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주현보육원의 아이들 - 2 >
“뭔데?”
“설문조사. 주 쌤이 시켜서. 네가 좀 받아다주라.”
“······.”
배윤하가 언짢은 표정으로 조사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턱을 훽 치켜들었다.
“그거?”
“뭐가.”
“고작 그거?”
“그럼 그게 아니면, 뭐.”
“백억 년 만에 얼굴 보이면서 대뜸 꺼내는 말이, 네 심부름이나 하라고?”
말투에 서릿발이 끼었다. 낯빛은 그보다 몇 도는 더 낮아보였다.
그제야 나는 16세 이한열과 45세 이한열 사이의 온도차를 감지했다.
내 습관과 사고방식은 아마 청소년의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심장만큼은 회귀 이전 시점에 멈춰있는지 아주 나태하게 뛰었다. 내 감성은 30년의 세월 동안 풋내에서 쉰내로 질적 변화를 마친 것이었다. 그래서 배윤하에게 서슴없이 말을 건넴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쪽 입장은 다르겠지.
몇 년간 냉전 중이던 상대가 갑자기 허물없이 군다면, 나라도 당황스럽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도 거기에 맞춰줘야겠지.
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상식인이므로.
“우리 사이에 뭐 다른 말이 오갈 게 있나?”
“몰라.”
“너도 모르는 걸 왜 나한테만 그러냐?”
“···그래도 그렇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첫마디를 던질 줄은 몰랐다고!”
“아 그래. 넌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했지? 의례적인 말. 껍데기뿐인 인맥. 쟤들도 그것 때문에 보살피고 있는 거 아냐? 언젠가 다 인맥이 되니까?”
“그래. 그게 뭐 어때서. 왕따인 것보단 낫지.”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뻔뻔함에, 더해서 뼈까지 때려주는 타격 센스.
이게 바로 배윤하였다.
주현보육원의 여왕님. 향기 없는 장미꽃.
서로 한참 딜량을 쌓던 중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왠지 반가웠다. 이런 티격태격하는 상황조차도. 그녀와는 지난 30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됐고. 할 거야 말 거야. 안 할 거면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
배윤하는 내 얼굴과 설문지들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 짧은 순간 눈빛이 휙휙 바뀌었다. 이 와중에도 영악하게 계산을 하는 것이다.
수고를 떠맡는다 > 보육교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 > 인맥 포인트 1점 적립.
대충 요딴 생각이나 하고 계시겠지.
아니나 다를까
“좋아.”
하면서 낚아채듯 탁 받아간다.
쉽네 쉬워.
까다로워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얘만큼 쉬운 녀석이 없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들어가라. 대신 해줘서 고맙고.”
“······.”
돌아가려던 배윤하가 그 순간 마네킹처럼 어색한 관절운동을 해보였다. 표정은 그것보다 더 이상했다.
“···한열이 너···.”
“왜?”
“싸가지가··· 생겼구나? 이게 웬일?”
“그래. 너한텐 여전히 없는 거 같고. 망할년아.”
“···쿡.”
배윤하가 웃었다.
의지와는 별개로 말초단위에서 튀어나온 웃음이었다. 전문용어로는 현웃이라고 하지.
본인도 좀 당황한 듯했지만, 수습은 신속했다. 벗겨진 마스크를 급히 갈아 끼우고 냉정한 여왕님으로 복귀하기까지 정확히 1.5초.
그러나 복도는 음파의 반사 및 확산에 최적화된 구조를 지녔고, 그녀의 ‘쿡’은 메아리가 되어 1.5초보다 오랫동안 세상에 머물렀다.
그렇군.
세상의 비극이란 그렇게 우연찮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나 간다.”
뒷모습으로 말한 그녀의 뒷목이 어쩐지 벌겋다.
그녀가 학습실로 복귀하자 안에서 ‘윤하야 얼굴이 왜 그래?’ ‘한열이가 괴롭혔니?’ ‘우리가 복수해줄까?’ 등등의 잡담이 들려왔다.
난 왠지 유쾌해진 기분이 되어 자리를 떴다.
그녀와는 관계를 개선해두는 편이 좋다.
배윤하는 인맥의 보고다. 거의 살아 숨 쉬는 전화번호부라 할 수 있다. 도움을 받는다면 내 고립된 상황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정도가 그녀를 만나러 오면서 염두에 두었던 스텐스.
그러나 그녀를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하면 좋다’에서 ‘해야 한다’로.
가능하다면 과거 우리가 소울메이트였던 시절만큼 사이를 호전시키면 좋았다.
왜냐면
‘배윤하의 카메라에서 [수학의 정석] 때와 유사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카메라에 깃들어 있던 은은한 색. 그건 분명 보라색이었다.’
탤런트.
배윤하의 카메라에 어떤 탤런트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건 [자색 카르마]의 실마리를 풀어줄 단초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카메라를 만지는 게 쉽지 않다.
그녀는 카메라를 비상식적으로 애지중지한다. 항상 몸에 소지하고 다녔고 피치 못하게 떨어져야 될 때는 몇 중의 잠금장치로 보관했다. 정말 친한 사람 아니면 접근조차 엄금한다.
억지로 만지려 들면?
그대로 절교다.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한 번은 유난 떤다며 고까워했던 놈이 실제로 카메라를 빼앗아서 도망쳤었는데, 그날 배윤하는 경기를 일으키다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 갔었다.
장난이 아닌 거다.
이젠 친구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별 문제는 없지만, 초등학교 때는 정말 저것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트러블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그걸 수습하는 건 대체로 나였고···.
아 진짜.
그때 생각하니까 갑자기 빡치네.
어쨌든.
결론은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카메라에 접촉하려면, 친분을 최대치까지 높여야 된다는 거다.
기분 좋을 때는 정말 친한 친구에 한해 만지게 해줄 때가 있었다.
어떻게 아냐면, 나도 만져본 적이 있거든.
옛날의 이야기다.
지금은 가까이만 가도 귀싸대기로 응답하겠지···.
각설하고.
이제 설문지는 1장이 남았다. 그리고 그 한 명은 배윤하를 버텨낸 나조차 꺼려지는 강적이었다.
어쩌지.
그냥 내가 가라로 작성해서 제출해버릴까.
하지만 지금까지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게 아까웠다. 뭣보다 내가 뭐가 무서워서 그놈을 피할까 싶은 오기도 있었다.
난 보육원 뒷산의 버려진 창고로 향했다.
이곳은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보육원 건물이긴 한데, 거리가 애매한데다 가는 길도 험난해서 어느 순간부터 쓰이지 않았다. 그걸 그 녀석이 언젠가부터 차지해서는 아지트처럼 쓰고 있는 것이었다.
끼익- 오래된 철문이 신음을 내며 열렸다.
천천히 안으로 진입했다.
오래 묵은 녹내와 마른 먼지의 냄새는 구분하기 힘들었고, 또한 구분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엇비슷하게 섞여 있었다. 폐허의 냄새였다.
세월은 콘크리트조차 자연에 알맞게 풍화시켰고 그 위에 이끼와 담쟁이들을 심었다.
한때 창문이었던, 그러나 이젠 창틀 째로 사라진 네모난 구멍은 아침 햇빛을 프리패스로 통과시키고 있다.
요약하자면 인공의 흔적이 오랫동안 깎여온 공간.
그 안에 어느 소년이 이젤 앞에 앉아 붓을 쓱쓱 긋고 있었다. 노란색 까까머리가 동동 떠있는 듯 도드라져보였다. 어쩌다 머무는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 모든 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 모든 풍광을 눈에 담으며 나는 생각했다.
놀구 자빠졌네.
“박종철. 이거 작성해라.”
“으아아아아악!! 깜짝이야!!”
박종철이 펄쩍 뛰었다.
이젤이 쓰러지고 물감이 튀었다. 가만히 소일하던 바람도 후드덕 도망쳤다. 평화는 이 순간 멸망을 맞이했다.
난 멸망을 끌고 온 마왕다운 태도로, 설문지를 내밀었다.
“이거. 빨리 해. 설문지다.”
“너··· 너··· 너···너 뭐야!!”
“멍청해지다 못해 기억상실증까지 걸렸냐? 내 동정을 받고 싶은 게 아니면 그만하지? 자 빨리 해. 형님은 오늘 바쁘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여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거든? 아 진짜. 몇 번 말해야겠냐.”
박종철은 멍청한 표정으로 설문지를 받았다.
“이, 이게 뭐야.”
“설문지라고. 설문지! 설문하는 종이! 설문이 뭔지까지 설명해주랴?”
“아, 아니.”
박종철은 암울한 얼굴로 설문지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곁눈으로 날 자꾸만 훔쳐봤다. 낯빛마저 창백해져 있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태도였다. 현장에서 딱 걸린 도둑조차 이놈처럼 발을 절지는 않을 것이다.
난 이놈이 왜 이러는지 안다.
“그림 잘 그리네.”
움찔.
“저 스케치북들은 다 뭐냐? 엄청 쌓아뒀네. 저거 다 네가 그린 거냐?”
“무무무무무슨 마말을 하느느는지 모몰겐네···.”
박종철이 멸망한 아틀란티스어 같은 말로 변명했다.
“왜? 잘 그리던데.”
“······.”
난 더 이상 말을 늘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잽으로 대충 날린 한 마디조차 크리티컬로 박혔다.
박종철은 이젠 펜을 쥔 손까지 달달 떨었다. 그가 그린 동그라미들은 뻗치다 못해 한 마리 어엿한 성게가 되어 있었다. 대단하네···.
박종철이 작성한 설문지를 머뭇 건넨다.
그 짧은 순간에 몰골이 좀비 수준으로 퇴화했다. 내가 종이를 받는 순간 그 좀비가 내 앞섶을 대뜸 움켜쥐었다. 박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멱살잡이였다.
“···마, 말 할 거냐?”
“뭘?”
“소, 송헌이한테 마, 말 할 거냐고.”
“그러니까 대체 뭘. 목적어는 어따 팔아먹었냐.”
“젠장! 보, 복수할 거잖아. 나한테! 송헌이한테 다 말해서··· 으으···.”
“지랄하구 자빠졌네.”
멱살을 쥔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박종철은 좀비다운 거동으로 뻣뻣하게 휘청거렸다.
“김송헌이 내가 말하면 퍽이나 잘 듣겠다.”
“아무래도 그,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소문을 내볼까 해.”
“어어어어어?!”
“농담이다 새끼야.”
난 파일철로 박종철의 이마를 툭 밀었다. 녀석은 힘아리없이 뒤로 넘어가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놈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다가 창고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지, 진짜로 말하면 안 돼!!”라며 애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저게 박종철의 실체다.
학교에서는 김송헌의 측근이랍시고 일진놀이에 바쁘지만, 막상 보육원으로 돌아오면 내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 다니기 바빴다.
왜냐면 보육원에는 김송헌이 없으니까.
호가호위를 온몸으로 체현하는 새끼 여우, 그게 바로 박종철인 것이다.
저 소박한 취미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송헌이 싫어하니까.
그놈은 미술을 ‘계집애들이나 하는 짓’이라 일축하고 남자라면 모름지기 담배 물고 바이크를 타야 한다고 믿는 고리타분한 양아치였다. 무슨 석기시대 건달인가 싶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박종철은 붓을 꺾었다. 앞서 주인의 심기를 살피는 특급 노예, 아니 오른팔로서 당연한 솔선수범인 것이다···
···는 개뿔 페이크고 집에서 몰래 그렸다! 라는 걸 들키기 싫은 거였다.
물론 잘 숨기고 있다는 건 본인만의 착각이다. 보육원 사람들이면 대충 다 알았다.
솔직히 좀 븅딱같지 않은가?
뭐야 저게.
“···정말. 회귀해도 마찬가지로 답답한 집구석이라니까.”
잠시 푸념.
난 박종철을 미워했다. 정말 징글징글했다. 한땐 이놈 뚝배기 깨고 소년원이나 갈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상종 못할 만큼 증오했느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15년 전.
우리는 같은 해에 핏덩이의 몸으로 보육원에 맡겨졌다. 난 여름이었고 종철이는 겨울이었다 한다.
한창 민주화 뽕에 취해계셨던 원장선생님은 우리 둘에게 이한열과 박종철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때부터, 좋건 싫건 우리는 엎치락뒤치락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형제였었다.
그러나 원장선생님의 바람과는 달리, 박종철은 겁쟁이가 되었고 이한열은 삶에 넌덜머리를 내는 염세주의자가 됐다.
염세주의자는 겁쟁이를 비웃고, 겁쟁이는 염세주의자를 비난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였다.
“다 받아왔어요. 남은 8장은 윤하가 취합해서 가져다드릴 거예요.”
주 선생에게 작성된 설문지를 넘기며 말했다.
그는 내용은 관심도 없는지 대충 던져버리고, 바로 외출증에 도장을 땅 찍어주었다.
“나가서 사고 치지 말고.”
“이옙.”
잠깐 심란했던 마음은 외출증을 받는 순간 치유되었다.
박종철이나 배윤하가 뭐라 까불대건 이젠 아무래도 좋다.
내 손엔 인생을 역전시킬 강력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남은 건 이 무기의 스펙을 확인하고 빈 탄피를 채워넣는 작업뿐. 사소한 과거에 붙들려있을 시간 따윈 없는 것이다.
“가볼까!”
< 4. 주현보육원의 아이들 - 2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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