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6화 (16/164)

< 6. 연옥과 지옥 - 1 >

6. 연옥과 지옥

“난 말이다. 싫은 게 아주 많은 사람이야.”

오경식은 늘 웃었다.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었다. 나는 그가 장례식장에서도 실실 쪼개는 것을 보고 그냥 저것이 저 사람의 얼굴이구나 했다.

“일단 애새끼가 싫어. 징징대고 손 많이 가고 귀찮게 굴고. 그런 면에서는 개새끼도 별로지. 둘 중에 뭐가 더 싫냐 묻는다면, 개새끼 쪽이려나. 애새끼는 상황에 따라 쓸모가 있는데 개새끼는 뭐··· 끓여봐야 한 끼밖에 안 나오잖아?”

“······.”

“근데 말이야, 그럼 쓸모가 없는 애새끼는 어떨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단 말이지.”

이 순간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섬뜩했다.

싫은 걸 얘기할 때도 웃을 수 있나? 바퀴벌레나 김일성을 논하면서, 희화화나 비웃음이란 필터 없이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로선 그 감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래서 오경식이란 인간의 웃음이 더할 나위 없이 두려웠었다.

“한열아.”

“예, 형···.”

짝!

왼뺨에 불이 붙었다. 몽롱하게 추락해가던 정신이 억지로 끌어올려졌다.

“나한테 말할 때는 얼굴 보라고 했잖아. 바닥 보지 말고. 어디 딴 데 한 눈 팔지 말라고. 응?”

“···죄송합니다.”

“난 내 말 안 듣는 놈들이 싫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 놈은 더 싫고. 넌 근데 내가 싫어하는 유형 중에 가장 최악이야. 겨우 알아들어도 시발, 좆도 아무 것도 못해. 내 혐오리스트에서 개새끼보다 윗줄에 있는 네놈 새끼를 내가 어째야겠냐. 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뭐가 그렇게 죄송한데.”

“제가 무능해서···. 재주가 없어서···. 그리고···.”

몸이 덜덜 떨렸다.

구타를 견디느라 한계 이상으로 수축됐던 근육이 시간이 지나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었다.

몸은 핏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들로 축축했다.

눈앞은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웠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같았다.

나는 망막이 베일 듯이 격렬히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내가 왜 그랬는지.

근데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몰랐으니까.

일 자체는 심플했다.

동료가 실수를 가장해 노인을 밀치고, 난 그런 노인을 부축하는 척하며 몰래 가방 안의 귀중품을 훔친다.

장소 좋고.

상황 좋고.

등장인물도 완벽했다.

저 앞에 종종 걸어가는 할머니는 누가 봐도 요리하기 좋은 식재료였다.

동료는 제 몫을 다했고, 나도 잠시 동안 할머니를 부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까진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잠시'가 문제였다.

그동안에 나는 부모를 여읜 손자가 삼수 끝에 한국대에 합격했으며, 시장바닥에서 한푼 두푼 모은 쌈짓돈으로 등록금을 마련했다는 궁금하지도 않은 사연을 들어버렸다.

괜찮다. 한국형 신파라면 지겨울 정도로 보았다. 왜냐면 내가 그 비극의 주인공이거든. 그러므로 이따위 감성팔이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다짐할 찰나 노인이 내 손을 잡고 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이제, 이제 다 잘 될 것이야. 응응. 자네도 우리 병은이도.

느닷없는 반칙플레이였다.

빌어먹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니야? 심판! 당신 일 안하고 뭐 하는 거야!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할머니에게 “이거 떨어뜨리셨습니다.”하고 공손히 봉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귀인을 만났다며 연신 감사를 표했고, 사례하지 않으면 악운이 닥칠 거라며 내게 만원을 건넸다.

실로 양심이 뻐근했다.

말하자면 도둑놈이 사례 받은 것인데, 관점에 따라선 오백만원이 만원이 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동료들은 후자의 관점을 선호했다.

이 1/500의 기적에 오경식은 날 오백 조각으로 쪼개버릴 기세로 구타에 임했다.

양심이 뻐근했던 가슴께 어딘가가 이젠 물리적으로 뻐근해졌다.

근데 정말 난 왜 그랬던 걸까?

“오경식이, 적당히 해. 애 잡것다 야.”

누군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오더니, 오경식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커서 전봇대가 연상되는 사람이었다. 검은색 정장과 하얀색 마스크의 대조가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그에게 허리를 숙이는 오경식은,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오냐. 나 사무실 잠깐 쓰마. 잠깐만 자다 나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넵. 비워둘 테니 편히 쓰십쇼.”

“어으어어.”

남자는 하품인지 대답인지 모를 괴성을 내며 내실로 들어갔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오경식은 허리를 폈다.

“일어나 새꺄. 오늘 너 운 좋은 줄 알아. 저 양반이 누군지 알아?”

“네? 아, 아뇨. 모르겠습니다.”

“띨띨한 새끼. 저분이 우리 조직 해결사시다. 빨간마스크라고. 잘 기억해두고, 나중에 보면 정중히 인사드려라.”

“빨간··· 마스크요?”

“그래.”

오경식이 다시 실실 쪼개는 낯짝을 되찾았다.

“뻘겋게 물들이는 재미로 하얀 마스크를 쓰신다지. 그러니까 조심해. 네놈들이 못 하겠답시고 나자빠져서 도망이라도 치면···.”

그가 대뜸 다가와서 내 뒷목을 잡더니 확 끌어당겼다. 그리곤 내 목젖을 손날로 쓱- 그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분이 너희를 찾아갈 테니까 말이야.”

---

불유쾌하게 잠에서 깼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팔다리가 배긴 듯이 뻐근했다.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 같다.

“···시발.”

오랜만의 꿈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재입대 꿈을 두려워한다지. 난 그 비슷한 느낌으로 17세의 언젠가를 악몽으로 꾸었다.

그래도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꾸지 않았는데···.

왜 이러는지는 명백했다.

귀수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빨간마스크의 낯짝과 맞닥뜨리면서 묻어두었던 과거가 우천날 지렁이처럼 기어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꿈만 꾼 거라면 괜찮다.

그냥 과거일 뿐이라고 되뇌며 기어 나온 망령들을 다시 파묻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내 운명이 다시 전생의 전철을 밟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내 의지나 호오의 문제가 아니다.

태풍 같은 상황변화에 휘말리다보면 어느 순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태풍은 이미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사실 회귀하고부터 계속,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해왔다.

몇 가지 시나리오를 썼다 수정하기를 반복했고, [미다스의 손]의 기능을 깨달으면서는 아예 근본부터 갈아엎기도 했다.

그러나 뭐랄까.

이런 일련의 일들에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느냐 묻는다면?

물음표가 생긴다.

그리고 방금의 꿈으로 확실히 알게 됐다.

너무 안일했어.

나는 지나치게 느긋했다!

머리로는 열심히 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진정 말초신경 단위부터 절박하게 질주하지는 않았다.

좀 더 치열하게.

내 모든 걸 쥐어짜내야 해.

그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최상의 결과값을 얻어내야 한다.

이전이라면 치열해봐야 고작 몇 걸음이었겠지만, 이젠 다르다.

이제 난 유능하다. 앞으로는 더더욱 유능해질 것이다. 난 그 사실을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손끝의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치열함은 그에 맞는 결과로 내게 보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탈출 프로젝트.

그 첫 번째 과제는?

‘우선 이 시답잖은 왕따부터 벗어나야겠지.’

난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이미 악몽의 불쾌감이나 아침잠의 버거움 따윈 깡그리 날아가고 없었다.

---

그렇게 필사의 각오를 다진 나는 현재

전화번호부를 외우고 있었다.

‘···아오 겁나 빡세네 이거.’

[수리적 통찰력]을 얻은 후, 내게 숫자란 더 이상 난해한 것이 아닌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창구가 됐다.

최석현의 ‘수학적 기억술’로 말미암아 몇 배는 더 향상된 기억력이 그 일례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 암기능력을 뜻하진 않는다.

전화번호는 숫자라기보다 그냥 기호다. 그걸 알파벳으로 대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수의 상호작용과 수학적 논리로 기억연상을 유도하는 방법은 이 경우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 어쩌냐고?

방법이 뭐 있나.

그냥 쌩 암기다. 머리에 구겨넣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보고 또 보면서 뉴런에 한 글자씩 조각을 하는 정직한 작업.

요약하자면

미친짓.

그러므로 동사무소 소장 박건재 씨는 미친놈이라는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

[어느 동사무소 소장의 암기력] : 관련 퀘스트 발생!

- 예부터 우리 선현들의 지적 준거는 암기였습니다. 천자문을 외우고, 사서삼경을 외우고, 하여간 누가 이랬더라 저랬더라를 잘 외우는 게 지식을 재는 척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선현들이 발전시켜온 이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는 게 후손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요?

- 그런 의미에서 전화번호부를 외웁시다.

- 보상 : 청색 카르마, 암기 100명당 10포인트 지급.

===

“개소리를 아주 정성스럽게도 적어놨다!!”

박건재의 일생을 그냥 보기만 했을 때는 재밌는 또라이라는 정도의 감상밖에 없었는데.

직접 실천해보니까 그건 아주 겸손한 표현이었다.

이 아저씨는 진짜배기 개쌩또라이였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지금 내 모습도 충분히 또라이스럽겠지.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씹어 먹을 듯이 탐독하는 귀기어린 모습이라니. 나라도 범접하기 싫을 것이다. 그 증거로 오늘은 괜히 툭툭 건드리는 놈들이 없었다. 왔다가 범상찮은 아우라를 느끼고 돌아간 게 분명했다.

“됐다!”

===

[어느 동사무소 소장의 암기력] : 퀘스트 달성!

- 100명 암기에 성공하셨습니다! 청색카르마 10을 획득합니다!

- 본 퀘스트는 상시 임무입니다. 언제든 돌아오세요. 전화번호부는 늘 당신을 환영합니다!

===

성취감이 급격히 끓어올랐다가 비슷한 속도로 식었다. 반면 현자타임은 길고 길었다.

환영하지 마.

환영하지 말라고!

난 전화번호부를 거칠게 닫아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에라이 못해먹겠네.”

내가 [암기력] 재능의 동조율을 100%까지 찍었다면 이런 고생은 불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정기적으로 카르마를 벌어다주는 효자 퀘스트가 되었겠지.

그러나 난 [수리적 통찰력]에 보너스카르마 500을 다 때려 부어서 파산상태였으므로, 지금 내 암기력은 순도 100% 이한열 두뇌에 의존했다.

결국 카르마를 벌려면 없는 머리를 쥐어짜내야 했다.

그래서 지금 상태는.

===

청색 카르마 : 83.5

적색 카르마 : 1,649

===

이 끔찍한 불균형을 보라.

귀수 형님과 동사무소 소장의 그릇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타짜답게 한 방에 팍 몰아주는 패기와, 10씩 짤짤이를 하는 공무원의 쫌생이스러움을 비교해보란 말이다.

아, 근데 그 시인은 어떻게 됐느냐고?

===

[어느 무명 시인의 필력] : 관련 퀘스트 발생!

- 시는 자유입니다. 글자는 수단임과 동시에 족쇄이죠. 따라서 시인은 시를 날려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글자를 조탁하여야 합니다. 시를 쓰세요. 다듬어진 글이어야 합니다.

- 보상 : 청색 카르마, 시 1편당 50포인트 지급.

===

그래서 시를 썼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이 퀘스트는 하루에 한 번씩 몰아서 피드백까지 주었다. 별로 고맙진 않았지만.

- 이게 시라면 헤어드라이기 상품설명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 되겠네요. 노력하세요.

- 표절이군요. 꼼수는 죄악입니다. 반성하세요.

- 이 시는 깊이가 없습니다. 만약 시가 강이었다면 이곳의 물고기는 다 말라 죽었겠네요. 고민하세요.

- 시와 글씨연습의 차이를 혹시 혼동하는 게 아닌지요? 공부하세요.

이런 식이었다.

쓰는 족족 얄짤 없이 실패였는데, 저 퀘스트의 기준에 따르면 내 글은 시라고 차마 부를 수 없는 무언가였던 모양이다.

결국 이 퀘스트로는 단 1포인트도 벌어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거의 다 왔다.’

청색카르마 83.5

처절한 간난신고 끝에 도달한 숫자였다.

이 카르마 시스템은 꼼수를 불허했다. 카르마를 조금씩 투자해 동조율을 높인다고 해서, 그만큼 재능이 상승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100%를 찍어야만 그 탤런트가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시스템이다.

이 떨어지는 하드웨어를 얼마나 돌려댔을지 상상이 가는가?

그러나 Rank D 이하의 교환비는 1:1, 즉 100포인트면 다 찍을 수 있으므로 이제 곧 [암기력]과 [필력] 둘 중 하나를 골라 탤런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턴 카르마 수급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겠지.

이 고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갔다.

“중간고사 얼마 안 남았으니까 긴장들 하고. 근데 공부한답시고 야자 남아서 떠들고 있으면 알아서 해. 아주 벌점으로 샤워를 시켜버릴 테니까. 알았니?”

종례시간, 담탱이 고윤숙 여사가 오늘도 협박을 적립했다. 아이들은 건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이제 좀 있으면 수학과학경시대회 있으니까 관심 있는 사람은 신청하도록. 학교 자체 평가 통과하면 참가비도 지원 나온다니까. 자, 안내문이니까 뒤로 돌려. 신청서는 이번 주 내로 작성해서 제출하고.”

안내문과 신청서가 파도를 타며 내게 밀려왔다.

받아서 대충 읽고 있는데, 갑자기 창이 팟하고 튀어나왔다.

===

[어느 수학 신동의 수리적 통찰력] : 관련 퀘스트 발생!

- 수학경시대회에 출전해 입상하세요.

- 보상 : 청색 카르마, 입상 성적에 따라 차등지급.

===

그동안 무반응이던 [수리적 통찰력]에 퀘스트가 뜬 것이다.

< 6. 연옥과 지옥 - 1 > 끝

ⓒ 달의등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