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카르마Karma - 5 >
패가 돌아간다.
종목은 섰다.
난 적당히 판을 지켜본다는 생각으로 게임에 임했다.
“백만원.”
“받고 백만원 더.”
“난 죽어.”
“저도 죽어요.”
“까보쇼.”
“일곱끗.”
“아이구야. 한끗이 오늘 세구나야. 난 여덟끗.”
“젠장할. 손바닥에 귀신이 붙었나.”
“꼬우시면 무당이라도 부르시던가. 자. 제가 선 잡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따려고 한다면 승률을 두 배는 높일 수 있었다.
화투판에 필승법은 없지만, 이 판에는 적어도 지지 않는 방법은 숨겨있었다. 난 그걸 알았지만 아직은 때가 안 왔음을 알기에 조금씩 잃고 조금씩만 땄다.
“어, 이번엔 학생이 땄네? 이야. 거봐. 손기술 거 없어도 운 좋으면 따는 거라니까?”
“초보자의 운이죠 뭐. 이거 아저씨가 좀 섞어주시겠어요? 제가 좀 서툴러서.”
“그럼그럼. 해드려야지. 딴 사람이 왕인데.”
건달은 착착착, 찰지게도 화투장을 섞었다.
그는 마치 과시하듯이 패를 만졌다. 그건 대가의 풍모라기보다 서커스에서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려하지만, 경박하다.
그러나 하수들에게는 절제된 예술보다 눈 돌아가는 묘기가 더 신기한 법.
난 그 하수에 빙의해서 건달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와아. 아저씨 대단하시네요. 타짜세요? 타짜?”
“타짜가 뭐 별건가. 딸 때 딸 줄 알면 타짜지.”
“오올, 좀 멋진 듯. 그럼 아저씨 카드는 다 만질 줄 아세요? 트럼프도?”
“포커 못 치면 도박꾼이라 할 수 있겠나. 난 화투보다 포커를 더 잘해.”
“이야아.”
다시 패가 돌아간다.
포석에 포석이 쌓이고, 모두가 음험한 눈빛과 가슴 속 칼을 숨기며, 판은 바야흐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스토리는 이미 세워졌다.
근 몇 판 동안 삼촌은 내리 지고만 있었다. 반대로 김씨 아저씨는 승승장구. 여기서 또 지면 흐름을 돌이킬 수 없을 것임을 깨닫는다.
이윽고 패를 받는 삼촌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블러핑이다. 잡고 있는 패는 무려 구땡. 계속된 패배도 김씨를 방심시키기 위한 포석. 건달과 삼촌이 이 판에 승부를 보자며 눈빛을 교환했다.
“···올인. 다 밀어넣어.”
절망 속에서 자포자기하는 듯이 올인. 지더라도 장렬하게 산화하겠다, 그런 심사를 표현하는 게 관건이다.
김씨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가.
“받지. 나도 쫄릴 거 없거든.”
“전 죽습니다.”
“이거 집단 폐사로구만. 나도 죽어요.”
“까 봐요 까 봐.”
삼촌의 낯빛이 지저에서 에베레스트 꼭대기로 워프를 한 것처럼 급속도로 변했다. 화산처럼 환희를 터뜨린다.
“구땡! 구때애앵!! 시발 김가놈아!! 이번엔 내가 이겼드아아아!! 니가 이거 보다 높냐?! 어?! 높냐고!! 어!! 높네!! ···높아. 왜 높지.”
김씨 아저씨가 광땡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삼촌은 에베레스트 공기만 맡아보고 다시 지저로 추락했다.
“···이게 뭐냐. 어, 어이. 귀수 양반. 이, 이게 무슨 일이여?”
“?? 날 왜 찾으쇼?”
“아, 아아니. 이, 이게 뭐냐고!”
“구땡이네. 거 아쉽게 되셨소. 높은 팬데. 근데 그게 뭐?”
“······!!”
건달은 낯빛 하나 안 변한 채 능글능글 웃고,
그제야 삼촌은 자신이 역으로 수술 당했음을 깨닫는다. 멍하니 김씨 아저씨가 돈을 쓸어가는 것을 보지만, 어쩔 도리는 없다.
이 판이 다 구라라고 폭로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걸 폭로하려면 자신이 짜고 쳤다는 걸 먼저 언급해야 한다. 말한다 해도 김씨와 건달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결국 자폭밖에는 안 되는 선택.
판을 보니 준기 아저씨도 어느 정도 수익을 올렸다.
아마 그도 한 패겠지. 아니라도 자신의 편을 들어줄 리는 없다. 그는 땄으니까. 교묘하게 잘 설계된 판이었다. 영락없이 당했다.
삼 년 전처럼···.
삼촌은 그렇게 호구불변법칙을 증명하며 침몰했다.
“흐어어, 으흐어어어···.”
그는 한 마리 슬라임이 되어 구석 장판에 처박혔다. 이제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자, 한 분은 나가리 되셨고. 어째, 더 하실 텐가요?”
“난 딸 만큼 딴 거 같네만. 더 하자면 할 수는 있고.”
“나도 좀 아쉽네. 이제 기세 좀 탔는데.”
“그럼 몇 판만 더 하죠. 학생은?”
원래라면 여기서 판을 접었겠지. 원래 목표하던 바를 이루는데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판에는 먹음직스런 호구가 한 명 더 앉았다.
호구를 잡지 않으면 꾼의 자격이 없다 할 것이므로, 오늘의 게임은 계속된다.
나를 털어먹기 위해서.
난 더할 나위 없이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그럼 당연하죠! 전 이제 막 시작했는 걸요!”
“그래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새시대의 노름꾼이지!”
게임은 지체 없이 계속됐다.
초반 몇 판은 별 이변 없이 진행됐다. 누군가가 따고 누군가가 잃었다. 겉보기에는 그렇게만 보이는 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제법 날카로운 수들이 장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게 보였다.
‘···제법.’
호구를 잡는답시고 첫판부터 몰아치면 안 된다.
대개의 호구는 분위기를 잘 타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쉽게 기세등등하기도 하지만 쉽게 겁을 먹기도 한다.
계속 지기만 하면 판에서 도망친다. 나처럼 순박한 컨셉은 더욱이나 그리 보였을 것이다.
때문에 살살, 기세를 올려주는 단계가 필요하다.
몇 번 잃다가, 크게 한 번 따게 해준다.
딴 것을 또 몇 번에 걸쳐 잃고, 다시 역전극을 하듯이 자금을 복구.
절묘한 밀고 당기기다.
이런 극렬한 감정 기복에 평범한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린다. 심장이 살살 달아오른다. 손을 뻗으면 다 쥘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한끗이 모자라다. 등골이 간질간질한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때가 꾼이 수작을 걸어오는 타이밍이다.
그런 절묘한 설계가 나를 둘러싸고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난 모르는 척, 이번엔 농촌청년에 빙의하여 순박하게 시무룩해지거나 웃었다.
“저 일곱끗! 제, 제가 딴 거 맞죠?! 그죠?!”
“에이 개패네. 학생 오늘 운빨 좀 오르네?”
“우와아. 이게 다 얼마야. 으히히히···.”
“아 웃지 마! 잃은 사람 속 쓰리게···.”
“아 왜요. 저 같은 성장기는 엔돌핀을 자주 발산해줘야 키가 큰다구요. 으히히.”
“니미 똥이다.”
판 위에 화투짝들이 흐트러져있다.
그걸 보는 건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 흐트러진 모습이 마치 호구의 심리상태처럼 보였겠지.
잘 모아서 꿀꺽 해버리면 되는 무방비의 패들.
풀만큼 풀었으니, 이젠 빼먹을 때가 되었다··· 그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담 판에 두고 보자고. 빨리 해 빨리. 뭐, 이번에도 내가 섞어줘?”
물으면서도 패에 손을 가져가는 건달.
그러나 난 그를 제지했다.
“아뇨아뇨. 이번엔 제가 섞어볼게요. 하시는 것들 보니까 저도 할 수 있을 거 같더라구요.”
“아 그래? 그럼 해봐야지. 다 연습하면서 느는 거야.”
건달의 표정이 흡족하다.
호구 새끼가 적당히 잡아먹기 좋게 흥이 올랐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사실, 흥이 오른 건 맞았다.
그게 저자의 바람과는 좀 다른 방향일 테지만.
패를 모아 한 손에 쥐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패를 섞는다.
처음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듯 여유롭게.
그러나 조금씩 빨라진다.
착-착-착-착착-착착-착착착착-.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속도가 끝도 없이 배가된다.
내 손 안에서 반항기 넘치는 생명력을 구가하던 화투짝들은 이제 없었다.
그럼 다 시체가 됐는가? 아니다. 이젠 다른 의미로 살아 숨 쉬었다. 그들은 내 터치를 받고, 핑퐁을 치듯 알맞은 피드백을 되돌렸다. 우리는 합이 딱딱 맞는 협조자였다.
착착착-착착-착.
착.
점점 느려진 손을 완전히 멈춘 뒤, 나는 좌중을 심드렁히 훑었다.
그냥 화투 섞기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기술.
그러나 그걸 다름 아닌 내가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당황했다.
맑은 하늘이 훤히 보이던 창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떼고 보니 그 뒤편에는 시커먼 콘크리트가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잘 섞인 화투짝들을 판 위에 무심하게 얹었다.
“기리하시죠.”
패를 돌리며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기-여 디여-어차. 뱃놀이 가-잖다. 부-딪 히는 파-도 소리.
말 그대로 흥얼거림. 말소리는 뭉개져 웅얼거릴 뿐이고, 음정은 형편없이 플랫됐지만 그러나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읊조림.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다 몰라도
한 사람에게만큼은 꽂히듯이 들렸을 테니까.
건달은 죽은 낯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얼른 시작하시죠.”
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에이 뭔 개패가 계속 나와. 이러다 개장수하겠네. 죽어요.”
오땡으로 죽는다.
“백 받고 백 더. 남자가 배짱이 있어야 되거든요. 형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셨잖아요? 그죠?”
네끗으로 딴다.
“묻지 마요. 아 나 묻는 거 싫어. 삽질에 트라우마 있단 말야.”
끌어들이는 것을 튕겨낸다.
죽으라고 준 패에서 배짱을 튕기고, 먹음직스런 패를 과감히 뱉어낸다. 함정들은 얄미울 정도로 쏙쏙 빠져나간다.
그렇게 몇 판.
분위기가 기이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누구도 모를 수 없을 즈음.
나는 말했다.
“준기 아저씨.”
“···응? 으응? 왜, 왜?”
“여기 비상구 같은 거 있어요? 저기 셔터 문 말고. 위급할 때 빠져나갈 수 있는 문.”
“저기 화장실 옆쪽에 안에서만 열리는 문이 있긴 한디. 근디 그건 왜?”
“아뇨, 별 일은 아니고 그냥···.”
난 건달을 슬쩍, 보는 듯 마는 듯 흘기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누구 하나 도망갈 일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때 그의 손이 잠깐 움찔했던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각자가 패를 든다.
판의 흐름은 소강상태라 할 수 있었다. 저쪽은 날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떡밥을 던졌다.
오땡, 육땡, 칠땡까지. 그러나 내가 가시 없는 떡밥만 귀신같이 먹고 달아나면서 판이 경직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젠 아주 작정한 듯했다.
내 손 안에 있는 패는
장땡.
“오백.”
“받고 오백 더.”
“에라 모르겠다. 가즈아아!”
이윽고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바로 걸지 않고 실실 웃으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어기-여 디여-어차. 뱃놀이 가-잖다. 부-딪 히는 파-도 소리-.
“갑자기 뭔 노래를 부르고 지랄이래. 됐으니까 빨리 걸든가 죽든가 혀.”
“응? 이 노래 모르세요?”
“뱃노래 아녀?”
“맞는데, 잘은 모르시네. 제가 아는 어떤 유명한 분이 말이죠, 중요한 국면마다 이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그때마다 호구 죽지, 타짜 죽지, 도박장 사장도 죽지. 그래서 그 분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죠.”
이제 건달은 손까지 미세하게 떨어댔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지 못하고 제 패에만 뚫어져라 박혔다.
“귀수가 삼도천 뱃노래를 부른다-.”
“···거 알았으니까. 빨리 걸기나 하지?!”
건달이 빽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위협적이지 않고 쫓기는 자의 다급함만 가득했다.
나는 입을 빼죽 내밀었다.
“성질 참 급하셔. 사부님한테 그렇게 안 배웠을 텐데.”
“···너···.”
“판에 끌려 다니지 말고 흐름을 타라. 늘 강조하셨던 말이잖아. 고작 몇 판 엎어졌다고 흥분하기는. 부끄럽지도 않냐?”
“너 대체 누구···!”
“전 죽어요.”
그러면서 패를 판 위에 툭 던졌다.
“장땡이지만.”
“···뭐?! 장땡을 버려?”
준기 아저씨가 깜짝 놀란다. 이 아저씨는 사기도박에 관여하지 않은 모양이지. 그럴 것 같긴 했다. 사기 치기엔 너무 담이 작은 스타일이다.
난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 화투패 누가 가져왔어요? 새것 뜯은 거 아니죠?”
“어···어, 그랬지? 저 귀수라는 양반이.”
“귀수는 무슨. 그냥 사기꾼이지. 아저씨는 사땡이죠?”
“···어, 어어어?! 어떻게 알았어?”
“저기 김씨 아저씨는 아홉끗이시고. 그리고 여기··· 자칭 귀수 양반께선 광땡이시네. 그것도 삼팔광땡. 이거 다 표시목이에요. 아저씨들 속으셨다고요.”
침묵이 방을 점령했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모두가 잊고 있던 삼촌이었다. 슬라임에서 순식간에 인간으로 진화를 마친 그가 외쳤다.
“······뭐, 뭐야! 그거 진짜야? 다들 까봐! 까보라고!!”
즉각 반응하지 않자, 삼촌은 김씨 아저씨에게 달려들어 패를 빼앗았다.
당연히, 그것은 아홉끗이었다.
“사기!! 사기판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러니 내 돈을 다 꼴지!! 이 나아-쁜 놈드으을!!”
거기 본인도 가담했다는 사실은 완벽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윽고 개판이 성대히 펼쳐졌다.
노인이 날뛰고, 준기 아저씨가 그를 말리고, 김씨는 이젠 정말 석상이 된 것 같고,
건달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너 누구야···! 대체 뭔데···.”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왜 여기 있느냐가 중요하지. 스승 사칭하는 것, 뭐 좋아. 근데 그러려면 배운 것만큼은 제대로 따랐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서민들 등쳐먹지는 말라고 그렇게 가르쳤거늘.”
난 눈을 부릅뜨고 물러섬 없이 그와 마주했다.
“빨래질은 냇가에서나 했어야지. 압구정동 발바리, 이 호로간나새끼야.”
< 5. 카르마Karma - 5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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