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연옥과 지옥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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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들 특유의 냄새가 있다.
묵고, 헤지고, 녹이 슬어 꺼끌꺼끌해진 냄새들. 그 쿰쿰한 향은 옛것의 숙명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잘 닦고 기름칠을 꼼꼼히 하여둔 것들이 오래되면 거기에 멋들어진 향이 하나 더해진다. 바로 풍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골동품점 <혜선慧鮮>의 실내는 그런 풍미로 푼푼했다.
나는 가게 안을 차분히 구경했다.
가시광선을 막기 위해 내부엔 창이 거의 없었고, 실내등 역시 빛이 세지 않고 은은했다.
인테리어는 한국적이었지만, 취급하는 품목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청동풍경과 백자 옆으로 아랍풍의 램프가 있고, 그 뒤편엔 단목 파이프나 나침반 따위의 서양물품도 전시돼 있는 식이다.
그러나 난잡해 보이지 않고 조화롭게 잘 섞여 있었다. 배치까지도 세심하게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어때, 괜찮지?”
“네, 재밌네요. 정말 별 게 다 있어요.”
“내가 여기 좀 볼 만하게 만들려고 영혼을 갈았지 정말. 탐나는 건 있고?”
“글쎄요. 저는 보는 눈이 좀 없어서···.”
그러나 탤런트는 없었다.
내 반응이 어쩐지 시큰둥하자, 오여사께서는 망설임 없이 안쪽 방을 개방했다. 보통 손님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별 컬렉션이라는 모양이다.
“자, 여긴 어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공개하셔봐야, 지식이 일천한 나로선 똑같이 낡은 것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난 만족스럽게 웃었다.
좁은 방 한 구석, 빨간 비단 위에 얌전히 올라있는 붓 한 자루가 내 시선을 끌었다.
청색 카르마가 교교했다.
“···저건 뭔가요? 제 눈엔 좋아 보이네요.”
“보는 눈이 없다면서 고르긴 제대로 골랐네. 저거 귀한 거야. 우리 할아범이 경매에서 업어온 건데, 이씨 왕족들이 쓰던 최고급 붓이라고 해. 연대로 따지면 고종이나 숙종? 그즈음의 왕이 아닐까 추정되고.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런가요? 만져 봐도 되죠?”
“그럼. 할아범이 아끼는 거지만 한열이라면야 특별히.”
“넵. 감사합니다.”
꿀꺽, 침을 삼킨 뒤 손을 뻗었다.
내심 고종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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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는 잔반殘班이었다.
“용이 넌 꼭 어르신 눈에 들어야 한다. 우리 집안에 살 길이라곤 그것밖엔 없어.”
아비는 부농에게 굽실거려 쌀을 얻어오면서 집에만 오면 반상의 법도를 들먹였다. 어디 천것이 땅뙈기 좀 있다고 거들먹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곤 당당히도 그 쌀을 팔아 책과 붓을 사들여 소년을 가르쳤다.
아집. 뒤틀린 자존심. 세상을 바로 보지 않는 유아적 태도.
소년이 보기에 잔반殘班은 잔반殘飯만도 못했다.
“자세는 가지런하게. 목소리는 또렷하게. 배운 것만 똑똑히 말한다면 그 자리는 곧 네 것이다. 난 너만큼 총명한 아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알았느냐, 용아.”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러나 소년은 가지런히 답했다.
어쨌든 그는 아비였고 자신을 먹이고 가르쳤다. 특히나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면에 있어서는 평생 못 갚을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반대로만 한다면 승승장구할 테니, 만약 훗날 성공의 주역을 꼽는다면 당당히 아버지 이석준의 이름 석 자를 댈 수 있으리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당대 예방승지인 이호준은 적자가 없었다.
장자는 서자였고, 나머지는 딸만 여럿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호준의 가계는 기이할 정도로 아들이 귀했다. 당장 이호준 본인부터가 양자인 것이다.
이호준이 친척들 중에 양자를 들이기로 한 것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소년이 이호준의 본가에 발을 들였을 즈음 마을은 한창 잔치 중이었다.
큰어르신이 양자를 들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였다. 눈 돌아갈 만큼 성대하며 떠들썩했고, 당연히 저 모든 것들이 이호준의 곳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본가에 모인 ‘양자 후보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하는 한편 다짐을 굳혔다. ‘저 자리는 내 것이어야 한다.’
잔치가 삼일 째 되는 날, 이호준이 대로저편에서부터 남여 가마를 타고 등장했다.
그는 마당에 모인 후보들을 가마를 탄 채로 쓱 훑어보더니, 별 말도 없이 혀만 ‘쯧’ 차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뭔가 맘에 안 들었던 걸까. 성에 차는 인물이 없던 걸지도 모른다. 후보들은 불안한 마음을 품고 대청에 올랐다. 이호준이 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너희들에게 질문을 하나씩 할 것이다. 학식과 태도를 다 볼 터이니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모두 신경 쓰며 답하거라.”
문답이 시작됐다.
그들은 본인의 학식을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토해내듯 말했다. 모든 말 한 마디에 힘이 들어갔고 절절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몸가짐이 흐트러진 자 없었다. 다들 조선의 유서 깊은 우봉 이씨의 일가다웠다.
이윽고
소년에게 질문이 떨어졌다.
“앞으로 나라 안팎의 형세가 어찌 되리라 생각하느냐? 난관이 있다면, 이를 헤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소년은 잠잠히 숨만 고를 뿐, 선뜻 대답하지 않는다.
“왜 대답하지 않느냐? 질문이 너무 어려운가?”
다른 이들은 이 대목에서 경쟁자 하나가 떨어져나갔다고 속으로 쾌재를 쳤을 것이나.
그러나 소년은 눈앞의 질문 따위엔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건 이 일련의 흐름, 그들을 여기까지 흘러들게 한 보이지 않는 진의였다.
그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리께서 뉘신지는 모르오나, 소생은 일가 어르신인 이 승지의 양자가 되기 위해 온 것. 그러므로 제 말은 승지께 직접 드리기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무어라?”
“농이 끝나셨다면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가주께서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는 일이라.”
“네 이놈!!”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소년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엄한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다, 이내 푸흐흐 웃더니 말했다.
“들키셨습니다. 승지 어르신. 한 방에 맞추는 놈이 다 있네요.”
“······.”
그러자 옆방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꼿꼿이 정좌해있는 중년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깊었다. ‘진짜’ 이호준이었다.
남자는 이호준에게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나머지 소년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이호준과의 독대.
그가 말했다.
“어찌 알았느냐? 한 며칠은 두고 살필 생각이었다만.”
“고관으로 이름이 더 높아질 데 없고, 대원군의 측근으로 권력이 더 넓어질 길 없음에도, 어르신께선 익은 이삭마냥 본인을 낮추신다 들었습니다. 주제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중용이 몸에 배어 계시다는 게 세간의 평입니다.”
“그런데?”
“근 삼일간의 일이 어르신과는 맞지 않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과시하듯이 거창하게 벌인 잔치. 그것도 삼일이나. 거기에 절로 압도되는 등장과, 탐탁찮은 표정까지.
이 모든 게 어색하고 실로 과장되어 있다고 소년은 느꼈다.
“이 모든 게 의도적이라면, 그 의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걸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그래? 그럼 묻지. 내 의도가 무엇이냐?”
“관찰이시겠지요. 학식과 예의범절은 좀 모자라도 가르치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좋은 눈과 예민한 감, 그리고 평정심 따위는 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요. 어르신께선 지난 며칠간 지켜보시며 저희들 중 재목이 있는지 살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부를 내보이고, 심정을 흔들었으며, 가장 흐트러졌을 순간을 골라 엄중히 관찰했던 게 아니냐···.
소년은 비수로 찌르듯 의중을 짚었다.
그제야 이호준은 딱딱한 표정을 풀고 부드러이 웃어보였다.
“오늘부터 네가 내 아들이다. 이완용.”
그렇게 소년 이완용은 승정원 예방승지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1867년, 그의 나이 열 살의 일이었다.
그 이후 이완용은 양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도자로서의 태도,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계의 지도, 허나 오랜 관직생활로부터 우러나온 ‘정치적 처세’야말로 많은 가르침 중에 으뜸이었다.
“넌 내게 몸을 낮춘다고 평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그렇다면 어찌 말해야 합니까?”
“몸을 숨긴다, 라고 해야 옳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를 함에 있어 네가 일순위로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이다.”
그리고.
“나라 안팎의 형세가 어찌 되리라 생각하느냐? 난관이 있다면, 이를 헤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밖으로 양이가 들끓고, 안으로는 세도가의 전횡으로 삼정이 문란하니, 이 모든 것을 휘어잡을 강력한 지도력이야말로 시대의 요구일 것입니다.”
이호준이 대원군 이하응의 친우이자 정치적 동반자라는 사실에 입각한 답안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호준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
이완용은 양부의 심기를 읽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대국 청나라조차 영길리의 발에 짓밟혔습니다. 저희 같은 소국은 이 난세에 떠밀려 휘청대는 게 필연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라도 손잡고, 누구라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연한 처세가 필요합니다.”
“네 말이 정확히 옳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국이다. 이런 때에 최선이란 없지. 항상 최악을 대비하며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난관’에는 주체가 빠져 있었다. 거기엔 국가가 아니라 가문, 혹은 그들 개인의 안위가 올라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이호준은 실천으로 그의 정치관을 입증해보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청에 의해 진압되고, 정치의 축이 대원군에서 민씨로 옮아가자 이호준과 이완용은 빠르게 노선을 갈아탔다. 유감의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충신은 이런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지.”
이완용은 양부의 정치적 가르침을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흡수했고, 이윽고 넘어섰다.
사실상 갑신정변 이후부터는, 사고가 유연하고 수읽기에 능한 이완용이 그들의 정치적 노선을 이끌었다.
미국행을 결정한 것도 완용 본인이었다.
중러일 세 나라는 지나치게 인접해있으므로 뒷배로 두기엔 불안하고 변수가 많다.
세 나라가 각축전을 벌이며 정권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느 한쪽에 기울었다가 순식간에 숙청당할 위험성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위험도는 낮으면서 개화파라는 외피를 쓸 수 있고, 그러면서 친일 개화파와의 연대와 거리두기를 동시에 할 수 있으며, 또한 고종 정권의 대미 통로가 되므로 정치적 입지도 꿀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완용이 미국을 택한 것은 자기보신을 최우선에 놓는 정치관의 반영인 것이다.
19세기 후반.
친일 개화파가 득세하거나 몰락하고, 명성황후가 주도권을 쥐었다가 일본에게 살해당하는 그 급박한 시기에, 이완용은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생로를 찾아내 살아남았다.
물론 굴곡이 없을 수는 없었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가 반러의 뿌리를 뽑기 위해 친미 인사인 이완용을 점찍었던 것이다. 그렇게 좌천되어 주변부로 물러나고,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양부 이호준도 노환으로 사망하여 정치적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완용은 반등의 여지를 노렸다.
3년 상이 끝나는 1904년.
친미파로 분류됐던 그는 빠르게 깃발을 바꾸어 친일파가 되었다.
누구도 일본의 승리를 점치지 못했던 러일전쟁. 그러나 이완용은 늘 그렇듯 흐름을 옳게 읽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 기회를 쟁취해냈다.
1905년.
그의 주도로 일본군이 황궁을 포위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기 위한 작전이 거행됐다.
거의 강제로 열어젖힌 어전회의는 침통 속에서 진행됐다.
“황제 폐하께선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하기로 하셨소이다.”
“···학부대신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개탄스러운 일이겠으나 그 또한 시대의 흐름이라면 따라야겠지요.”
전혀 개탄스럽지 않은 말투로 이완용은 말했다.
조약의 가부를 투표할 때, 이완용은 양부 이호준이 물려준 붓을 꺼내들며 잠시 감상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 이후로 나를 변절자라 부르겠지.’
그러나 그는 원래 이랬으므로 변절이란 어불성설이다.
대원군, 민씨, 개화파, 친미, 친일, 그 모든 게 그에겐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고 때가 되어서 갈아 끼운 것이었다. 자신은 이 일에 능숙했고 대개 성공했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
이완용은 가볍게 붓을 들어 해서체로 글자를 휘갈겼다.
가可.
1905년 11월 17일
이날의 결정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불구의 몸이 되었으니,
이를 을사늑약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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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 [매국노 이완용의 눈치](Rank C)를 습득했습니다.
- 이 탤런트는 눈치의 재능에 관여합니다.
- 동조율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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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오여사님, 이게 이씨가 쓰던 건 맞는 데요
근데 그게 그 이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가끔 묻혀있는 편이 나은 진실이 있는 법이었다. 나는 저걸 비싼 값에 업어오셨을 이름 모를 할배를 위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 6. 연옥과 지옥 - 3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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