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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14화 (14/164)

< 5. 카르마Karma - 6 >

내가 [타짜 귀수의 손재주]와 접촉하면서 얻은 건 단순히 재능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게 지금 당장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내가 얻은 건 재능이지, 버튼 누르면 발동되는 스킬 같은 게 아니다.

그 귀수조차 손기술들을 다 습득하고 체화하는데 수년이 걸렸다. 내가 어설프게 따라해 봐야 웃음거리일 뿐.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바로 귀수의 기억.

칼날 위를 기꺼이 걷던 강렬한 경험들.

만용과 대담함을 구분하는 냉철한 판단.

표식목을 구분하고 읽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도박판의 A에서부터 Z까지, 마치 직계 제자가 된 것처럼 귀수의 족적을 따르며 그의 모든 것을 배웠다.

이상도 하지.

[수학 신동의 통찰력]을 얻을 때는 모든 게 꿈처럼 모호했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선명히 뇌리에 남은 것이다. 그냥 오래된 기억 같다.

‘아마도 초기 동조율이 51%나 되어서 그렇겠지.’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겠지.

그때,

발바리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더니 영문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크히, 으히히히. 크하하핫하학학!!”

좌중의 모두가 그의 광소에 움찔했으나, 나는 홀로 담담했다.

귀수의 기억에서 봐서 잘 아는데,

쟤는 지가 쫄리면 저렇게 웃어재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다.

초짜들에겐 통하겠지만, 알 만한 사람들한텐 같잖을 뿐이다. 그리고 난 알 만한 사람이었다.

“쿠흐흐.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이야. 와. 으핫핫. 내가 학생한테 한 방 먹었네. 이야. 시버어얼. 이 천하의 귀수가···.”

“뻥은 그만 쳐라. 발바리. 허세도 그쯤 하고.”

“···후···.”

“없어 보인다. 쪽은 팔려도 체면은 챙겨야지?”

“젠장. 징하게 물려버렸구마이.”

그가 웃음을 멈추고, 턱을 살짝 들어 내려다보듯 나를 보았다.

“근데 어쩌지? 난 사기 친 적 없는데?”

“표시목이 여기 떡하니 있는데 무슨 개소리야. 이거 네가 가져온 거 아냐?”

“맞는데, 글쎄. 난 이걸 사부님한테 물려받았을 뿐, 표시목인지는 몰랐어. 이야. 진짜야! 내가 그걸 알았으면 벌써 여기 다 털어버리고 떴지 않겠어? 안 그래?”

“···별 말도 안 되는 수작질을.”

“야, 근데 그러는 넌 그걸 어떻게 알았냐? 난 그게 더 신기하네. 오히려 네 쪽이 꾼인 거 아니냐? 처음에 화투 못 만지는 척 했던 것도 이상하고. 내가 이 화투패를 들고 다니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지. 나한테 누명을 씌워서 네가 이 돈 다 먹으려고. 어때. 괜찮은 추리 아니냐?”

“······.”

그러자 이목이 내게 집중됐다.

발바리 저놈이 사기꾼인 건 맞지만 이쪽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시선으로 보였다.

그래.

이놈이 옛날부터 개소리에 탁월한 재주가 있음을 귀수는 익히 알았다.

분명 왈왈거리는데 어째 사람소리 비스무리하게 들리는, 그래서 개와 사람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그런 혓바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발바리란 별명이 붙은 거기도 하고.

근데 어쩌지

난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

“그래? 그럼 지금껏 네가 그만큼 딴 게 다 실력이다?”

“당연하지. 내가 사기꾼은 아니다만, 실력은 진짜거든.”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 너랑 나랑 일대일로 한 판 치는 거다. 데스매치로. 물론 이 표시목 화투는 치워두고. 종목도 바꿔보자.”

“무엇으로···?”

“포커. 너 화투보다 포커를 더 잘 한다며? 문제없지? 네가 이기면, 네가 실력으로 딴 거 인정해주고. 아니면? 개 같은 실력인데 표시목 하나 믿고 꽁으로 자신 거니, 할 말 없을 것이고. 어떠냐?”

“···내가 왜 그걸 받아줘야 되는데.”

“후달리면 말든가. 근데 명색이 귀수 제자라는 놈이 걸어오는 싸움도 피하고 그러면, 그거 낯짝이 갈려서 살 수나 있겠어? 나 같으면 한강에 코 박고 죽었다.”

빠득.

발바리가 이를 갈았다.

좋아.

자존심을 건드리면 넘어올 줄 알았지.

“오오냐. 이 썅간나새끼, 오늘 너 빤쓰 한 장까지 벗겨져서 울면서 돌아갈 줄 알아라···!”

“그래그래. 난 그런 거 보기 싫으니까 빤쓰는 봐줄게. 준기 아저씨, 여기 트럼프 있죠?”

“어? 어어.”

“하나 좀 가져다주세요. 신삥으로. 와서 직접 까야 이번엔 군소리가 없겠죠?”

“어. 알았어. 내 금방 갔다 올게.”

준기 아저씨가 갔다 오는 틈에 난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

[타짜 귀수의 손재주] : 관련 퀘스트 발생!

- 배은망덕한 발바리 놈에게 엿을 먹이자. 아주 거한 엿을.

- 보상 : 적색 카르마, 엿의 크기에 따라 차등지급.

!1차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 적당한 엿을 먹이셨습니다. 적색카르마 100을 지급합니다.

- 허나 퀘스트는 계속됩니다. 자만하지 마세요!! 만족하지도 마세요!! 아직 더 큰 엿을 맥일 기회는 있습니다!

===

아아.

그럴 생각이니 재촉하지 마쇼.

“세븐 카드 스터드. 카지노 룰로. 절벽까지 달리는 데스매치다. 오케이?”

“좋아.”

“딜러는 준기 아저씨가 좀 해주세요. 그럼 시작하자고.”

준기 아저씨의 셔플과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포커Poker.

최근 미국의 법원 판결에 따르면 포커는 도박으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운에 의지하는 요소, 즉 사행성이 적다는 사법부의 판단이었다. 말하자면 포커는 화투에 비해 실력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면이 크다는 소리다.

블러핑.

심리 싸움.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결단력.

무엇보다 패를 읽어내는 눈.

종합하자면 두뇌싸움이다. 그래서 피지컬에 한계를 느낀 프로게이머들이 포커로 진출하기도 한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선택이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위의 세 영역은 귀수로부터 배웠다.

마지막으로 패를 읽는다는 건 결국 각 베팅마다 이길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고, 확률은 곧 수학이다.

그리고 난 수학이라면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 모든 게 내가 포커로 승부를 건 이유였다.

반면 압구정동 발바리는 어떠할까?

“발바리. 너는 여전히 손기술이 똥인가 보구나? 레이즈.”

“갑자기 뭔 개소리냐. 콜.”

“아니 그도 그렇잖아. 내가 표시목을 지적했을 때. 손기술이 좋았다면 광땡을 다른 걸로 바꿔칠 수 있었겠지. 그럼 나만 우습게 되는 건데. 왜 그러지 않았지?”

“······레이즈.”

“흠. 받고 한 장 더.”

“나도 받는다!!”

자 보라.

발끈해서 달려드는 꼴이라니.

“J 트리플!”

“미안. 스트레이트.”

“빌어먹을!!”

그에겐 결정적으로 자제력이 부족하다.

그것이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표시목을 볼 수 있는 게 자신밖에 없다는 심리적 안전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패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기분.

판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나 이제 안전막은 사라지고

그는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내몰렸다.

인간은 그럴 때에야 제 진면목을 보이는 법이었다.

“레이즈!!”

“귀수는 그 표시목을 그렇게 쓰지 않았어. 게임 도중에 한 장씩, 아무도 모르게 흘려 넣었지. 그것도 필요한 만큼만 절제해서. 게임이 끝날 즈음엔 귀신같이 회수했고. 근데 처음부터 그렇게 다 때려부으면 어쩌냐? 븅신아. 그러니 걸리지. 아. 내 차례인가? 죽습니다요.”

“···도망치는 거냐···! 이 겁쟁이 자식!”

“응. 겁쟁이 하지 뭐.”

그런 패를 들고 그렇게 달리다니.

플러시처럼 읽기 쉬운 게 없다. 죽어달라고 고사를 지내는 격이지. 그 패를 들었다면 조심스레 게임을 운영하며 블러핑을 쳤어야 했다.

요컨대

이놈은 수싸움을 할 줄도 모른다.

“근데 너 귀수는 왜 배신한 거냐?”

“···입 닥쳐.”

“아니 그렇잖아. 밥 줘, 돈 줘, 사고 치면 깽값 다 물어줘. 아주 엄마가 따로 없네. 그런 사람을 왜?”

“닥치라고 했다···!”

“아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어차피 대충 알 거 같으니까.”

귀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발바리가 자신을 배신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고작해야 원망 받을 만하니까, 못난 자신이 키웠기 때문에, 그런 돼먹잖은 답만 떠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귀수가 아니라 이한열이기에 알 수 있는 게 있다.

“귀수는 네가 도박판에 있지 않길 바랐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재능이 없었어. 그 실력으로는 어디 가서 객사하기 딱 좋다는 걸 알았지.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넌 그게 마음에 안 들었고.”

“······.”

“널 자꾸만 떨어뜨리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겠지. 위대한 귀수. 초라한 자신. 그래. 그가 자신을 옆에 두고 싶어 하지 않을 만도 하다···.”

“그만해···.”

“그가 널 버릴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고.”

“그만하라고···!!”

“올인.”

“!!”

가진 돈을 싹 다 쓸어 넣었다.

“그래서 넌 버려지기 전에 그를 버리기로 했다. 그게 진실. 부정하고 싶다면 어디 따라와 보시던가.”

“······.”

내 앞에는 시체가 앉아 있었다.

이 세상에는 산 사람과 잘 구분이 안 되는 시체도 있다.

-거 손기술 좀 좋다고 장난치다 손모가지 날아가는 놈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을 애써 폄하하며

-판을 계산하고 흐름을 읽고 배짱으로 밀어붙이고···. 그걸 소홀히 하는 놈일수록 좋은 선수는 못 된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당연한 이야기를 대단한 깨달음인 양 으스대고

-그냥 귀수라고 불러. 한창 때는 다들 그렇게들 불렀으니까.

그럼에도 그토록 갈구하던 곳에서 끝내 떠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맴돌다 아연히 익사하고 마는 우둔한 시체들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많은 것이다.

멀리 말할 것도 없다.

나부터가 그 중의 하나였었다.

그 시체가 눈가를 찌푸렸다. 이를 악물었다. 시꺼먼 낯빛을 힘내어 붉히며 자신의 시체다움에 저항했다. 덧없는 자기주장이었다.

“···지랄이 풍년이네. 시발 그러면 내가 쫄 줄 알아?! 나도 받는다!”

“그래, 적어도 배짱은 있군.”

우린 서로를 노려보다, 거의 동시에 패를 개방했다.

놈의 앞에 A, K, Q, J가 순서대로 드러나고, 마지막 카드는 기우뚱 하며 천천히 넘어갔다. 마지막 숫자는 10.

스트레이트 중에 가장 높은 족보.

“마운틴.”

그리고 내 패는 투페어,

라고 그는 믿고 싶었겠지만.

내 앞에는 3투페어 뒤에 꽉 찬 7트리플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하야

“풀하우스.”

게임이 끝났다.

내 승리였다.

“이겼다!! 난 네가 이길 줄 알았어!! 으하하하! 이 사기꾼 새끼들! 호로잡놈새끼들!! 꼴 조오오오타! 다 내 돈 토해내지 못해?!”

역시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구석에서 숨만 꼴깍 삼키고 계시던 삼촌이었다.

준기 아저씨는 감탄스런 표정을 지었고, 김씨는 난감하다는 듯 창백한 이마를 문질렀다.

하지만 나는 잠잠히 사태를 관망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발바리라는 놈은 당하면 당하는 대로 얌전히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역시나.

푸르죽죽한 얼굴을 툭 떨구고 있던 그가 스르르 일어서더니,

옆구리에서 기다란 사시미를 뽑아들었다.

“으허어어엇!!”

“으악!!”

“···다 닥치지 못해!! 꼼짝 마!! 움직이지 말라고 시발! 시발 김씨. 김씨 아저씨.”

“어? 어어어?!”

“돈 챙겨. 빨리!! 챙겨서 최대한 빨리 이 동네 뜬다. 알았어?! 움직여!”

“어어어···.”

모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음이 된 가운데, 김씨 아저씨만 벌떡 일어나서 가방에 돈을 구겨 넣기 시작한다.

사시미 끝이 덜덜 떨렸다.

저걸로 허공에 조각을 새기고 있다 해도 믿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칼 앞에서도 의외로 담담했다.

발바리는 배은망덕에 허세충만에 사기꾼 기질까지 고루 갖춘 말종 중의 말종이지만, 사람을 막 찌르고 다니는 사이코패스까지는 아니다.

나는 말했다.

“야. 발바리.”

“닥쳐! 너는 특히나 닥쳐!! 시발. 빌어먹을! 내가 이 판을 짜려고 얼마나 고심했는데···!”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누가 보내서 왔을 거 같아?”

“···뭐···어??”

“내가 너 따위 하수가 뭐 대단하다고 계속 상대하고 있었을까? 어째서?”

나는 귀수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빨간마스크가 속삭인 그 말.

-그러니까 사실은 말이지, 널 담근 건 발바리가 될 거야. 십년 만에 드디어 원쑤를 갚은 아들! 크으. 드라마네 드라마야. 어때, 각본이 좀 잡혀?

발바리는 귀수를 제거하는 데 이용된 후 바로 팽 당한다.

현재 경찰 수배명단에 올라 있는 것도 발바리였다.

그걸로 끝일까?

아니겠지.

판단컨대, 일말의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발바리 역시 ‘실종’되는 것까지가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발바리는 그 낌새를 눈치 채고 도주, 동네 아재들 밑천 털어먹고 그걸 종잣돈 삼아 얼른 이 땅을 뜨려했다···.

그것이 지금의 상황.

“빨간마스크가 널 참 보고 싶어 하더라고. 거 얼굴이 반반한 게 쑤실 만하겠다··· 그러던데.”

“으···으아···.”

“내가 아까 전화했으니까···. 이제 곧 올 때가 됐는데···”

발바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음만 흘렸다. 덜덜 떨리는 칼은 숫제 떨어뜨릴 기세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누군가 가게 밖에서 셔터를 쾅쾅쾅쾅!!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편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목소리.

“발바리···! 압구정동 발바리 여기 있-니?!”

“으악! 으아아아악!!”

이제 발바리는 칼까지 던져버리고 필사적으로 도주를 감행했다.

셔터 쪽으로는 갈 수 없다. 가서는 안 된다! 그의 두뇌는 활로를 찾아 맹렬히 가동했고, 아까 준기 아저씨를 통해 밝혀진 퇴로, 즉 화장실 옆 비상구를 떠올리기에 이른다···.

발바리는 화장실까지 가다 두 번이나 자빠졌지만, 결국 가게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김씨 아저씨는 얼마 챙기지도 못한 돈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라 황급히 도주했다.

시나브로 태초의 고요가 여기 강림했다.

삼촌과 준기 아저씨는 사시미의 시각적 충격에 아직도 사로잡혀 계신 듯 했고, 셔터를 두드리던 거친 굉음도 멈춘 지 오래였다.

난 훌쩍 일어나, 고요 속을 유유히 헤치며 셔터까지 도달했다.

셔터를 안쪽에서 휙 열자, 언젠가부터 방 안에서 사라져 있던 이현지 선생님이 거기 서 계셨다.

그녀가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음성변조용 휴지뭉치를 팩 뱉더니, 내게 물었다.

“나 잘했어?”

난 엄지를 척 들어드렸고 그녀는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 5. 카르마Karma - 6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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