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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9화 (9/164)

< 5. 카르마Karma - 1 >

5. 카르마Karma

“가볼까! 는 개뿔···.”

아침에 호기롭게 외친 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오전만 해도 분위기 좋았다.

통천시 헌책방들이 보기 좋게 한 곳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야 오늘 뭔가 된다 싶었는데···.

역시 삶은 그리 간편하지만은 않다.

오전을 몽땅 쏟아 부었지만, 탤런트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체력으로 계속 걷다보니 다리근육이 자지러졌다.

‘야! 너 왜 그래!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따위의 의미가 담긴 고통스런 피드백이었다.

단내도 풀풀 풍기고.

길은 복잡하고.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고.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헌책방을 찾다 무심코 종교적 가르침을 갈구하고 있었다.

삶의 무상함 같은 것도 살짝 느껴지는데, 어쩌면 이러다 해탈해버리는 거 아닐까. 헌책방 돌다가 입적. 그럼 유네스코에 오르려나. 아니 그보단 ‘신비탐색 미스터리 제로’에나 등장할 일이겠지···.

묵념.

“그래도··· 가자! 아자아자···!”

기합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이 빙빙 돈다.

열 맞춰 꽂힌 책등만 계속 보다보니 게슈탈트 붕괴가 올 것 같다. 아니 이미 살짝 왔다. 어라 이 책은 좀 크네, 하고 다시 봤더니 가게 간판이었다. 이 집은 왜 간판을 세로로 만든 걸까. 사람 헷갈리게 말이야.

현지책방?

이름도 참···.

“실례합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갔다. 8번째 헌책방이었다.

카운터에 두꺼운 안경을 쓴 노인 한 명이 앉아있고, 안쪽은 기둥이나 벽이 아니라 거기 쌓인 책으로 구조가 결정되는 전형적인 헌책방의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별 다를 게 있길 바라며 발을 디뎠다.

다른 게 있긴 했다.

“살 거? 팔 거?”

앞선 가게들과는 달리 주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와.

신기하네.

앞 가게들에선 직원들이 날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은신의 재능이 생긴 게 아닐까 그만 착각해버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헌책방에선 마네킹을 고용한다는 편견이 굳어질 찰나에 노인이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난 잠시 굳어서 대답하지 못했고, 노인은 그런 날 전신 스캔하더니 갑자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인마! 귓구멍이 막혔냐 입구멍이 막혔냐?! 왜 대답이 읎어?!”

“아··· 네?”

“아 팔 거냐고 살 거냐고?!”

“어, 그냥 구경 좀 하려는데요.”

“뭔 헌책방에서 구경이야 구경은. 봐봐야 헌책밖에 없지.”

“어··· 그래도 가끔 희귀본들이 나오니까···.”

“니미 여기가 박물관인가. 사지도 않을 걸 구경들은 처하고 지랄들이야.”

“안 되나요? 방해가 되면 나가겠습니다.”

“아 할 거면 빨리 하고 나와!!”

뭐야 결국 쫓아내지는 않네?

어쨌든 나는 욕으로 점철된 배려에 힘입어 헌책방을 잘 둘러볼 수 있었다. 역시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쉬움 속에 책방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드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나오기 무섭게 노인이 책방의 셔터를 내려버린 것이다.

왜 그리 신경질인가 했더니, 나가려던 찰나에 내가 들어와서 그런 모양이었다.

“···어디 가시나봐요?”

“보면 몰라? 어디 가니까 문 닫지.”

“아, 예···.”

그러시군요.

신경 끄도록 하자.

그 뒤로 남은 몇 개인가의 헌책방을 다 도는데 오후가 거의 소모됐다.

어느새 해가 땅에 처박히기 직전이었고, 내 기분도 그 비슷하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꼴았는데 결국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이었다.

난 쓰린 속을 쓸어내렸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만.”

정확히는 생각만 했다.

이건 여담인데,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고 현실에서 지껄이는 놈이 있다면 십중팔구 허세다. 나머지는 개뻥이고.

머리든 가슴이든 다 내 몸뚱인데 어떻게 한 쪽만 뜨겁고 차갑나. 무슨 모듈화 바디냐?

여튼 그랬다.

오늘 난 명백히 조증말기의 심장에 지배되고 있었고, 내 머리는 그걸 냉정히 통제하지 못했다. 내심 낙관한 거다. ‘쉽지 않을 거야.’라고 써두고 ‘그래도 뭐라도 되겠지’하고 읽었다.

근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감정의 낙차가 크니 초조함이 밀려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당.

이럴 땐 당을 충전해야 해.

유령처럼 중얼거리며 편의점에 들렀다. 띠링-. 알림 종이 맑게 울렸다.

“어서 와.”

“네에.”

초코바랑 캔커피가 어디에 있을까···.

응? 근데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릴 들은 것 같았는데.

아닌가? 모르겠다. 더 신경 쓰기엔 정신이 없었다.

과자랑 음료 따위를 집어 드는 손이 좀 떨렸다. 더 지체했다간 정신이 훼까닥 나가버려 커피로 정맥주사를 해버릴지도 모른다. 카운터에 살 것들을 신속하게 늘어놓고 말했다.

“그리고 말보로 하나···. 아. 나 지금 학생이었지. 그냥 이것들만 계산해주세요.”

삑. 삑.

그때 바코드를 찍는 소리 사이로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착하네. 정말 샀으면 혼내려고 했는데.”

“그런가요.”

“응. 그래도 안 샀으니까 이번엔 봐줄게.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까 앞으로도 하지 말고.”

“네네, 알겠습니···. 응?”

근데 이 사람은 왜 아까부터 반말이지?

안 그래도 하루를 통으로 날려서 기분이 잣 같은데 이젠 별 이상한 것들이 다···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깜짝 놀랐다.

이현지 보건선생님이 거기 계셨다.

흰색 가운 대신 편의점 유니폼을 입고, 오늘도 여념 없이 미모를 낭비하며 바코드를 찍고 계신 것이었다. 삑-!

“우왘 깜짝이야!! 선생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 내가 나온 게 아니라 니가 들어온 건데?”

“그렇긴 하지만! 그게 맞긴 한데! 아니 그게 아니고!”

“진정하렴. 다 해서 3,100원이야.”

“아, 예. 내 지갑이···.”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는데, 이현지 쌤이 빵 몇 개를 더 얹더니 자기 카드로 띡 계산을 해버렸다.

“내가 사줄게. 보고 있자니 좀 안쓰러웠어. 웬 미라가 걸어 다니는 줄 알았지 뭐니.”

“아, 감사합니다. 근데 절 계속 보셨어요?”

“응.”

쌤이 편의점 전면을 가리켰다. 거긴 안팎이 훤히 보이도록 통짜 유리시공이 되어 있었고, 전망도 좋아 헌책방 일대가 남김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럼 내가 오전부터 빨빨대며 돌아다닌 걸 앉아서 구경했단 건가.

뭔가 부끄러웠다.

“···예에.”

“책 보려구?”

“책이라기보다 헌책이요.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거든요.”

“괜찮은 건 찾았어?”

“글쎄요. 마음에 드는 게 딱히 없네요.”

“그렇구나.”

봉투에 담아주시는 걸 얌전히 받았다.

“감사합니다. 진짜 잘 먹을게요. 근데 쌤은 진짜 여기 왜 계세요?”

“보다시피, 알바 중인데?”

“교사가 투잡 뛰어도 돼요?”

“우리 학교는 사립이라 괜찮아. 교장선생님한테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아마도라니···. 물어봐야죠.”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할 테니까.”

“그것 봐! 본인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네!!”

“진정하렴.”

“네···.”

어쩌다보니 선생님 옆에 앉아 빵을 까먹으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이 작아서 딱히 취식할 데가 없다보니, 선생님이 배려를 해주신 것이다.

“근데 알바는 왜 하세요? 주말까지 일하면 피곤하잖아요.”

“아까부터 이상한 걸 묻네. 알바를 왜 하겠니? 돈 벌려고 하지.”

“쌤 어디 빚지셨어요?”

“그건 아닌데, 돈이 필요한 건 맞아. 것도 꽤 많이.”

“그래요?”

“응. 근데 편의점 알바는 그만 해야겠어. 시간대비 벌이가 별로네. 과외나 번역알바를 해야할까봐.”

그냥 연예계에 진출하시죠. 그 얼굴이면 가만히 뚱하게 앉아만 있어도 사람들이 돈을 갖다 바칠 텐데요···.

이건 팩트다.

당장 이 편의점만 해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바로 옆에 더 큰 편의점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굳이 여길 들렀다.

당연히 남정네들 십 중 한둘은 꼭 번호를 물었다. 그러면 이현지 선생님은 AT필드 급 철벽으로 그들을 격퇴하는 것이다. “핸드폰 없어요.” “집에도 전화 없어요.” “연락은 전보로만 받습니다.” 기타 등등.

그럼에도 끈질기게 물어오면 번호 하나를 가르쳐주고 보냈다.

“그거 무슨 번호예요?”

“우리학교 교장실 번호.”

나는 폐가 터져라 웃어재꼈다.

이현지 쌤과 교장이 사이가 안 좋다는 소소한 정보도 득했다.

그녀 옆에 있다 보니 나름의 뽕이 차오르기도 했다.

번호 획득에 실패한 놈팽이들은 뒤늦게야 날 발견했는데, 그들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여신이 밟고 있는 조개껍데기 정도로 내 존재를 인식한 듯했다. 날 부러워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난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이며 실제로도 의기양양해했다. 이게 울 쌤이 사주신 빵이란다. 느이 집엔 이런 거 없지?!

그러고 있으니 초조한 기분도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럼 저기 있는 헌책방은 다 들른 거니?”

“네? 네. 몇몇 책방은 닫혀있어서 못 가봤지만요. 나중에 다시 와야죠 뭐.”

“그래? 그럼 우리 삼촌이 하는 가게도 갔었어?”

“어··· 삼촌? 삼촌이 저기서 책방 하세요?”

“아 몰랐겠구나. 응. 저 골목 지나서 있는 곳. 삼촌이 내 이름 따서 가게 지었거든. 자주 놀러가기도 했고. 그래서 여기 책방 사장님들하고는 대충 다 안면이 있어.”

“그러시구나···. 그럼···.”

이현지.

···현지책방?

“···아, 그 까칠하시던 노인장.”

“맞아 그 사람.”

“앗, 죄송해요.”

“응? 뭐가? ···아아. 괜찮아. 원래 말을 좀 막하시는 분이거든. 그 정도 첫인상이면 양호하네. 누구는 ‘지랄과 염병이 이종격투기를 하다가 눈이 맞아 태어난 막말계의 사생아’라고 하던데.”

방금 뭔가 엄청난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그걸 지적하기도 전에 쌤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니야. 가끔 나빠질 뿐이지.”

“그건 그냥 나쁜 것이···.”

“그럼 우리 가게 지하에도 들어가 봤어?”

“지하요?”

“응. 우리 삼촌 서책수집가이기도 하시거든. 어지간한 건 팔고, 본인이 아끼는 건 지하에다 놔두셔. 지하 내려가는 문은 찾기 힘들게 해놨고.”

“악취미네요.”

“그렇지?”

귀중한 건 따로 모아 놨다라···.

이거 뭔가 대박의 냄새가 솔솔 풍겼다.

“지하엔 못 들어가 본 것 같아요. 삼촌 분께서 빨리 나오지 않으면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셨거든요.”

“응? 그랬어? 이상하네. 보통은 무관심한 편인데.”

“어딜 나가시는 것 같던데요. 셔터까지 닫으시던데.”

“···그래? 대낮에? 점심시간도 아닌데?”

“네.”

현지 쌤은 의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날 의심하는 건 아니고, 삼촌 쪽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심각한 분위기에 잠시 대화가 멎었다. 그녀는 말없이 탁자만 툭툭 두드리다, 핸드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문득 전화란 재밌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을 위해 만든 도구지만 그렇기에 소통의 단절 또한 극적이고 알기 쉽게 표현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꼭 그러했다.

-뚝.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송수신음이 불과 세 번의 루틴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자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로···”라는 알림이 들려왔다.

빡.

이현지 선생님의 관자놀이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화, 환청인가?

< 5. 카르마Karma - 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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