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신임 수석교수의 특별반(3)
#1
출력 500rp에 불과한 소형 기간트라곤 하지만, 5미터에 가까운 강철 덩어리들이 뛰고 달리고 구르는 등 온갖 야단법석을 떨어대자.
제아무리 넓고 견고하게 지어진 히아신스관의 실내수련장이라고 한들, 그 거대한 덩치들의 등살에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외형부터가 일반적인 훈련용 기간트와는 그 수준을 달리하는(튜닝으로 인해 더더욱) 드워프제 기간트 ‘브롱코스’.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이니만큼, 교수들이나 멘토(순환 근무 중인 오너들)들이 소유한 고등급 기간트를 심심치 않게 목격한 바 있는 리즈 엘리엇과 노아 프린스, 스텐리 제퍼슨이었으나.
놀랍게도 수석교수가 그들에게 지급한 새로운 훈련용 기간트의 외형은, 그 고등급 기체들과 비교해 전혀 꿀릴 것 없는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평가가 부족하지 않은 겉모습 따위는, 이 기간트가 감추고 있는 성능에 비하면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우와... 관절 유연한 것 좀 봐. 진짜 끝내주지 않아요, 스텐리 선배?]
[그뿐만이 아니야. 자크랑 트라웃 이외의 기간트를 타본 적은 없지만. 고작 출력 100rp 차이라고 하기엔 마력 엔진의 효율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것 같아. 그러니까 최소 자크(300rp)에서 트라웃(400rp)으로 갈아탈 때 느꼈던 갭의 2배 이상?]
[전 600rp짜리도 타봤다고 했잖아요. 근데 확실한 건, 이 녀석이 그 600rp짜리 기체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력 차이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데다, 일단 훨씬 더 움직이기 편해.]
[음, 아마 드워프들의 비기인 마력 회로 제작기술 때문이 아닐까? 아닌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아예 출력 차이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배웠...]
[아, 선배! 무슨 그런 머리 아픈 생각을 해. 지금은 그냥 이런 멋진 녀석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즐기면 되는 거라구요.]
새로운 기간트의 성능을 점검하고,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설계적인 부분까지 파고들려는 스텐리 제퍼슨.
단순히 기존 기체에 비해 뛰어난 성능에 감탄하기 바쁜 리즈 엘리엇.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촉망받는 제국의 유망주답게 새롭게 접한 뛰어난 기체에 온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런 그들과는 달리...
대충 팔다리를 움직여 본 후, 실내훈련장을 한 바퀴 달리는 것으로 점검을 끝내 버린 노아 프린스는 새로운 기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오, 이 자세가 된다고? 이건 좀 놀라운데?]
무리 없이 두 다리를 교차해 바닥에 퍼질러 앉을 수 있다는 사실(양반다리, 자크와 트라웃으로는 불가능한 자세)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기 전, 대략 10여 분간 새로운 기체에 익숙해질 시간을 가졌던 특별반 학생들.
그들을 바라보던 스노우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모여라.”
이윽고 수석교수 스노우의 전면에 나란히 선 3기의 은빛 기간트.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본 그가 말을 이었다.
“우선 너희들의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 방법은 일대일 대련이고, 먼저 리즈 엘리엇과 스텐리 제퍼슨이 시작한다. 다음은 리즈 엘리엇과 노아 프린스, 그 다음 스텐리 제퍼슨과 노아 프린스 순이다. 대련 시간은 5분, 내가 멈추라고 하기 전까지 이 순서대로 반복해서 진행한다.”
그리하여 시작된 1대1 대련.
[으흐흐흐, 재밌겠다. 잘 부탁해요, 스텐리 선배!]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40여 미터의 간격을 벌린 채 마주 선 두 기의 브롱코스.
그들의 수석교수는 어느새 실내훈련장 한편에 나타난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따로 시작신호 따위를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눈치껏 대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시작할게요.]
[준비됐다.]
콰아아아아앙
스텐리 브라운의 브롱코스로부터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반대편에 있던 리즈 엘리엇의 기체가 바닥을 박차며 빠르게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오른손에 달랑 롱소드 하나만을 들고 달려드는 리즈 엘리엇과는 달리, 착실하게 검과 방패를 양손에 소환한 스텐리 제퍼슨.
그는 자세를 낮추며 전면으로 내민 방패를 이용해 상체의 절반을 가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든 검을 대각선으로 늘어뜨린, 기간트 교전의 정석과도 같은 방어 자세를 취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다... 타앗!
고작 20여 분 전에 처음으로 탑승한 기체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을 선보이는 리즈 엘리엇.
그녀는 검으로 방패를 두드리려는 듯한 모션을 취한 직후.
방패에 상대의 시선이 가려지는 찰나의 순간 재빠르게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 스텐리 제퍼슨의 옆구리를 향해 매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윽...]
역시나 만만치 않은 재능을 자랑이라도 하듯, 리즈 엘리엇의 변칙적인 움직임을 눈치챈 스텐리 제퍼슨이 곧바로 몸을 뒤로 뺐지만.
그의 움직임은 리즈 엘리엇에 비해 조금은 부자연스러웠고.
완벽한 회피에 실패.
옆구리를 향해 날아든 검격을 깨끗하게 피해내지 못하며 장갑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후의 대련 역시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이어졌다.
민첩한 기동으로 상대의 사각을 잡으려는 리즈 엘리엇과 단단하게 방어를 굳힌 채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스텐리 제퍼슨의 공방.
타아앗
콰아아아아아앙
다다다다다다다다... 타앗
서걱
상대와 자신의 전력 차를 가늠한 뒤, 나름 최선의 전략을 선택한 스텐리 제퍼슨이었지만.
두 사람 간의 기량 차이는 너무나 명백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장갑에 새겨지는 상처가 하나둘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점은, 한 번의 대련에 책정된 시간이 고작 5분에 불과했다는 것.
“거기까지.”
5분이 경과하고 스노우가 대련을 멈출 때까지, 스텐리 제퍼슨의 브롱코스에는 총 네 군데의 검상이 새겨졌다.
그나마 최초의 일격에 제법 깊숙하게 베인 것을 제외하면, 조금씩 상대의 공격에 익숙해진 덕분에 치명적인 피해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최초의 기동’이자 ‘최초의 대련’이라는 점을 고려한 리즈 엘리엇이, 내내 같은 패턴으로 일관했기에 가능했었던 결과였다.
[수고했어요, 스텐리 선배.]
[후우우, 너도... 수고했다.]
그녀와의 격차를 절감하긴 했지만, 스텐리 제퍼슨은 후배에게 패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다음 대련을 위해 멀찌감치 물러난 스텐리 제퍼슨은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대련을 떠올렸고. 특히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자연스러웠던 리즈 엘리엇의 기동을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다.
‘과연, 저게 진짜 천재라는 족속인가? 막 적응을 시작한 기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움직임이었어.’
물론 저등급 기간트일수록 적응을 위한 시간이 짧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전투용 기간트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700rp급만 하더라도 적응에 필요한 시간이 일반적으로 주 단위까지 늘어나지만.
그 아래인 600rp급 이하 기간트의 경우엔, 빠르면 3,4일 만에 적응을 완료하는 오너도 더러 존재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빠른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로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고? 그건... 더 대단한 거잖아?’
직접 겪어 보고 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황립 아카데미 전체에 소문이 자자한 후배의 재능이...
스텐리 제퍼슨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2
방패와 검을 소환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황립 아카데미 3학년 C반의 열등생 노아 프린스.
사실 C반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열등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같은 반 학우들 사이에서도 터부시되는 존재인 그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수식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젠장, 갑자기 대련이라니. 그것도 저 괴물같이 녀석이랑...’
뜬금없이 신임 수석교수의 특별반에 선발된 것부터 시작해, 양손에 무기를 든 채 괴물 같은 후배와 마주 선 지금 이 순간까지.
노아 프린스에겐 평소 믿지도 않는 신의 존재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대체 왜 나 같은 놈을 뽑은 거냐고? 대체 왜! 어떤 이유로!’
수석교수의 제자로 선발되어 좋아 죽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다른 두 사람과 자신은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그는 기간트라면 사족을 못 쓰는 광인(리즈 엘리엇)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집착남(스텐리 제퍼슨)도 아니었다.
단지 황립 아카데미 기간트 학부의 졸업장을 손에 넣어, 적당한 유산을 물려받은 다음, 평생을 빈둥거리며 사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인 매우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내가 대체 왜...’
이는 정도를 넘어선 불합리함이었고.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엄청난 강자의 가르침? 기연? 빌어먹을, 개나 주라 그래! 내 평온한 일상을 돌려내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노아 프린스의 내면에서 맴도는 목소리일 뿐.
그에겐 그 무시무시한 부학장을 일격에 때려눕혀 버린 수석교수에게 따지고들 용기 따위,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설상가상, 3개월이라는 고난의 시간을 함께하게 될 동료(?)들마저 여러 가지 의미로 정상이 아니었다.
‘대체 새로운 기간트에 타자마자 저렇게 움직이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노아 프린스가 봤을 때.
고작 훈련용 기간트, 그것도 처음 타본 기간트로 상식 밖의 움직임을 선보인 리즈 엘리었이나. 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고작 5분 만에 그 말도 안 되는 움직임에 얼추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 스텐리 제퍼슨이나 둘 다 정상적인 범주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비슷한 수준의 학생을 뽑았으면 얼마나 좋아.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루이스 엔리케라거나...’
하지만 노아 프린스가 부르짖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인간 따위 존재할 리 없었다.
신임 수석교수의 특별반에 선발된 그는 현재 히아신스관의 실내수련장에 서 있었고.
존재조차 몰랐던 ‘브롱코스’라는 새로운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였으며.
양손에 기간트용 검과 방패를 쥔 채, 자신을 쥐어패고 싶어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기간트 성애자와 마주 선 상태였다.
그리고...
“준비됐으면 시작해라.”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수석교수의 입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으흐흐흐, 그럼 실력 좀 보자고요, 노아 선배.]
[실력 같은 거 없어. 제발 살살 하자고! 살살!]
썩 매끄럽지 않았던 첫 만남의 순간이 노아 프린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살갑게 대해주는 건데... 그래도 너무 심하게 하진 않겠지? 아까 스텐리 녀석하고 할 때도 사정을 봐주는 것 같던데.’
하지만 리즈 엘리엇을 향한 그의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으니...
콰아아아아아앙
[크억!]
서걱
[끄어어어억!]
신호와 동시에 엄청나게 두들겨 맞기 시작한 노아 프린스는 고작 5분 만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왜, 왜 나만!’
물론 나쁘지 않은 심성을 지닌 리즈 엘리엇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를 두들겨 팬 것은 아니었다.
단지 첫 번째 대련에서 예열이 완벽하게 끝나버린 탓에, 치밀어 오르는 공격 본능을 주체하지 못한 것일 뿐.
게다가 스노우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리즈 엘리엇(95)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닌 노아 프린스(94)가 본능적으로 타격감을 하락시키는 방어를 연달아 성공시키는 바람에.
리즈 엘리엇의 욕구불만이 점차 고조된 탓도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끄어억! 야 이 나쁜 년아!]
이날,
리즈 엘리엇과 스텐리 제퍼슨을 상대로 총 여섯 번의 대련을 치른 노아 프린스가...
[끄르르르륵...]
결국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특별반의 첫 번째 훈련(?)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