈칫밥을 먹어가며 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분명 그렇다고 들었는데...”

물론 아카데미의 대부분 장소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열의에 찬 학생들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 이외에는 매우 차분한 분위기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아카데미의 외곽에 외딴섬처럼 존재하는 이곳 ‘히아신스관’만은 이야기가 달랐는데.

개학식을 다녀온 이후, 또다시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실내수련장에 처박혀 버린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녀장인 마틸다 프레스턴의 전언에 따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로 인해 히아신스관의 문턱이 닳을 지경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목적은 히아신스관의 주인인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무려 제국 오너 서열 14위이자 마스터를 눈앞에 둔 최상급 엑스퍼트인 부학장 아르헨 베를리오스를, 일격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팔이나 다리를 베어버릴 걸 그랬나? 괜히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진짜 전장이 아닌 이상, 아무리 귀족이라 한들 기간트의 헤드가 터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하는 건 평생에 걸쳐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사실 기간트의 머리가 박살 나거나 잘려 나가는 건 실제 전장에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기간트에 타고 있는 오너 역시 인간(혹은 아인종)인 이상,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진짜 고수들의 경우, 그 본능적 방어 기제를 이용해 비교적 손쉽게 킬 포인트(몸통 타격)를 올리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판국에 일격에 기간트의 헤드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퍼포먼스를, 그것도 수백의 귀족이 운집한 황립 아카데미의 개학식에서 선보인 것이다.

“게다가 하필 상대가 상대였으니, 정세 변화에 민감한 제국 귀족들이 저리 발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더군다나 현재 제국은 차기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내전이 한창이었다.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은 유력 후보인 ‘황태자’와 ‘3황자’가 맞붙은 제국 남부와 중부의 경계 지점이었지만.

동부를 중심으로 제국 전역의 군소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6황자의 세력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황립 아카데미가 위치한 황실 직할령 오베이트시는 6황자 세력의 중심인 가르딘 공작가(3황자의 외가)의 영토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어제와 오늘 히아신스관을 방문한 귀족 중 6할 이상이 6황자 휘하의 귀족들이었다고 한다.

자작 부인인 마틸다 프레스턴은 이펜타르크 제국의 정세에 대해 매우 해박한 편이었고, 그녀의 박학다식함은 이 세계와 제국에 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내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만약 수석교수님께서 발렌타인 공작님의 직인이 찍힌 추천서를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면, 높은 확률로 6황자님이 이곳을 직접 방문하셨을지도 모릅니다.’

‘6황자가 직접? 그건 좀 무리수 아닌가? 내가 알기론 황립 아카데미 소속 인원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공작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네, 그것이 설립 초기부터 내려온 역대 황제 폐하들의 의지이자, 현 발렌타인 공작님의 의지입니다. 하지만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단순히 방문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글쎄, 그러다 진짜로 그 무서운 양반의 분노라도 사게 되면 황제 자리고 뭐고 완전히 끝장나는 거 아닌가?’

‘...마, 말씀을 참 거리낌 없이 하시는군요, 수석교수님.’

‘뭐, 어때. 공작이나 황제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호, 호호호... 그렇군요. 아무튼, 어차피 이대로라면 6황자님이 황위를 이을 가능성은 희박하니까요. 어쩌면 발렌타인 공작님의 분노를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죠.’

‘그건 왜지?’

‘6황자님의 세력은 가담한 귀족의 숫자는 많을지언정, 기간트 전력에서 다른 두 진영에 비해 크게 뒤처지고 있으니까요.’

마틸다 프레스턴의 말에 따르면 현 황위 후보들의 세력별 특징은 이랬다.

먼저 올해 37세가 된 황태자 크리스토퍼 이펜타르크는 중앙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제국 중심부에 거대한 영토와 100여 기의 기간트 전력을 보유한 외가 ‘티린스 공작가’를 배경으로 두고 있었다.

차기 황위 1순위 후보답게 황태자군의 기간트 전력은 무려 400여 기를 넘긴 상태였으며, 소위 말하는 이펜타르크 제국의 다섯 별(제국 오너 서열 1~5위) 중 서열 4위인 그리엄 프로이센 후작이 기간트 부대의 대장이자 에이스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다만 황태자 본인의 ‘무(武)’에 대한 재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편으로, 30대 후반에 이른 현재까지 중급 엑스퍼트 초입에 머물러 있었으며 오너로서의 재능 역시 평범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륙 최강국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이펜타르크 제국의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설 것도 아니었기에, 본신의 무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리 큰 문제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와는 다르게 학문이나 정치 등 ‘문(文)’의 영역에 있어서는 뛰어난 면모를 수십 년간 증명해 온데다, 심지어 그 품성마저 어질기로 정평이 나 있었기에.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성군(聖君)’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 황제 후보는 3황자 메슈트 이펜타르크다.

그의 배경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황태자 나이 2살) 첫 번째 황후에 이어, 두 번째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 시오네 암셀(현 황후)과 그녀의 오라비인 암셀 후작가의 현 가주 드로이얀 암셀이었다.

이펜타르크 제국군의 1/3을 장악하고 있는 남부의 패자 암셀 후작가 역시, 티린스 공작가와 마찬가지로 100여기 전후의 기간트를 보유한 어마어마한 군벌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3황자군의 기간트 전력은 무려 500여 기에 육박했다.

물론 황실에 이어 제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는 티린스 공작가였기에, 기간트의 질적인 면에서는 한발 앞설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황태자군과 3황자군의 기간트 전력은 백중세를 유지하며 내전의 장기화를 야기하고 있었다.

3황자가 형인 황태자에 비해 뛰어난 점이라고는 오직 ‘무(武)’에 관한 재능뿐이었는데. 다만 그 한 가지 능력이 제국 전체에서도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뛰어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고작 17세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발을 들인 메슈트 이펜타르크는 불과 3년 뒤인 20세에 중급 엑스퍼트가 되는 기염을 토했고. 25세에 상급 엑스퍼트, 32세에 최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하며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오너’로서의 재능 또한, 황립 아카데미에 재학했을 당시 탑10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출중했는데. 34세가 된 그는 현 이펜타르크 제국 오너 서열 20위에 올라있는 ‘공인된’ 강자였다.

일각에서는 메슈트 이펜타르크의 뛰어난 무력과 다소 난폭한 성정을 이유로 들어.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경우, 수십 년만에 제국의 팽창 정책이 재개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3황자군의 기간트 부대 대장이자 에이스 오너는 제국의 다섯 별 중 서열 3위인 트레버 레이카르트로.

기간트 조종술로만 한정한다면, 그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제국 제일의 천재 오너였다.

최상급의 극에도 이르지 못한 실력으로 그랜드마스터인 발렌타인 공작과 100여 합을 겨루었다고 하니, 그 재능의 등급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뭐, 일단 S급은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만약 그에 대한 평가가 사실이라면 S급 이상의 재능이라고 한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과연 훈련병 프로필이 S등급 이상의 재능을 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거야 직접 확인해 봐야 알 수 있겠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S급을 넘는 등급이 표시된 적은 없었다.

물론 그건, 여태까지 그만한 재능을 발견한 적이 없었던 탓이 컸을 테지만.

어쨌든...

마지막으로 황위 쟁탈전에 뛰어든 세 번째 후보는 2황비 소생의 6황자 31세의 트리안 이펜타르크였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팔방미인(八方美人)’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서른 살에 상급 엑스퍼트에 도달할 만큼 뛰어난 무(武).

기간트 학부와 복수 전공한 (정치)행정 학부에서 차석으로 졸업했을 만큼 천재적인 문(文).

게다가 마치 엘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려한 외모와 데뷔하자마자 사교계의 중심으로 우뚝 선 친화력과 정치력까지.

그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황제의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조건을 지닌 이라 할 수 있울 테지만.

안타깝게도 황후가 아닌 황비 소생이라는 ‘정통성’ 상의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황태자처럼 중앙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고.

3황자와 같이 군부의 절대적 충성을 이끌어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제국의 권력 지도에서 소외된 군소 귀족들의 포용하는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그에게는 두 형들에게 못지않은 배경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의 세 공작 중 하나인 ‘가르딘 공작가’였다.

물론 전대 공작의 직계 중 혼기에 들어선 여인이 없었던 관계로, 가주의 조카 중 하나를 황제의 비로 들여야만 했었지만.

그녀는 열다섯에 이르는 황제의 여인 중 가장 출중한 외모를 무기로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할 수 있었고.

황제가 살아있을 당시, 황비와 가르딘 공작가는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펜타르크 제국에는 발렌타인 공작가라는 ‘폭주 제어 장치’가 존재했기에, 선을 넘는 지경까지 이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십 수년간의 전성기(?) 동안 비축한 부와 인맥으로 아들이자 가문의 후예에게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틀을 마련해 줄 수 있었던 황비와 가르딘 공작가.

엄청난 숫자의 군소 귀족 가문들이 그들의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전력의 ‘수’적인 면에서만큼은 두 형들에 비해 하등 꿇릴 것이 없는 6황자군이었다.

하지만 ‘질’적인 면을 들여다보자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제국의 다섯 별은커녕(애초에 나머지 셋은 발렌타인 공작 본인과 그의 두 제자다), 수백 기의 기간트들을 이끄는 대장이자 에이스가 고작해야 오너 서열 10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랑트겐 후작이었고.

그를 뒷받침해 줄 인물 중 제국 오너 서열 30위 권 이내의 실력자 또한 고작 2명(랑트겐 후작 본인 포함 3명)에 불과했다.

반면 황태자군의 오너 중 30위 권 이내의 인물은 총 여섯이었고.

3황자군에는 3황자 본인 포함 무려 일곱 명의 인물이 오너 서열 30위권 이내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6황자가 직접 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다는 마틸다 프레스턴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무려 제국 오너 서열 14위의 초강자를 일격에 때려눕혀 버렸으니, 군의 중심이 되어줄 강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로서는 눈이 돌아갈 만도 하겠지.

다만...

나는 그녀가 모르는 6황자군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가 이곳을 방문하는 순간에는, 그 이유가 고작 스카웃 따위는 아니리란 사실 역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머무는 3개월 동안, 분명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 역시 존재히긴 했지만...

‘헬레나가 바보도 아니고. 확실한 정보도 없이 2500rp급 기간트를 태웠을 리는 없지.’

그리고 이왕에 터질 사건이라면.

이 거대한 제국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염원했다.

거듭 말하지만...

“일의 크기가 커질수록, 받아낼 수 있는 보상도 더욱 커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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