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6화 (6/164)

< 3. 탤런트Talent - 3 >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한 순간 창이 입자 단위로 부서지더니 돌연 내 시야를 덮쳐왔다.

그리고-

===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이어서 울음기 섞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어···. 힘들다고. 나는 힘들다는 소리도 못해?”

“할 순 있지. 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짜증만 나게 하지만. 아, 그게 목적이었어? 그럼 성공이네. 좋으시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한테는 그렇게 들려!!”

남자는 말을 짜증스럽게 구겨 팽개쳤다. 버려진 말소리들은 쿵하고 낮게 깔렸다.

여자는 자기 말을 속으로 삼켜 되새김질했다. 소리들은 어디도 가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녔다.

높고 낮은 소리들은 어울리지 못하고 길항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얇은 벽을 고스란히 통과해 건너편 방에 머물렀다. 소년은 바로 그 방에 있었다.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소년은 듣지 않았다.

다만 몸을 둥글게 말아 앉아, [수학의 정석]을 곱게 펴둔 채 그만의 유희에 천착했다. 종이 위로 볼펜이 서걱서걱 부대꼈다.

볼펜이 멈출 때는 왼손가락이 까닥, 까닥, 흔들렸다.

사고가 지체될 때의 소년의 버릇이다.

엄밀히 말해,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옛적에 다 풀어버렸다.

지금 하는 일은 단순한 반복이었다.

소년이 이 책을 우연히 펼쳐보고, 별 자각 없이 풀어버린 것이 7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웃었다.

늘 어둡고 울상이던 어머니였다. 그 드문 웃음이 소년의 뇌리에 남았음인가.

이후로 소년은 그 책을 항상 곁에 두고 문제를 풀었다. 일주일 만에 책을 다 떼었다. 그럼 다 뗀 뒤에 다른 책으로 넘어갔는가?

아니었다.

소년은 ‘수학의 정석’만을 강박적으로 고집했다.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억지로 떨어뜨리면 자지러지듯이 떼를 썼다. 다시 책을 돌려주면 아이는 소중한 듯이 책을 안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몸을 웅크리고 문제를 풀었다.

종이에 숫자가 쌓여갔다.

쌓이고 쌓여 종이를 까맣게 물들였다.

이윽고 문제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도 소년은 그 위에 또 다시 숫자를 더했다.

까닥.

까닥, 까닥.

그러나 이제 엄마는 그때처럼 웃어주지 않는다.

“이제 그만하자···.”

“그래 시발. 이 빌어먹을 집구석. 나도 지긋지긋하다고.”

자폐증 진단이 가정을 파탄시킨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균열이 가고 있던 것을 가속시켰을 뿐인지 소년은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날 아버지가 사라졌다, 그 정도의 자각만 있었다.

소년에겐 어머니만이 남았다.

그리고.

“얘 그거 아니야?”

“···응?”

“그거. 서번트 증후군. 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뭐랄까, 천재인데 좀 모자라 보이는 사람?”

“그런 게 있어?”

“그래. 나 아는 친구 중에 연구원 있는데. 정부 소속이래. 거기서 관련 연구 같은 거 하나봐. 미래 인재 창출? 뭐 그런 거라는데. 거기 한 번 데려가 봐.”

“간다고 뭐가 될까?”

“지원금도 받고. 그쪽에서 어쨌든 맡아서 교육은 시킬 테니까. 지금보다는 낫지 않겠어?”

‘연구소에 돈 받고 팔아라’라는 말을 에둘러 하는 친구 앞에서, 어머니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 볼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소년은 듣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듣지 않았음에도 소리는 여념 없이 들려왔다.

까닥.

까닥.

소년은 그날도 [수학의 정석]을 펴고 수학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소년은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

탤런트 : [어느 수학 신동의 수리적 통찰력](Rank C)을 습득했습니다.

-이 탤런트는 수리공학적 통찰, 지각 추론, 연산 등의 수학적 지능지수에 관여합니다.

-동조율 : 0.78%

===

의식이 돌아왔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잠에서 깬 듯이 급격한 복귀였다.

그러나 현실감은 의식보다 한 박자 늦게 뒤따라왔다.

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감각은 다 정상이었다. 세상이 뭉개지는 것만 같던 감각도. 신비로운 푸른빛도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꿈은 아니라는 듯, [수학의 정석]이 내 손에 떡하니 들려 있었다.

“학생 그 책 살 거야?”

“···예? 아, 예.”

“천 원이야. 상태 좋은 거니까 네고 없음.”

“···네.”

얼떨결에 사서 들고 왔다.

시간이 잠시 지나고,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이성이 출타 중일 때 쌓인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두뇌를 습격해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메시지는 이랬다.

‘판매자 이 새끼, 이게 어딜 봐서 상태가 좋다는 거야.’

넘겨도 넘겨도 깜지밖에 없잖아.

책은 학습지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있었다. 천 원이면 싸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천 원의 효용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베개? 라면 받침대?

아, 말년 병장에게 주면 유용하게 쓰겠군.

(책을 펼치며) 무엇이 보이냐? >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으하하핫! 그것이 네 군생활이다!!

결론.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져봤지만 이 책은 완전히 평범하다. 아무 신비도 남아있지 않다. 그건 아마-

‘카르마를 흡수한다. 그게 [미다스의 손]의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에 담긴 뭔가를 흡수한 거고 그것은 곧···.’

===

탤런트 : [어느 수학 신동의 수리적 통찰력](Rank C)

===

황금빛 상태창에 푸른색 각인으로 새겨진 이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런 건가.

어떤 사물에 그 주인의 업이 깃들고, [미다스의 손]은 그 사물로부터 주인의 탤런트를 추출해 흡수한다.

더 짧게 요약하면? 재능을 이식하는 스킬!!

아니.

진정하자.

심호흡도 한 번 하고. 히우. 후우. 흐아이으···.

음.

진정했다.

난 한껏 들떠있었던 회귀 첫날을 떠올렸다.

혹여 내가 미다스의 다재다능함을 얻은 게 아닐까 기대하며 보육원 복도에서 검무를 추려다가 안면으로 낙법을 해버렸지. 그날 나는 회귀 당일에 흑역사 갱신한 회귀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아무튼 그때를 생각하니 순식간에 침착해졌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해야 할 일은 검증이었다.

난 수학교과서를 꺼내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변화가 없었다.

“뭐야···. 연출에는 엄청 힘 줘놓고 왜 결론은 허당인 건데···.”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

어려운 건 여전히 어렵고 모르겠는 건 여전히 모르겠다. 암산이 좀 빨라졌나?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음.

으으으음···!

그때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사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수학 시간이었다.

“교과서 펴고. 오늘은 어제 다 못한 증명을···.”

그러나 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뭔가 받았다 뺏긴 것 같아서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서 뇌가 간질간질했다. 분명 이걸로 끝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이한열!”

교사가 나를 호명했다.

“뭘 그렇게 얼빠져 있어? 내 수업은 들을 필요도 없다 이거니?”

“네?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아님 나와서 풀어봐. 들을 필요가 없는지 한 번 보게.”

그제야 나는 내 주위를 휘감는 분위기를 자각했다.

저열한 기대감.

비릿한 웃음.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인간의 악의.

놀랍게도 그것은 교단에 선 교사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년이···.’

오해 말기를 바란다.

난 지극히 상식적인 윤리 관념을 갖춘 문화인이다. 윗사람을 윗사람으로 대접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민주시민으로서, 나에겐 썅년을 썅년이라 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 또한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둘이 충돌했을 때, 말하자면 윗사람이 썅년일 때, 양측의 경중을 재어보고 저것이 어른다운 완고함인지 아님 그냥 꼰대인지 판가름할 이성도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을 내리겠다.

저년은 꼰대에 썅년이다.

“빨리 안 나오니?”

저자의 이름은 고윤숙.

34세 미혼 여성. 참고로 우리 반 담임이다.

당연히 따돌림을 당했던 과거의 나는 가장 먼저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순진하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때 그녀는 내 말을 무표정으로 한참 듣더니

-알았어.

한 마디만 하고 날 돌려보냈다.

다음날 나는 김송헌 패거리에게 불려갔고 절구통 속 떡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김송헌은 배후의 흑막 모드였기에 자리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대신 박종철이 대리로 등장해 조롱을 전해왔었지.

-일러바쳐도 하필이면 그런 사람한테 갔냐. 븅신 새끼.

악에 받쳐서 고윤숙에게 따지러 갔다.

그때 저년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처세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나는··· 너희들이 대화로 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혹시 더 사이가 안 좋아진 거니? 어머 어떡해···. 난 그것도 모르고···.

라며 울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교무실에서.

화를 내는 학생 앞에서 우는 선생. 그것이 교무실의 다른 동료 교사들에게 어떻게 보였겠는가.

-야! 너는 건방지게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친구끼리 싸우다 좀 다칠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행패냐.

-너 이 새끼 이름 뭐야. 3반 이한열? 그래 너 두고 봐.

그날로 난 선생들의 공공의 적, 요주의 학생이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김송헌에게 확실하게 굴복했다. 내 편 따윈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윤숙의 악명은 학생들 사이에선 알게모르게 유명했다 한다.

고아 차별. 특정 학생 편애. 출세지향적 태도. 그런 주제에 호감 가는 얼굴과 만렙 찍은 처세술로 동료 선생들에게는 평판이 좋았다.

그야말로 양두구육羊頭狗肉.

정치질하는 꼴이 예사롭지 않아 알아봤는데, 교사가 되기 전에는 모 의원 수행원으로 나름 중역이었다 한다.

그때의 정치적 끈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나름의 심증이 있기도 했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알겠다.

짧은 순간, 김송헌과 고윤숙이 눈빛을 교환하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저 칠판에 적힌 문제는 지금 단계에서 풀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수포자라도 수능 공부까지 해본 몸이었다.

저게 얼마나 정신 나간 난이도인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빡치네.’

못 풀면 별 지랄지랄을 해대겠지. 독설은 디폴트고. 벌점을 먹이려나? 아님 따귀를 때릴까?

물론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저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자기보신에만 눈이 멀고 교육자 정신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없는 쓰레기 선생이, 쥐꼬리만한 꼬투리 하나 잡았다고 의기양양해댈 꼴이 보기 싫은 것이었다.

이를 빠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단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축하한다.

너희는 회귀 후 인간에서 목석으로 진화된 내 부동심을 흔드는 데 성공했다.

교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발자국 한 번에 심장이 두세 번은 뛰었다. 한 번의 박동마다 심장의 온도가 몇 도씩 떨어지는 듯했다. 전에 없이 냉정해진 이성이 말했다.

내 능력으로는 못 푼다.

절대로.

그럼 ‘그’는 풀 수 있을까?

상태창을 보았다.

금빛의 문자열 사이로 홀로 파랗게 찍혀있는 어구가 보인다. 클릭.

===

[어느 수학 신동의 수리적 통찰력](Rank C)

-동조율 : 0.78%

===

동조율.

뭐에 관한 동조율인가?

그리고 왜 이 부분만 파란색인가? 짧은 순간에 추론을 마쳤다. 사실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인터페이스가 불친절해서 조작을 좀 헤매었을 뿐.

나는 상태창 하단의 [청색 카르마]를 클릭, 드래그해서 [어느 수학 신동의 수리적 통찰력] 위로 떨구었다.

그러자.

===

카르마 투입 : 0<+><->

===

좋아.

일단 간단히 10 정도만 넣어볼까.

띠링 소리와 함께 글자색이 살짝 더 진해졌다.

확인해보니 동조율은 0.78에서 2.78로 늘어 있었다. 1:5비율인가. 남은 보너스 카르마는 490 포인트.

그렇다면··· 올인이다.

띠리링!

이윽고 칠판 앞에 도착했다.

동조율은 이제 100%

직감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그걸 뭐라 해야 할까. 눈높이? 그것도 맞지만, 그렇게만 말하기엔 얄팍하다.

말하자면 관점.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뒤바뀌었다.

눈앞의 문제는 더 이상 불가해의 영역에 있지 않았다.

왼손 검지가 까닥, 움직여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러자 사고가 툭- 튀어 올랐다. 수면 위를 뚫고 자맥질을 하는 물고기처럼. 툭- 툭-. 예상 불가능한 지점에 파문을 그려댄다.

까닥, 툭.

까닥, 투둑.

두뇌가 뻐근하다.

뇌수가 말라붙는 듯하다.

그러나 괜찮다. 그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내 안의 어떤 부위가 짧은 시간 혹사당하면서 생긴 피로감에 불과했다.

정신적인 근육통.

“못 풀지? 그럼 그렇지. 하여간 너처럼 말만 많은···.”

탁-. 분필을 들어 칠판을 깊게 찍었다.

< 3. 탤런트Talent - 3 > 끝

ⓒ 달의등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