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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10화 (10/164)

< 5. 카르마Karma - 2 >

“한열아.”

“네.”

“우리 삼촌, 셔터 닫고 어디로 갔는지 혹시 기억나니?”

“어···.”

잠시 생각.

“글쎄요. 대충 어딜 갔는지 정도는 본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네요.”

“책방 거리 가보면 기억이 나겠어?”

“아무래도 조금은 그렇겠죠?”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아, 네. 그럼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야.”

“음··· 그럼 잠깐만.”

이 선생님이 바쁘게 움직이며 편의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신속했다.

내가 응?응? 하는 사이에 실내에 불이 꺼지고 편의점 셔터가 내려갔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 편의점 밖에 서 있었다.

내가 언제 나왔지?

“자, 가자.”

“아예 문을 닫으시게요? 알바가 무단으로 그래도 되요?”

“안 되지만 괜찮아.”

“그, 그런가요.”

“뭐 어때. 내가 매출을 10배는 더 올려주는데. 이 정도는 내 맘대로 해도 돼.”

“그러다 잘리면 어쩌시게요.”

“한열아. 마음을 넓게 가지렴. 잘리는 걸 두려워하지 마. 그건 잃는 게 아니라 자유를 되찾는 것일 뿐이야.”

“뭔가 그럴싸한 말로 글러먹은 행동을 포장하려 들지 마세요.”

“옛날엔 이러면 다 믿었는데. 한열이 변했구나. 선생님은 슬프다.”

“제가 왜 비난받는 포지션이죠.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셔봐야···. 어어엇.”

“자자. 자잘한 건 제쳐두고. 지금은 빨리 가자.”

이현지 쌤이 내 팔을 끌어안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러자 쌤 말씀대로 자잘한 건 제쳐두게 됐다. 이 순간 지극히 청순해진 뇌세포들이 팔에 닿는 감촉 외의 사소한 것들을 다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아앗.

아아아앗.

진정하자. 난 마흔다섯이다. 마흔다섯이라고. 몸은 청소년이지만 영혼은 중년 아저씨란 말이다. 그게 뭐 문제냐고? 마흔다섯이면, 에, 그러니까···, 별 문제없나?

그렇지!

마흔다섯이 뭐!

그 정도면 청춘이지!!

내 안에서 극적인 대동단결이 이루어졌을 즈음, 우리는 책방 거리의 한복판에 도착해 있었다.

팔을 감싸던 따듯한 온기가 멀어졌다.

좀 아쉬웠다.

“어때? 삼촌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이 나겠어?”

“으음···.”

어느새 저녁.

노을빛까지 벗겨내고 새까만 속내를 드러낸 거리는 낮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아 이거 암담한데.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굴려 봤지만, 어둠에 눈이 익을수록 낮의 풍경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내 두뇌는 금세 과부하에 시달렸다.

부탁하시니 오긴 했지만, 처음부터 난 내가 도움이 될까 싶었다.

난 내 기억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내 수많은 무능 리스트에는 암기력 또한 한 자리 차지했다.

나 따위가 반나절이나 전에 스쳐지나간 사람의 족적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런가?

아주 뜬금없게도, 지금 나는 [수리적 통찰력]의 동조율 100%를 찍고, 올림피아드 문제를 풀어냈을 때를 떠올렸다.

난 그 문제를 밑바닥부터 푼 게 아니다.

정수론을 비롯한 여러 체계화된 지식을 토대로 했기에 그나마 칠판 절반분량으로 풀이를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수능시험장을 나온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삭제되었던 것들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얻은 재능은 통찰력이지 기억력이 아닌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기억이란 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의 과정, 논리적 얼개, 이론을 이루는 지적체계들은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과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자극해가며 뇌에 새겨진다.

쉽게 말해.

압도적인 통찰력이 잠재된 기억들을 멱살 잡고 끌어올린 것이다.

“아.”

그렇게 생각하니 뇌가 열렸다.

수학신동 최석현은 초단위로 사건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있었다. 선천적인 게 아니다. 그건 자폐증을 극복하는 자구책 중 하나였다.

기억력은 평범했던 최석현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세상을 수학으로 보면 된다.

까닥.

손가락이 제멋대로 튀어 올라 허공을 툭툭, 두드린다.

한 번의 두드림마다 마음의 파문이 퍼져나가고,

머물러 있던 초침이 다음 단계의 다이얼로 도약하는 것처럼, 사고의 축이 다른 어딘가로 스며들 듯 진입했다.

이곳에서는 색도,

빛도,

그림자도,

사물의 윤곽조차 희미하지만

그 대신에 숫자와 기호가 그 모든 것을 대체한다.

공간과 상태의 변화가 방정식으로 치환되고, 대화를 나누면 그 내용 대신 말의 길이와 어조의 파형을 우선적으로 인식한다.

모든 것이 극단적인 기하학으로 요약된,

수학의 세계.

그렇다면 값을 넣어보자.

드르륵, 하고 셔터가 내려진다.

숫자로 이루어진 한 노인이 무언가를 말한다. 난 뭔가를 답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런 건 방해다.

“······.”

“·········?”

“······.”

다만 우리가 나눈 만큼의 시간이 숫자로 기억된다.

7.8초.

노인은 몸을 돌려 내 앞을 걸어갔다. 점과 선으로만 단순하게 채운 도화지 위를 노인이 걸었다.

난 그 뒤를 따라간다.

하나. 둘. 셋. 넷.

보속의 템포가 엇갈리고, 두뇌가 맹렬하게 가동하며 각자의 발걸음을 함숫값으로 도출해냈다.

내가 그보다 빠르다.

잠깐, 그럼 내가 그를 추월했는가?

아니다.

추월하기 전에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언제쯤? 5초··· 6초···. 8초. 8초다.

그래. 진행경로에 각도차가 있었군. 언제부터 그랬나? 그 각도는? 계산. 계산. 계산이다···.

-툭.

하고 난 발걸음을 멈췄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도 정지.

그 순간 명암과 색으로 치장된 세계가 내 시야에 밀려오며 숫자들을 피안 저편으로 몰아내었다.

그러나 괜찮다.

이제 답은 나왔으니까.

“이쪽으로 가셨어요.”

기억을 쫓아 몸도 같이 움직이다보니, 난 현지책방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갈림길에 서 있었다.

현지 쌤이 그런 날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무당.”

“예에?”

“방금 막 신내림 받은 거 같았어. 오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현지 쌤이었으나 목소리 톤은 살짝 들려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좀 신나신 것 같다.

“근데 이 뒤로는 모르겠어요. 여기까지밖에 못 봤거든요.”

“아냐. 괜찮아. 충분히 도움이 됐어.”

“그런가요?”

“응. 이쪽 거리에서 갈 만한 곳은 몇 군데 없거든.”

그녀는 호쾌하게 걸음을 옮기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근데 통화 내용이 좀 미묘했다.

“창명 아저씨, 저예요. 네. 그냥 별일 없으신가 해서요. 아아. 그럼요. 네네. 알겠어요.”

그 뒤로도 네 통의 전화를 걸더니, 별 내용 없이 안부인사만 교환하고 끊는 것이었다.

명절날 단체 문자 수준으로 영양가가 없었다.

그래서 난 거기 무슨 암호라도 숨어있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님 어떤 의식 같은 것일까? 전장에 나가기 전에 신병정리를 해두는 병사처럼? 내가 이런 비유밖에 떠올리지 못한 건 그만큼 선생님의 표정이 비장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여섯 번째 통화 시도.

-고객 님이 통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로···.

그러자 선생님의 눈매가 살짝 완만해졌다.

내가 제대로 해석한 게 맞다면, 저건 찾던 것을 찾아냈을 때의 표정이었다. 결국 난 더 어리둥절해지고야 말았다.

다행히 그녀가 궁금증 과다로 위독 상태인 나를 발견해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혼자만 걸었지?”

“괜찮아요. 근데 그 통화는 갑자기 왜···.”

“전화를 안 받는 사람이 범인이거든. 네 덕분에 여섯 번만에 찾았네.”

“아? 아아.”

대충 알겠다.

그녀는 방금 이 골목에 속한 상점 주인들에게 전화를 돌린 것이었다.

남자들의 습성 하나. 그건 구린 일을 할 때 전화기가 꺼진 척을 한다는 것이다. ‘아 배터리가 나가서 말이지. 응? 난 그때 지하철에 있었지.’ 지금 찔린다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도록.

어쨌든.

이 이론에 따르면 전화를 받는 것이 곧 무고함의 증거가 된다.

반대로 삼촌은 이미 유죄 인증 끝났고. 더해서 그분과 어울려 구리구리한 작당을 하고 계실 남성A도 전화가 안 통할 거란 추론이 가능하다.

그 논리적 귀결로, 이현지 쌤은 그 남성A의 가게 앞에 섰다.

‘준기마트’라는 상호의 작은 슈퍼마켓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셔터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닫혀있다는 사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쿵.

쿵쿵.

몇 번 두드리더니, 아주 나지막하게 한 마디만 했다.

“삼촌, 거기 있죠?”

안에서 쿠당탕 소리가 들렸다. 명백하게 수상한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저 안쪽은 호러무비의 현장 그 자체일 것이었다.

전화가 계속 와.

그래서 껐어.

그러니까 옆사람한테 전화를 해.

그래서 그 전화도 껐어.

그러자 이번엔 아예 문밖까지 찾아와서 노크를 하는 것이다. 거기다 화룡정점으로 “거기 있죠?”라니.

나라면 지렸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셔터가 올라왔다.

안에서 풍채 듬직한 중년남성이 등장했다. 위로는 포장도로처럼 깨끗한 민머리가 있고 밑으로는 밀림처럼 수북한 수염이 인상적인 아저씨였다. 그 비극적인 불균형을 자랑하는 머리는 현재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그가 말했다.

“으응? 현지 아니냐? 네가 여길 웬 일이냐?”

“사람 찾으러 왔죠. 준기 아저씨는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내가 그랬다고? 어어, 언제 배터리가 다 나갔지?! 미안. 내가 몰랐다 야.”

저거 봐라.

남자와 배터리의 상관관계는 그냥 과학이라니까?

같은 맥락으로 여성이 남성의 배터리를 불신하는 것 역시 과학이었다. 당연히 쌤은 코웃음을 픽 날려주었다.

“됐구요. 저희 삼촌 여기 계시죠?”

“응? 있기야 있지만서두···.”

“삼촌-!!”

“아이코야. 얘, 얘 현지야!”

선생님이 본때 있게 밀고 들어가자 아저씨는 막지도 못하고 팔만 파닥거렸다. 이집 덩치값이 저렴하네. 자주 애용해야겠다.

나는 무심코 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과자와 세제가 같은 칸에 위치할 정도로 작은 가게였다. 더 안쪽에는 주거용으로 보이는 널찍한 단칸방이 있었는데, 사건은 거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삼촌 분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생님과 대치하고 있었다.

저 자세, 내가 많이 해봐서 안다.

저건 도망치다가 실패한 자세다. 도주로는 막혔는데, 다시 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허리를 당당히 피자니 어딘가 껄끄럽다 - 그런 심리가 반영된 자세라 할 수 있다.

“삼촌. 여기서 뭐하세요?”

“아니 현지 네가 여길 웬 일이냐?”

“말 돌리지 마시고.”

“나야 뭐···. 그, 유익하고 건전한, 그 뭐냐, 음, 구경? 그래 구경 중이었지.”

“아, 그래요?”

선생님이 방 안을 쓱 훑어봤다.

이번에도 난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따라했다. 내 눈은 곧 지폐더미와 담배꽁초, 낯선 남자 두 명과 흩어진 화투장들을 차례대로 포착했다.

도박판이었다.

그러나 현지 쌤은 내가 못 본 어떤 것도 찾아낸 듯 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픽 뀌더니 지폐더미 사이에 숨은 종이봉투 하나를 정확히 끄집어냈다.

“그럼 왜 삼촌네 땅문서가 여기 있죠?”

“······어. 그게 말이다.”

“외숙모가 절대절대절대 허튼 데 까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땅이죠? 선산이라고.”

“아니 여기엔 나름의 사정이···.”

“사정은 무슨 사정이에요. 누가 도박판에 앉지 않으면 시내에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어요? 아니잖아요. 삼촌이 자기 발로 걸어와서 여기 앉은 거잖아요. 근데···.”

선생님은 말을 멈췄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긴장상태로 꾹 다물려 있는 저 입매는 누가 봐도 의지로 단속해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나였다.

이 모든 게 교육적으로 부적절한 상황의 전범이나 다름없었고, 나는 학생이었다.

“삼촌은 빨리 정리하고 나오세요. 한열아 미안. 못 볼 걸 보였네. 가자. 선생님이 데려다줄···.”

“가도 좋은데. 그건 두고 가쇼. 아가씨.”

“······.”

건들건들하는 말.

이상도 하지. ‘건들건들’은 의태어지, 의성어가 아니다. 그런데 저 남자가 하는 말은 참으로 건들건들하게 들렸다.

남자는 화투판에 한 다리를 걸치고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바짝 친 모히칸 컷에 이마에서 미간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완벽하다.

완벽한 건달이었다.

< 5. 카르마Karma - 2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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