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1화 (11/164)

< 5. 카르마Karma - 3 >

“싫다면요?”

“아니. 싫고 어쩌고 할 게 아니지. 저 아저씨는 그걸 이미 걸었고, 난 그걸 이미 땄고. 그럼 내꺼지. 안 그래? 남의 걸 가져가는 걸 뭐라 하더라···. 아, 도둑질? 그래 도둑질은 나쁜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나? 응? 선생니-임?”

“······.”

“어이구 눈깔 무셔라. 그렇게 보셔도 할 수 없어. 아 내 걸 내거라고 말하는데 왜. 그게 뭐 죄인가? 그렇게 막, 응? 선생님이 사유재산을 막 침범하고 그러시면 안 되지. 거기 학생이 뭘 보고 배우겠소? 나 이래봬도 공산당이 싫은 민주시민이야?”

“이게 왜 당신 겁니까? 도박은 불법이고, 불법으로 취득한 물건은 소유권 인정이 안 되죠.”

“아아, 우리 선생님 사회 과목이셨소? 법 좀 아시나봐?”

“당신이 어떻게 주장하든 그건 당신 주장일 뿐이에요. 계속 억지를 부리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경찰! 으응으응. 안 돼. 그건 안 될 말이지. 우리 공무원분들께서 얼매나 불철주야 힘쓰시는데. 우리까지 귀찮게 만들 수야 있나?”

“그러니까 여기서 이만 찢어지죠. 각자···.”

텅-!

남자가 두터운 가죽책을 내리 꽂듯이 화투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책 중간쯤에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휙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가죽책은 무언가의 장부였다.

“···그건.”

“아 거기 삼촌께서 우리랑 하루이틀 손을 섞었을까? 솜씨 좋-으시던데. 그제는 삼십 만원이나 따셨고. 일주일 전에는 와, 오백이나 먹어치우셨네. 그 돈 다 어디 갔을까?”

“······.”

“이봐 아가씨. 소유권 어쩌고 말할 거면 일단 당신 삼촌 주머니부터 털어내. 경찰? 불러보시던가. 나야 뭐, 내 집 같아서 별 감흥도 없지마는. 거기 삼촌께선 나이가 있으셔서, 응? 유치장 신세 지시면 등골이 좀 배길 터인데?”

빡.

현지 쌤의 관자놀이에서 또 다시 괴성이 터졌다. 응? 그게 환청이 아니었나?!

그녀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원래도 무표정했지만 이번 것은 질이 달랐다.

‘현지 쌤 무표정의 심리별 분류’라는 논문을 쓴 이한열 박사에 따르면, 사실 관찰만 잘하면 그 무표정 안에서도 이런저런 감정을 읽어내는 게 가능했다. 오히려 무표정이기에 쉬운 면도 있다. 백지에 찍은 빨간 점이 도드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런데, 이 분야의 권위자인 나조차도 이번 표정은 읽어내지 못했다.

내 앞에선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감정이라는 뜻.

다행히 이번엔 선생님의 관자놀이가 정답을 알려주었다.

빡.

선생님은 빡치신 것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녀가 땅문서를 쥐어 으깨듯 구겨버리고는, 돈더미 위에 팽개쳐버렸다.

남자는 그걸 또 실실 쪼개며 보고 있고.

아오. 저거 얄미워 죽겠네.

“삼촌은 일단 나와 보세요. 얘기 좀 하죠.”

“어? 어어어···.”

선생님은 서릿발 휘날리며 가게를 나갔고 삼촌 분은 그 서리를 맞으며 뒤따랐다.

영락없는 도살장행 가축 꼴이었지만 난 그의 명복을 빌어주지 않았다.

그 대신 화투판을 지긋이 쳐다봤다.

지긋-

“왜. 학생도 화투에 관심 있어?”

건달은 아까부터 일관되게 재미지다는 태도였다.

그에겐 삶을 반쯤 망쳐버린 사람 특유의 달관이 느껴졌다. 절반이 없으므로 심신이 그만큼 가볍다.

건들건들 : 경망스럽고 가볍게 흔들리는 모양.

그렇기에 그들은 건들건들 행동한다.

짊어진 것이 없으므로 가볍지만 지지해주는 근본이 없으므로 흔들린다. 건들건들, 그래서 건달인가?

여튼 그런 자들의 것이 달관이라고 무거울까. 그조차 가볍디가벼워 쉬이 휘발되고 말 것이다.

기실 반쯤 망쳐버린 인간일수록 남은 반절의 삶에 크게 집착하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난 저런 자들을 잘 알았다. 비열한 사기꾼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화투 관심 없는 고딩이 있나요?”

“그렇지! 요새도 이런 참된 학생이 다 있네. 맞어. 화투란 인생이야. 학생은 인생 계획을 세우는 단계이고. 그러니 학교에선 정식으로 화투를 가르쳐야 된다 이 말이야! 안 그래 학생?”

“진짜 가르치면 재밌긴 하겠네요. 그럼 성적은 끗발순인가?”

“으허. 으허허허. 글치글치. 이 학생 재밌네. 곤조가 있어!”

“감사합니다. 저 그럼 화투짝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나요?”

“그럼그럼. 우리 타짜 꿈나무한테 기회를 드려야지.”

난 사양하지 않고 화투판 앞에 앉았다.

남자는 양손으로 번갈아 원을 그려가며 화투짝들을 한데 그러모았다. 흩어진 조각들이 집결할수록 묘한 느낌이 강렬해졌다.

묘한 느낌.

그래, 수학의 정석에서 수리적 통찰력을 얻었을 때. 그리고 배윤하의 카메라에서 보라색 탤런트를 발견했을 때. 바로 그때와 유사한 그 느낌.

이윽고 패들이 전부 모여 한 곳에 가지런히 쌓이자, 화투 색을 닮은 붉은 빛깔이 거기에 깃들었다.

그렇군. 흩어져있을 땐 좀 애매했는데.

화투패 50장이 다 모여야 탤런트가 제대로 응고되는 건가. 이런 경우도 다 있군.

“자, 한 번 기리해봐라.”

“그럴까요?”

기꺼이 손을 뻗었다.

===

탤런트 [타짜 귀수의 손재주](Rank D)와 접촉했습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Yes/No)

===

당연히 Yes다.

벌써 세 번째 경험인 파노라마 시네마틱이 내 의식을 잠식했다가, 툭 뱉어내듯 현실로 복귀시켰다.

이 감각은 마치 꿈같다.

황홀하다는 뜻이 아니라, 꿈의 속성과 닮았다는 거다. 경험할 때는 수십 년의 일생을 디테일하게 조망한 것 같은데, 깨고 나면 드라마 한 편 본 정도의 기분만 든다.

그 간극을 조정하기 위해서인지, 깬 직후 얼마 동안 멍해지는 것도 비슷했다.

그래도 두어 번 해봤다고 제법 익숙해졌다.

난 신속하게 신색을 회복했다.

그리고 어떤 내색도 없이 태연하게, 위쪽의 화투 몇 장을 밑면에 괴며 기리를 마치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오. 잘 하네! 어디 섞어도 봐봐. 왼손으로는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두드리듯이.”

“음. 이렇게요? 으음. 아닌가? 요로케? 으으음···!”

두 손으로 화투장을 섞는다.

놀랍도록 느렸다. 화투보다는 젠가 게임에 어울릴 법한 속도였다. 신중함이 좀 과해 보이겠지만 나한텐 이 정도가 딱 맞다.

비밀을 말해주지. 사실 화투짝들은 살아있다. 대개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그들은 내 손에 쥐였을 때만 숨겨둔 생명력을 드러내며 호시탐탐 탈출을 꾀한다.

난 그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교도관인 것이다.

때문에 내 손안에선 착착 감기는 소리 대신 화투의 절규 같은 소리가 났다. 틱. 티익? 탁턱? 트득특특.

아 이런.

결국 화투짝 두 마리가 탈출에 성공했다.

암녹색 매트가 사쿠라와 단풍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졌군. 그러나 좋은 승부였다···.

나는 의연히 패배를 인정하며 손을 멈췄고, 날 지켜보던 세 명의 도박꾼들은 날 대신해 참담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

“역시 화투는 심오하군요. 만만치 않아요.”

“···아니. 다르다고 생각해···.”

이해한다.

내게 어머니가 있었다면, 그녀조차 하해와 같은 관대함으로 웃으시면서 “응. 구려”라고 말하셨을 것이다.

“거, 뭐냐, 학생. 너무 실망하진 마. 화투라는 게 말이야 운칠기삼이거든. 거 손기술 좀 좋다고 장난치다 손모가지 날아가는 놈이 얼마나 많은데? 차라리 운빨 믿고 밀고 나가는, 응? 싸나이 정신! 그런 사람이 오히려 크게 되고 돈도 따고, 글치? 이 화투라는 게 또 그런 묘미 아니겠냐?”

“격려해 주신 건가요? 감사합니다. 근데 아무래도 전 화투랑은 안 맞는 거 같네요.”

난 화투를 얌전히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래도 진짜 선수들이라면 손기술이 많이 중요하겠죠?”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근데 그것도 일정 이상이면 다 비슷비슷해. 결국 승부가 갈리는 건 여기랑 여기지.”

건달이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차례로 짚었다.

“머리랑 가슴이요?”

“그래. 판을 계산하고 흐름을 읽고 배짱으로 밀어붙이고···. 그걸 소홀히 하는 놈일수록 좋은 선수는 못 된다.”

“그렇군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제가 혹시 형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에이, 뭐 좋은 이름이라고···.”

건달은 손사레를 쳤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는지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이름은 됐고. 그냥 귀수라고 불러. 한창 때는 다들 그렇게들 불렀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전 일행에게 가볼게요. 시간이 늦어서.”

“어어. 그려 잘 가고. 아, 가는 길에 말 좀 전해주라. 할배한테.”

“네? 어떤···.”

“도망가도 소용없다고. 그리고 판돈 달랑달랑 하실 텐데, 그 뭐냐, 그 예-쁜 선생님 담보로 올리면, 내 특별히 비싸게 쳐드리겠다고 해드려. 알겠지?”

“···예, 그러죠.”

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물론 목의 각도가 내 존경심의 정도를 의미하진 않는다. 더 이상 역겨움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더 숙였을 뿐이니까.

방을 나오면서 밀어두었던 상태창을 확인했다.

===

탤런트 : [타짜 귀수의 손재주](Rank D)

- 이 탤런트는 손의 민감성, 유연성, 응답성 등 기예의 재능 전반에 관여합니다.

- 동조율 : 51%

===

귀수.

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니, 도박판에 들러서 패 한 번이라도 돌려본 사람이라면 저 이름을 모를 수 없다.

활동한지 고작 일 년 만에 전국 모든 도박장에 블랙리스트로 등록된 희대의 도박사.

단돈 십만원으로 하우스 하나를 통째로 털어버린 일화는 그 바닥에서는 이미 전설이었다.

특히나 손기술이 훌륭해서, 당시 내로라하는 타짜들조차 그의 기술을 베끼기 위해 혈안이었다.

아마 도박이 불법만 아니었으면 [귀수처럼 밑장빼기] [귀수에게 배운다, 한끗의 예술] 같은 자기계발서가 서점을 점령했을 것이다.

그래서 귀수鬼手다.

그 누구도 간파할 수 없는 귀신의 손.

“···흠.”

그런 사람의 재능을 얻었단 말인가.

내가 타짜 지망생이라면 천고의 기연이었겠지만··· 글쎄, 나는 좀 심드렁했다.

난 도박에는 관심이 없다. 애초에 돈을 벌고 싶다면 회귀지식을 쓰는 게 수천배는 더 쉽고 안전하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이 시점에 귀수의 능력은 긴요하게 쓰일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면

===

[타짜 귀수의 손재주] : 관련 퀘스트 발생!

- 보상 : 적색 카르마.

===

탤런트를 얻은 순간 뜬금없이 떠오른 퀘스트

이걸 제대로 수행하려면 귀수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르마 포인트 수급에 관한 최초의 실마리다.

이 기회를 놓치면 속이 꽤 쓰릴 것이었다.

나는 일단 [타짜 귀수의 손재주]에 카르마를 투자했다.

붉은빛의 문자.

그렇다면 쓰이는 것도 적색 카르마일 것이다.

‘통찰력은 파란색. 손재주는 빨간색인가. 대충 무슨 구분인지 짐작이 가는 걸.’

랭크가 D라서인지 교환비는 1:1이었다.

49을 추가로 투자하니 동조율은 완전히 100%가 됐다.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통찰력을 얻을 때는 뇌가 뉴런 단위로 일깨워지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근섬유 하나하나가 올올이 파헤쳐지는 듯했다.

몇 번 쥐었다 펴니 위화감은 금세 가셨다.

밖으로 나가니 여인과 노인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여인의 두 배는 살았을 남자는 온몸으로 허송세월을 증명하는 듯했다. 거의 떼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괜찮다니까! 야 현지야. 이 외삼촌 그리 못 믿니? 널 업어키운 날 못 믿는단 말이야?”

감정에의 호소.

“그리고 마! 내가 지금은 책방이나 하고 있지마는! 소싯적에는 내가 아주, 응? 돈다발로 불쏘시개를 쓸 만큼 잘 나갔다! 내가 한 방이 있는 남자여!”

허세와 추억 팔이.

“아 몰라몰라! 여기서 파토내면 내 돈만 날리는 건데! 난 그 꼴 못 본다! 너 때문에 내가 쌩돈 날려야 되겠냐?!”

책임전가까지.

남자를 없어보이게 만드는 모든 기술들이 다 동원되었다.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일까.

아까는 그래도 자기 잘못을 아는 기색이었는데, 궁지에 몰리니 이젠 막나가는 전략으로 선회한 듯 보였다.

선생님은 거리에 드러누운 5살 꼬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놔두면 실시간으로 사리를 생성해버릴지도 몰랐다.

선생님의 위장건강을 위해 나는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잉? 넌 누구냐?”

난 정중히 인사했다.

“선생님 학교 제자입니다. 우연히 뵙게 되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학생이면 인마! 빨리 들어가서 공부나 할 것이지. 이 밤에 뭘 싸돌아다니고 있어?!”

“삼촌은 좀 조용히 있어 봐요. 한열아 미안. 선생님이 신경을 못 썼네. 미안한데 먼저 들어갈래? 오늘은···.”

“아뇨아뇨. 그게 아니라. 진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난 가게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소리죽여 말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 전문 사기도박꾼이에요.”

< 5. 카르마Karma - 3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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