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완용의 법 - 3 >
드르륵-.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내 말은 ‘원수를 사랑하라’라든지 ‘관용이 미덕이다’ 따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이완용의 정치어법을 내 식으로 해독하면
‘여기, 아군과 적군이 있다. 잘 보고 세상이 전쟁터임을 기억해두어라.’
라고 말함이 정확하겠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다. 한 걸음씩 내딛으며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사람의 몸에는 다른 동물에는 없는 특이한 기관이 있다.
일종의 필터라고나 할까.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악의는 카리스마나 권위로 왜곡된다. 때론 ‘아군’이라는 단어를 ‘호구’로 해석해 출력하는 창의적인 기능도 장착돼 있다. 난 이 내장기관을 ‘기회주의’라 명명했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
걸음을 멈춘다.
몸을 돌려 내가 찍은 발자국을 그대로 되밟아 돌아간다.
그리고 내가 교실을 나올 때 보고 느꼈던 것을 떠올린다. 그들의 눈빛. 어색한 시선. 옅은 기대감. 지저분한 흥분. 선의를 흙탕물에 처넣을 때의 배덕감. 그 마약 같던 짜릿함.
내 [눈치]는 그들의 모든 것을 감지했다.
다시 교실.
문은 내가 열어둔 그대로였으므로, 난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안으로 재진입했다.
“송헌이 없다고 나대는 꼬라지가···. 에효. 역겨운 새끼.”
“야 나도 좀 해보자.”
“킥킥킥···.”
“요즘 마더 테레사 빙의하셨으니 아주 성스럽게 해드려야지. 그럼 의미에서 좆을 좆나게 그려드립시다.”
“야 이 새끼 못 지우게 아예 파버려.”
“오 좋은데?”
교실을 가로지른다.
발자국마다 파문이 일 듯, 내가 지나쳐온 뒤쪽으로 적막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복귀했을 때, 내 책상에 달라붙어 낄낄대는 세 놈을 제외하고 온 교실이 조용해졌다.
난 놈들이 뭐하나 가만히 구경했다.
아, 그렇군.
펜으로 더럽히면 내가 쉽게 닦아내니까 이젠 아예 끌로 각인을 떠버릴 생각이다.
못 봐주겠군.
내용의 저속함과는 별개로 그냥 손재주들이 형편없다. 쯧쯧. 그래서야 손기술로 먹고 살겠나. 다들 낯짝도 박살났겠다, 니들은 그냥 공부 열심히 해야 쓰겠다.
“이걸 이렇게··· 어으 씨발!”
뒤늦게야 분위기를 눈치 채고 한 놈이 펄떡 뛴다.
이요한.
약력을 서술하면.
양아치와 악동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감. 김송헌의 오른팔을 자처하지만, 사실 오른팔까진 아니고 발뒤꿈치 정도. 가정이 엄함. 특히 아버지를 무서워하는데, 사고를 칠 때마다 김송헌이 수습해주어 그의 추종자가 되었음.
그리고 김송헌이 정신없는 지난 일주일 동안은, 내 [눈치]로 놈의 고민거리를 몇 번 해결해주었었지.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
“왜 갑자기 지랄··· 으어어억?!”
이놈은 백승원.
이요한 절친.
이하생략. 하여간 잔챙이임.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면···.
“뭐, 뭐야. 너 복도에다 오줌 싸고 왔냐?! 뭐 이렇게 빨라!”
마지막으로 박종철.
검은 머리 짐승··· 아니 노란 머리구나.
어쨌든 검은 짐승 둘과 노란 짐승 하나는 처음엔 당혹스러워하다가, 이윽고 ‘기회주의 기관’을 극성으로 돌려 뻔뻔함을 되찾았다.
이요한이 대표로 나섰다.
“뭘 쳐다봐? 낙서하는 거 처음 보냐? 저리 안 꺼져?”
“거기 내 자린데.”
“씨발 뭐 어쩌라고. 우리가 잠깐 쓸 테니까 나가 있어.”
“너네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
“뭐?”
“그냥 궁금해서 말이지. 그러면 재밌냐? 어디서 돈이라도 줘? 스펙이 쌓여? 별 의미도 없는 거에 그렇게 매달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거 웃긴 새끼네. 스무고개냐? 묻긴 뭘 시발 처묻고 지랄이야. 이유? 니가 병신이라 그런다. 됐냐?”
“······.”
“병신이면 병신답게 고개 딱 처박고 있어야지. 어딜 눈깔 치뜨고 정상인님들한테 개기고 있어? 송헌이가 요새 좀 바쁘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이냐? 어?”
난 굳이 반응해주지 않았다.
다만 가슴께의 포켓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포켓 위쪽으로 카메라 부분만 노출되어 있던 핸드폰은, 절찬리에 현장 상황을 녹화하고 있었다.
녹화 종료.
띡.
이래서 애송이는 쉽다니까.
살짝 떠밀었을 뿐인데 제 흥에 취해 할 말 못할 말 다 지껄여주다니.
“이병주 씨는 아들이 헛짓거리 하는 걸 보시면 기분이 참 좋으시겠다. 그치? 요한아?”
흠칫.
이요한이 도마 위에서 사후경직을 일으키는 생선처럼 움찔댔다.
“아내가 쓰러져서 일할 사람도 본인뿐인데. 자식새끼라고 하나 있는 거 어떻게든 잘 키워보겠다고 비싼 사립에 보내셨을 텐데 말이야. 보내놓은 학교에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나 괴롭히고 있고. 아시면 참···. 어떨까 싶은데.”
“···뭐야, 협박이냐?”
“이 정도로 협박은 무슨. 오늘 말고도 내가 찍어놓은 게 많거든? 다섯 개 정도는 되는데.”
하나씩 눌러 재생한다.
- 에이 오늘 운수 조지네. 야, 담배나 하나 찔러봐.
- 만 원? 만 원 씨발?! 이 개쉐끼가 내 수준을 아주 우습게보네? 다 털지 못하냐?!
- 아 괜찮다고. 야자한다고 그러면 몰라. 그래. 빨러 가자니까.
“난 이걸 잘 포장해서 가장 잘 아셔야 할 분에게 드릴 셈인데. 어떻게 생각하···.”
“씨발 새끼가!!”
놈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반응도 참 뻔해.
한 발자국 물러서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버클을 풀고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까지 한 호흡에 이루어졌다.
놈과의 거리는 대략 두 걸음.
딱 적절했다.
오른팔이 울렁이는 너울처럼 움직이며 허리띠에 탄력을 전달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집중적으로 가속하면 - 팡!!
요대 끄트머리가 뱀처럼 이요한의 목울대를 물었다.
들숨 타이밍에 정확히 꽂힌 타격이 놈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커헉! 어헉. 으허허어억···.”
이요한이 꺽꺽 헐떡이며 바닥을 굴렀다.
놈은 지금 주먹 만 한 돌덩이가 목구멍을 막고 있다는 착각마저 느낄 것이다. 직접 경험해봤으므로 잘 안다. 저거 참 지랄맞지.
그러나 어찌 된 경위인지는 모를 것이다.
당한 사람은 물론이고 보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뭔가 휙 하더니 이요한 혼자 널브러지더라, 그렇게 보였겠지. 내가 했지만 내 눈에도 그리 보였으니 말이다.
난 웅크리고 부들부들 떠는 이요한의 몸뚱이를 발로 툭툭 찼다.
반응이 없군.
이번엔 허리띠로 뺨을 가볍게 두드려주니 좀 반응이 있었다. 이게 고통의 주범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모양이지.
“말하는 중에 왜 갑자기 달려들고 그래. 반사적으로 쳐버렸잖아. 진정했냐? 그럼 대답해봐. 어떻게 생각하냐고.”
“···흐아. 으아아···.”
“대답 안 해? 대답 안 하면 문자로 다 보내버린다. 나 너네 아버지 번호 알거든? 5초 줄게. 다섯. 넷. 셋···.”
“잘모···. 잘모해어···.”
놈이 내 오른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뭐라고? 제대로 안 들리잖아, 요한아. 사람한테 말할 때는 또박또박 말해야지. 우린 개새끼가 아니잖니. 개소리를 해서야 쓰겠어?”
“잘···. 잘못했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보, 보내지 마, 말아줘.”
“좋아.”
난 메신저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요한, 잘 들어라.”
“······.”
“앞으로 날 귀찮게 하면, 아니 네 존재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그날 네 아버지께선 가게 문 닫고 회초리를 깎으실 거다. 이해했냐?”
이요한이 푹 숙인 고개를 더 깊게 묻어가며 끄덕였다.
“대답.”
“···응, 으응. 알았어.”
적과 아군을 구분하라.
이건 싸워야 할 대상을 오판하지 말라는 뜻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선을 명확히 긋고 이쪽과 저쪽을 가른다. 이는 곧 내 적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명명백백히 해둠을 뜻한다.
말하자면
나는 방금 이요한을 본보기로 삼아 이 반 학생 전원에게 경고를 날렸다.
난 너희를 잘 안다.
하루도 빠짐없이 너희를 관찰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거든.
그래서 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는 너희에 관한 상세한 보고가 적층돼 있다. 댓글부대 국정원 보고서보다 백배는 알차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이름
성별
특징
성격
인간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점.
자, 밑줄 긋고 강조표시까지 해둬. 마지막이 핵심이니까.
사실 나머지 정보들은 약점을 파악하다보니 저절로 쌓인 곁다리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까진 이 모든 걸 너희를 돕기 위해 썼지.
하지만 명심해.
내가 갑자기 눈이 훼까닥 돌아버리면, 난 내 능력을 너희를 망가뜨리는데 총동원해버릴 지도 모른다.
물론 아군이 되든 적이 되든 너희의 선택이지만.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그 선택의 무게를 모르고, 김송헌이란 벽 뒤에 편히 숨어서, 너네 좋을 대로 낄낄 웃으며 방관자 코스프레나 하는 것은
이제 절대
결단코
어떤 일이 있어도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백승원.”
“···어? 어어? 왜··· 왜?”
놈은 꺼벙하게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이딴 놈들한테 당하고 살았나 싶어 자괴감까지 느껴지게 하는 표정이었다.
“내 책상 새 걸로 바꿔와. 비품 관리하시는 선생님한테 가서 말하고.”
“···어, 어어? 그럼 바, 바꿔주기는 해?”
“몰라. 그래서 뭐.”
“아니야, 어떻게든 바꿔올게···.”
난 풀어둔 허리띠를 다시 찼다.
아주 느릿하게.
그 느린 시간 안에서 저마다의 들숨과 날숨들이 위태롭게 교미하고, 불안한 시선이 오갈 데 없이 방황하도록.
“종철이는 잠깐 나 좀 보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이번엔 정말로 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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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고 나오자, 박종철이 화장실 앞에서 불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의외로 덤덤해보였다.
하기야, 박종철은 나한테 약점 잡힐 게 없다. 이놈처럼 진짜 밑바닥 뚫고 막장 테크를 타는 놈은 뒤가 없으니까.
숨어서 그림 그리는 거?
그건 좀 약하지.
“이제 그만해라. 박종철.”
“···뭘.”
“김송헌 꼬붕 노릇. 그거 이제 얼마 못 갈 거야.”
“뭔 개소리야.”
“내가 그놈을 성심성의껏 개박살낼 생각이거든? 옆에 있다간 너도 다친다. 그때 가서 너 못 챙겨주니까 지금쯤 거리 두라고.”
“······.”
“경고는 이번뿐이야.”
오늘 일을 김송헌이 지시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난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이놈들의 과잉충성이었겠지.
김송헌이 힘들 때 입안의 혀처럼 군다면 나중에 크게 돌아오리라고 행복회로를 돌린 것이다.
가만 보면 짝사랑이 따로 없다. 모자란 놈들.
“···네가 그렇게 잘났어?”
박종철이 아랫입술을 사려물고 눈에 사납게 심지를 켰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옛날 같은 줄 알아? 갑자기 뭔 신기가 들려서 승승장구이신지는 모르겠는데, 착각하지 마. 내 눈에는 보여.”
“······.”
“넌 그때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어. 너만 생각하고. 이기적이고. 지금도 나한테는 관심도 없지 않나? 그냥 네 맘이 좀 편하고 싶은 거지. 아냐?”
“그래. 그럴 수도. 근데 네가 그런 말 해도 되냐? 신나게 남이나 괴롭히던 주제에.”
“맞아. 나도 자격 없는 건 똑같아. 나 개자식인 거 나도 안다고.”
후.
박종철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핏줄이 오른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똑같은 놈들끼리 훈수 두지 말자고. 다쳐도 내 몸이 다치는 거니까.”
그는 적반하장을 멋대로 휘두르고는 돌아갔다.
참 뭘 믿고 저러나 싶지만, 나도 과거에 저지른 일들이 있으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래에 저질렀던 일’도 있으니,
그것까지 포함해서.
어설프게 뽕을 넣어 오히려 왜소함이 강조되는 그의 등을 한참 보다, 나는 탁 트인 하늘로 눈을 돌렸다.
빌어먹게 파랗고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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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시즌이 시작됐다.
긴장 빡 하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학교 시험은 수능과 달리 암기력 테스트에 가깝다. 그리고 내겐 Rank D급의 [암기력]이 있었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버리고부터 나는 중간고사에 관한 걱정을 반쯤 접었다.
“자 시험지 뒤로 넘기고. OMR카드에 그림 그리는 새끼 뒤질 줄 알아.”
이윽고 시작된 중간고사.
첫 시간은 영어.
아직 언어능력 같은 재능은 못 얻은지라 나름 긴장하며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험지를 받은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이런 미친. 문제가 다 기억나잖아.’
그랬다.
시험문제는 전생과 거의 완벽하게 동일했고, 내 [암기력]은 문제를 본 순간 답까지 자동으로 기억해내버렸다.
미친.
5분만에 다 풀고 OMR카드를 다섯 번이나 체크하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전교 1등 할 수 있겠는데.
< 7. 완용의 법 - 3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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