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주현보육원의 아이들 - 1 >
탁-. 분필을 들어 칠판을 깊게 찍었다.
긋는다.
휘갈긴다.
암녹색의 평야에 희디 흰 도로를 올린다. 탁. 타닥. 탁탁. 칠판에 바짝 붙어, 전투적으로 숫자와 기호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다 손이 멈춘다.
길이 막혔다. 그러나 오른손이 멎자 이제는 왼손이 나서 탐색을 재개했다. 까닥- 툭. 까닥- 툭. 손가락이 튈 때마다 창의적인 발상이 기포처럼 터져 올랐다.
저 길을 갈 수 있을까?
있다.
탁-.
척후가 복귀하자 분필을 든 오른손이 다시 수학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거침없이. 면밀하게. 아름다울만치 정교한 매핑을-.
타닥. 타닥.
탁.
“다 풀었습니다.”
“······.”
분필을 놓고 한 발 물러서보니, 새삼 장관이었다.
풀이는 칠판 절반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그 옆의 보조 보드까지 침범해 있었다. 글자는 들쑥날쑥해서 좀 지저분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증명은 완벽하다.
난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것을 확신했다.
고윤숙은 칠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기름칠이 덜 된 기계처럼 끼기긱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너 왜 풀었어?”
“선생님이 풀라면서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풀었어?”
“어떻게 풀었는지는 칠판 보시면 되잖아요. 애당초 증명 문제인데.”
“······.”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 씨는 입을 다물었다.
더 뭐랄 수 없겠지. 여기서 더 꼬투리를 잡는 건 본인에게 마이너스일 뿐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 것이다.
속이야 시궁창이어도 겉치레는 엄청 신경 쓰는 인간이니까.
그런 고로 나는 당당히 개선했다.
그 와중에 김송헌과 애틋하게 아이컨택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여름 음식쓰레기마냥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낯짝이 참으로 볼만 했다.
나중에 안 거지만, 이날 고윤숙이 낸 문제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 기출문제였단다.
어쩐지 겁나 어렵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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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오후 내내 멍하고 지끈지끈했다.
안 쓰던 감각을 강제로 열어젖힌 것도 모자라 깜빡이 없이 풀가속까지 땡겨버린 대가는 혹독했다.
뭔가 환청도 들리는 거 같은데. ‘넌 평소 수학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정확한 진단이다.
내 사전에 수학이란 없었다. 산술 정도만 있었다. 숫자란 술값계산에나 필요한 것이었으며, 그것조차 단위가 높아지면 경리를 부르기 바빴다.
그런 내가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를 풀다니.
와이씨···.
허허.
이야.
으아아아.
흐어어어.
미친 미친 미친 미친.
와 진짜 이거 미쳤다 미쳤어.
기타 등등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도의 모든 감탄사를 속으로 한 번씩 읊어준 뒤에야 나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박이다.”
황홀했다.
그 외에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구정물 같던 뇌수를 빼내고 천연암반수로 교체한 느낌? 미간에 제3의 눈 하나를 더 단 느낌? 혹은 퇴화된 기관이 복구되어 미지의 감각을 뇌에 새겨넣은 듯도 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적 쾌감이었다.
하기야 누가 재능이 없다가 있어보는 경험을 해보겠는가.
기연이 너무 불친절하다고 투덜거리던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과거의 내게 등짝 스매시를 날리고 싶다.
최고다.
내게 이것 이상의 기연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우선 재능, 그러니까 <탤런트>를 얻는 방법은?
이번엔 중고 [수학의 정석]에서 얻었다. 정황상 누군가 쓰던 물건에 탤런트가 깃든다고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넓은 바자회에, 그 많던 중고품 중 탤런트가 있던 물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얻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물론 재능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예감이 든다.
카르마Karma란 곧 업業.
한 인간이 일생토록 쌓아올리는 무형의 탑이다. 그렇다면 온갖 고난과 질곡에도 아랑곳없이 집요하고 굳건하게 일로정진하는 자의 물건, 그런 것에만 탤런트가 깃드는 게 아닐까?
그런 물건이 흔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게다가 업이 깃들 정도면 틀림없이 개인의 애장품일 것이고, 그런 물건이 함부로 장터에 나다닐 거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이 [수학의 정석] 쪽이 오히려 예외 중의 예외. 그러니까 난 오늘 운이 아주 좋았던 것이다.
“···그렇지. 운이, 좋았지.”
갑자기 씁쓸해졌다.
난 이 책의 주인이 어떤 일생을 살았고, 이 [수학의 정석]을 얼마나 생명처럼 아꼈는지를 알았다.
그런 책이 경매도 아니고, 동네 바자회에 나와 단돈 천원에 팔렸다.
내게는 운이 좋은 일이지만 아마 그에게는 더없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운을 그저 가볍게 즐길 수만은 없었다.
책을 기울여서 밑면을 살폈다.
‘최석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삐뚤빼뚤 쓰여 있었다.
“이 재능은 잘 쓰겠습니다. 최석현 씨.”
책을 책장에 곱게 꽂아놓는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괜히 의자의 회전 기능을 시험해 보았다. 몇 바퀴 회전한 의자는 침대 쪽을 향하며 멈췄다.
침대 옆에 기타가 눈에 띈다.
물론 일전의 그 기타는 아니다.
저건 중학생 때 용돈을 알뜰살뜰 모아 산 5만원짜리 싸구려 기타였다.
빨간색 페인트 도장마저 싸구려. 마감도 싸구려. 자재는 합판은커녕 플라스틱으로 의심되고 접합면에선 본드 냄새가 아직도 난다.
그러나 저것을 매일 밤 끼고 자면서 꾸었던 꿈까지 싸구려는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어쩌면 나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시절, 불과 회귀하기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열정을 불태우며 기타를 연습했다. 그러나 회귀한 날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어떤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청소년 이한열은 그런 의미에서 사망했다.
미래를 아는 대가로 뜨거운 심장을 잃었다. 그것은 아마 한동안 뛰지 않을 것이었다.
난 기타에 손을 뻗었다가, 허공만 그러쥐고 다시 회수했다.
‘···그래도 언젠가.’
언젠가는 음악의 재능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노력에 합당한 결과물을 얻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때는 내 죽은 심장에 제세동기를 선물해도 좋겠다 싶었다.
“자, 그만.”
짝! 짝!
손바닥으로 양쪽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구리구리한 감상은 이제 끝, 이젠 긍정회로를 돌릴 차례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 탤런트를 찾아 헤매야 하고, 동조율을 높이는데 필요한 카르마를 수급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카르마의 색이 뭘 의미하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그러나 걱정이 되진 않았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내게는 아주 생소한 경험이었는데, 이제까지는 근거가 넘쳐흘러도 자신감 따윈 안 생겼기 때문이다.
이게 재능이 넘치는 자의 오만이란 건가.
오오오.
멋져.
완전 끝내준다고!
오늘의 나는 자뻑과 나르시시즘이 일일 권장량을 넘어서인지 당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수학 문제를 풀며 시간을 보냈다.
놀랍게도 수학이 재미있었다.
4. 주현보육원의 아이들
주말 아침이 밝자마자 행정실로 달려갔다.
여기 주현보육원은 주말에 외출하려면 외출증을 끊어야 된다는 웃기는 규칙이 있었다.
잘 모르긴 하다만, 다른 보육원은 그런 거 없지 않나?
하여간 우리 원장쌤은 좀 이상한데서 완고했다.
“외출?”
“넵.”
“시내 나간다고? 뭐하러?”
“책 좀 사러요.”
“책이야 요 앞에서 사면 되잖아.”
“좀 오래된 책들이 필요하거든요.”
주공필 보육교사가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지 저 불안한 반응은.
평소엔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사람이.
“수상한데. 나가서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냐?”
“설마요. 제가 박종철도 아니고.”
“모르지. 평소에 조용하던 놈들이 한 번 터지면 진짜 미치는 거거든.”
“전 아닙니다.”
“됐고. 너 이거 좀 해 와라.”
“······.”
그러더니 도톰한 종이더미를 내 손에 턱 올려놓는 게 아닌가.
그럼 그렇지.
왠지 썰을 푼다 했더니 시킬 게 있어서 그런 거였다.
“이게 뭔데요?”
“설문조사. 행정부에서 하는 거니까 한 명도 빼먹으면 안 돼. 행여나 이상한 말 쓰지 말고.”
“시설물 만족도, 복지 만족도, 훈육교사 만족도···. 얼레? 이름도 써야 되네. 이야 잘도 이런 걸 시키네요. 누가 여기다 구리다고 쓰겠어요. 쌤들이 다 볼 텐데.”
“난들 아냐. 위에서 하는 일들이 다 그렇지 뭐.”
“여러분의 세금이 이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조사지를 들고 나왔다.
우리 보육원에 재원 중인 아이들은 나까지 포함 스물두 명이다. 모여 있으면 오 분이면 다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럴 리 없으므로 까다로운 미션이었다.
보육원 부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이란 건 상상이상으로 더 작았다.
어딘가에 머리를 콕 박고 숨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고아란 내동댕이쳐진 아이들을 뜻했다. 부모에게든 세상에게든, 기댈 곳이 없어 엎어진 것들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제 스스로 뉘일 곳을 찾아서 그 안에 작은 몸을 더 작게 구겨 넣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현보육원엔 스물두 개의 다락방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16년을 살아온 최고참이었으므로, 꼬맹이들이 어디 처박혀있는지는 눈 감고도 대충 그려낼 수 있었다.
우선은 주방 찬장.
“앗! 한열이 형!”
“이거 써라.”
“뭔데 뭔데?”
“매우 좋음에만 동그라미 치면 돼. 이름 쓰고.”
“응. 근데 나 어떻게 찾았어?”
“나도 옛날에 거기 자주 애용했거든.”
“아하.”
컴퓨터 서버실.
“나는 다스베이더다!!”
“그럼 난 니 애비다. 까불지 말고 이거 써라.”
환풍구.
“여기 시원해서 좋은걸.”
“위험하니까 내려와 새끼야.”
우거진 수풀. 옥상 위 물탱크. 탕비실. 당직실 옆 화장실 안의 청소도구함.
왜 거기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장소마다 새끼 고양이처럼 웅크려있는 것들을 일일이 꺼내어 설문조사를 받아냈다.
이제 남은 개수는 9장.
그럼 나머지는 거기 있겠군.
학습실로 향했다.
블라인드 너머로 소란스러움이 전해져왔다.
꺄르륵 웃는 소리. 즐거운 듯한 말소리. 그 유쾌한 소요騷擾들은 마치 뭉친 실타래 같았다. 아무렇게나 모였는데도 그럴싸하게 동그란 구가 되어 통통 튀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도 저기 있었다.
이젠 아니다.
내게 저곳은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우르르르~하고 번개가 치는데 거기서 갑자기-.”
달칵, 하고 문을 연다.
스위치를 내린 듯이 신속하게 소란이 잦아들었다. 시선이 내게 몰렸다. ‘분위기를 살해한 죄로 당신을 체포합니다.’라며 미란다 원칙을 읊을 것만 같은 얼굴들이었다.
난 그들을 외면하고, 한 명만 꼭 집어 불러냈다.
“배윤하. 잠깐만.”
“······”
아이들의 중앙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녀였다.
동화 속 박진감을 온갖 표정으로 표현하던 소녀는 날 볼 때만큼은 희고 밋밋한 가면을 꺼내들었다.
배윤하가 아이들에게 “잠깐 다녀올게.”하더니 턱턱 걸어 학습실을 나왔다. 뒤로 묶은 포니테일과, 목에 건 카메라가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뭔데?”
< 4. 주현보육원의 아이들 - 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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