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완용의 법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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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사는 서장이 방으로 부를 때부터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했다.
형사 생활 15년차, 독한 놈 미친 놈 다 만나봤지만, 서장처럼 너무 뻔해서 오히려 유니크한 인물상은 흔치 않았다.
‘그거 대충 접어, 라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서장실에서 그는 형사 그만두고 돗자리나 깔까 고민했다.
“그거 대충 접어.”
“···예?”
“뭘 다시 물어? 어차피 나온 건 지문밖에 없다며? 애들이 길에서 주운 걸 만지다 지문이 묻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정리하기엔 증거가 너무 많이 발견됐는데요···.”
“거참!! 서장이 말을 하면 인마!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알았다 해야지! 어딜 쫑알쫑알···.”
원래 메주는 콩으로 쑨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하지 말기로 하자.
사실 지적하려면 먼저 해야 될 게 수두룩했다.
‘···이 양반이. 대충도 정도껏이지. 증거물 발견 장소에서의 증언도 일치하고. 증거도 명확하고. 정황도 확실한데. 나온 게 지문밖에 없다는 게 경찰이 할 소리냐···.’
이런 걸 대충 넘기면 그냥 근무 태만이다. 발각되면 빼박 징계다.
편의적으로 지시내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걸리면 대신 책임져줄 것도 아니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직갈등을 억누른 건 이번에도 대출금과 분유값의 무게감이었다. 이번엔 좀 간당간당했다.
“···예, 알겠습니다.”
옛날이라면 몇 마디 항변이라도 덧붙였겠지만, 점차 그것도 생략하게 됐다.
들이받아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고 머리카락만 우수수 빠진다.
백해무익.
강형사는 슬슬 위험 수위에 오른 모발 건강을 위해서라도 침묵하기로 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잘 처리해. 두고 볼 거야.”
서장실을 나오면서 강형사는 며칠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평범한 날치기 사건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급속도로 개판이 되어가는 전개가 일품이었지.
골치 아프긴 했지만,
솔직히 좀 통쾌하기도 했다.
‘그 친구한텐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있나. 원래 다 이런 거지 뭐.’
강형사는 자리로 돌아와 조서의 형식을 빌린 소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근처에 버려진 핸드백들을 주워왔을 뿐이며 언젠가 돌려주기 위해 보관했다는···
···주장의 앞뒤 정황이 일치하여···
···또한 용의자들이 모두 어리고 집안이 유복한 점으로 보아···]
“형사님 누가 찾아 왔는데요.”
“···응?”
시선을 돌리니 누군가 또각또각 걸어오고 있었다.
하이웨이스트 치마에 정장을 단정히 갖춘 여성이었다. 근데 눈이 무시무시하다. 강형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말할 뻔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아가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아가요?”
“네, 아가.”
“···잘못 찾으신 거 아닙니까? 저 유괴 사건 받은 거 없는데···.”
“유괴가 아니라 납치입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따지자면 유인과 약취 중 약취에 해당하니까요.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강제···.”
“아니 유괴든 납치든 전 모른다니까요.”
“강형석 경사님 아니십니까?”
“맞는데요.”
“그럼 맞네요.”
“네?”
“네.”
뭐야 이 여자?
“근데 누구십니까?”
“법무법인 강의 연희재 변호사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아가다시품에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찾아왔음을 밝혀야겠군요.”
“우리아가··· 뭐요?”
“우리아가다시품에 대책위원회입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어제 만들어졌습니다.”
“···뭡니까 아까부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장난? 지금 제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십니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격살시킬 수 있다면 이미 자신은 연쇄살인으로 이 여자에게 쇠고랑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아니, 못하려나? 자신도 눈빛에 살해당했을 테니까···.
어쨌든 그건 그거고.
“···네, 그래서. 전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그 아가라는 건···.”
“에르메스 버킨백. 일련번호는 S11038. 개인적으로 에멩이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러시겠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 알겠다.
“···그 사건은 지금 조사 중입니다.”
“용의자는 나왔습니까?”
“수사진행상황은 말씀드릴 수···.”
“왜 없죠? 수사 은폐인가요? 저희는 피해당사자로서 수사의 추이를 파악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저희도 아직 피해자 파악 중이라 연락 못 드렸는데요.”
사실 일부러 하지 않았다.
하면 골치 아파질 게 뻔하므로 질질 끌다 스리슬쩍 케이스종료하라는 서장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자기 이름까지 정확히 파악해서 찾아왔단 말인가.
“글쎄요. 어느 의로운 분께서 이 피 끓는 고통을 굽어 살펴주셨던 거겠죠.”
“···그러니까 그게 누구···.”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피해자 57명 전원이 의견합치를 했다는 점이죠. ‘우리아가다시품에 대책위원회’는 가해자에게 합당한 응징을 가하고, 케이스를 조속히 종료시켜 아가들을 하루 빨리 돌려받기 위해 결사의 각오로 임할 것입니다.”
“······.”
57명!
그럼 피해자 전원이잖아!!
“···아 놔, 권익 이 새끼···. 리스트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그러나 그는 몰랐다.
[눈치]가 비상한 누군가가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피해자 리스트를 모두 [암기]해서 그들 전원에게 일일이 연락을 돌렸다는 것을.
더하여 졸속 수사 의혹과, 가해자 처벌에 관한 비관적 전망도 언질에 두었다.
물론 그에게도 57명 전원 가담은 예상외의 성과.
현재 그녀들은 의욕적인 걸 넘어 독립투사급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만큼 여성들의 상실감과, 그 반작용인 분노가 남성들의 상상을 한참 상회했다는 뜻이었다.
골치가 뻑쩍지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후련함도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나. 어설프게 넘겼다간 이 무서운 누님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민원. 감사. 감봉. 어쩌면 고소크리에 언론제보까지 갈 수도 있지.
자기 자신과 서장에게 할 변명이 충분히 마련됐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기분으로 강형사는 쓰고 있던 조서를 싹 지웠다.
“···음. 지금 상황은 말입니다···.”
7. 완용의 법
전화번호 외우기, 시 쓰기에 이어 하루 일과가 하나 더 늘었다.
“하악. 하아악···.”
달린다.
겁나 달린다.
온몸의 근육들이 깜짝 놀라서 건물주에게 항의를 보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뭐하는 짓이야! 너 미쳤어?’
이해할 만하다.
이제까지 근섬유의 세계는 평온했다. 방치되어 황무지가 됐지만 그 사막엔 고요의 밤이 있어 그럭저럭 살기 넉넉했다.
그런데 갑자기 굴삭기와 크레인이 들이닥치더니 땅을 막 들어 엎는 것이 아닌가. 관개수로를 만들고 나무를 심고 인공저수지를 팠다. 시끄럽고 땅이 덜덜 떨리고 익숙하던 고향의 정경이 사라져간다.
인류문명의 침입에 사막은 고요를 잃었다···.
대충 그런 느낌의 항의였다.
내 [눈치]가 얼굴 근육을 읽는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던가? 이 경우엔 그것도 필요 없다. 근육과 관절의 절규는 다이렉트로 내 척수에 꽂혔다. 난 상소문을 읽는 왕의 기분으로 그 모든 피드백들을 맞이해야 했다.
‘전하 이 새끼야 통촉하라고 쫌!’
응, 무시. 이자의 목을 쳐라.
“하악···하아악···!!”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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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차왕 엄복동의 대퇴부] : 퀘스트 달성!
: 체력은 국력! 근손실은 죄악! 정진하라! 뒷다리가 돌덩이가 될 때까지!
: 적색카르마 10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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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눕는다기보다 고꾸라진다는 느낌으로 운동장에 널브러졌다.
아오 죽겠네.
온몸이 폭동이었다. 숨을 쉬는 게 아니라 폐가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난폭한 피의 흐름이 혈관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난 가만히 누워서 난리가 진압되길 기다렸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제법, 할 만한데.’
뛰면서 생각한 건데, 노력도 결국 재능이었다.
‘끈기도 하나의 재능’ 같은 소리가 아니라, 재능이 있어야 그 노력에 탄력이 붙는다는 뜻이다.
[수학] 재능이 있으니 수학 문제풀이가 재밌다.
[암기력]이 있으니 외우는 게 괴롭지 않다.
당연한 소리 같은데 정작 깨닫기는 쉽지 않은 사실이다. 왜냐면 재능이 없다가 생기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 외에는.
보통은 스스로 노력을 들이고 성취감을 얻는 과정을 겪고 ‘내가 이 일을 좋아하나보다’하고 해석한다. 천직이라 생각하고 진로를 정한다. 그게 순서다.
그러나 반대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재능이 있으므로 노력이 수월하고, 수월하므로 성취감에 다다르는 길이 짧고, 그러므로 그 노력이 재밌어지는 거다. 재능이 없으면 노력은 그저 고통스럽다.
그래서 나는 ‘날 천재라 부르지 마라. 이것은 순전히 내 숱한 노력이···’ 따위를 지껄이는 놈들을 보면 헛웃음이 나왔다. 가소롭기까지 하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른다. 의지라고? 당신 밑에 있는 그들은 의지박약일 것 같은가?
각설하고.
거창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대퇴부]의 재능이 있으므로 이 짓도 할만하다, 라는 소리다.
대퇴부의 재능.
뭔가 어색한 말이다.
대퇴부는 재능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니까. 저 말이 성립되면 여러모로 곤란한 표현들이 가능해진다. ‘시력이 2.0이나 되다니! 넌 안구 재능이 훌륭하구나!’ 같은.
그러나 얻고 보니 저게 왜 재능인지 알겠다.
뛰는 게 쉽다.
땅을 딛고 밀어내는 감각이 쫀득하다. 하체가 발목을 타고 전해진 충격을 부드럽게 완충한다. 같은 힘을 들였을 때 뽑아낼 수 있는 출력이 증폭된다.
마치 같은 하드웨어라도, 최적의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면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처럼.
그러나 여기서 비극은 내게 [심폐]나 [척추기립근]의 재능은 없다는 것이었다.
다리는 더 뛸 수 있다는데 기타 등등의 신체기관들이 삐걱댔다. 불행히도 달리기는 전신운동이었다.
그래도 일일 퀘스트는 하루도 빠짐없이 해치웠다.
적색카르마는 아직 충분했지만, [암기력]이나 [필력]과는 다르게 하루하루 몸에 축적되는 게 뿌듯했으니까.
“후우. 이건 일단 여기까지 하고.”
충분히 몸이 진정될 즈음 일어섰다.
운동장 한편으로 가서 다른 운동 준비를 했다.
운동이라기보다 연습에 가까우려나.
이번엔 준비물도 필요하다.
허리띠 두 개.
난 허리띠 버클을 오른손에 쥔 채 줄 부분은 오른팔에 둘둘 감았다. 왼팔도 마찬가지로 처치한다.
허리띠는 팔이 접혔을 때는 감겨 있다가, 130도 이상으로 펴지면 자동으로 풀리게 얽어둔다.
탄력적으로 팔을 털자 띠가 주륵, 흘러내려 땅바닥에 닿았다.
이 상태에서 손목을 흔들거린다. 땅에 걸리는 느낌을 기억하면서 허리띠를 움직인다. 그러다 흙을 긁어내는 느낌으로 손목에 스냅을 주면-
팟!
흙먼지가 성대하게 피어오르는 것이다.
시야의 혼란.
휘휘- 허리띠로 허공을 헤집었다. 이 얇은 가죽으로 저 뿌연 흙먼지들을 해산시키는 게 목적이다.
당연히 역부족. 먼지들은 중력에 가라앉으면서도 일부는 끈덕지게 떠있었다.
입자 단위로 떠다니는 것을 밀어내려면 면단위의 충격,
즉, 폭발이 필요하다.
다시 손목 스냅.
팡-! 허리띠 끝에서 공기층이 터져나가며 흙먼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래도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스냅, 팡!
스냅, 팡! 팡팡!
왼손 오른손 가릴 것 없이, 두 개의 허리띠가 국소적인 소닉붐을 일으키며 눈앞을 미세먼지 청정지역으로 만들었다.
1m 길이의 중거리.
다음엔 과녁 연습이다.
병이나 캔 따위를 늘어놓고, 나는 알맞게 떨어져서 허리띠를 쥔다.
그리고 스냅.
허리띠가 허공을 때릴 때마다 캔 하나가 찌그러져서 튕겨나갔다.
유리병은 면으로 때려봐야 깨질 정도의 충격을 받지 못한다. 그럴 땐 띠를 눕혀서, 휘감아 치듯 병목을 후리면-
쨍!
하고 모가지 윗부분만 깔끔히 날아간다.
캔을 앞뒤로 늘어놓고, 앞은 놔두고 뒤만 날리는 것도 가능하다.
허리띠가 뱀처럼 파고들었다가 뒷부분만을 타격하고 스르륵 빠져나오도록- 팡-! 성공이다.
정확, 예리, 핀포인트 타격.
이름하야 요대술腰帶術.
중패라는 이름의 조폭은, 이 기술 하나로 조직의 돌격대장까지 올라갔다.
허리띠는 그의 손안에서는 짧은 채찍이 됐다. 팔에 감아두고 있을 땐 방호구로도 쓰였다.
그는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걸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잘 못쓰면 그냥 가죽 회초리.
그러나 잘 쓰면, 때론 몽둥이가 되고 때론 사시미가 되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모했다.
전생에 나 역시 피 토하며 배웠었다.
내 허리띠가 내 이마만 자꾸 때려서 조직원들은 ‘이마가 어딨는지 까먹을 땐 쓸 만하겠네.’라는 평을 남겼었지···. 쓰라린 기억이었다.
그러나 Rank D급의 [손재주]는 대단했다.
하루 만에 요령을 파악하고, 일주일 되는 때에는 손에 완전히 익었다. 이젠 충분히 숙달시키는 일만 남았다.
당연히 호신용이다.
이제 와서 복싱 따위를 익히기엔 언제 재능을 얻을지 모르고, 얻더라도 하루아침에 달인이 될 수는 없다. 재능은 재능일 뿐이니까.
그러나 이 기술은 다르다.
재능만 있다면 빠르게 익힐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에서 이것만큼 유용하고 다재다능한 무기는 없었다. 몽둥이보다 공격속도가 빠르다. 사시미보다 리치도 훨씬 길다.
그렇다고 위력이 떨어지느냐?
유도에서 복싱까지 별 놈들이 다 덤벼도 허리띠 불꽃 싸다구 한 방이면 그로기 상태가 됐다.
실전에선 UFC 챔피언이고 뭐고 없다.
인간은 호모 파베르.
도구를 쓰는 게 짱이다 이 말이야.
‘···그날까지 며칠 안 남았군.’
카르마 1포인트도 안 주는데 굳이 이걸 익히고 있는 이유.
이제 곧 필요할 날이 오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위급 상황에도 반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수준까지 숙련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 손을 놀렸다.
팡-!
팡-!
밤하늘에 외딴 기성이 널리 퍼졌다.
< 7. 완용의 법 - 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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