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27화 (27/164)

< 7. 완용의 법 - 6 >

내가 절찬리에 헤벌레하고 있는 동안 전상진은 카운터에서(다시 말하지만 여긴 학교다) 입장 수속을 마치고 돌아왔다.

“오늘은 손님용 식권으로 들어온 거야. 멤버십 나오려면 이틀은 걸린대서···. 나오면 갖다 줄게. 괜찮지?”

“어? 멤버십을? 나 돈 없는데?”

“그런 건 걱정 마. 나한테 이 식당 지분 있거든. 멤버십 한 장 정도는 내 재량으로 구할 수 있어.”

지분이 있으시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는 학교··· 젠장 일일이 딴죽 걸다간 지쳐 나자빠질 지경이니 이쯤하자.

난 전력으로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 고맙다?”

“별 말씀을.”

전상진이 멋들어진 미소를 내보이며 앞장섰다.

우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집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와 나의 음식 취향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고기, 하나는 채소로 점철된 접시를 각각 들고 우린 나란히 걸었다.

내가 고기 쪽이다.

“닭다리파? 닭가슴파?”

“난 가슴하고 등살 좋아해.”

“이것도 반대네. 나는 다리랑 날개. 우린 치킨 먹으면 싸울 일은 없겠다. 안 겹쳐서.”

“응? 왜 싸워?”

“원래 콩 한쪽 나눠먹어도 지분 가지고 싸우는 게 인간이야.”

“그래? 잘 모르겠네. 모자라면 더 튀기면 되잖아.”

“······.”

난 ‘모르겠네’ 보다 ‘튀기면’에서 할 말을 잃었다.

닭 튀겨줄 셰프가 집에 대기 중이란 말인가. 이런 부르주아 같으니···.

“상진아! 여기여기! 자리 맡아뒀어!”

“응. 금방 갈게.”

양 갈래 머리를 예쁘게 땋은 소녀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우린 그쪽으로 가서 앉았다.

상진이 옆으로 아주 태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좌중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넌 뭔데 여기 있냐는 눈초리다. 해석할 필요도 없이 노골적이다.

“응? 누구야? 상진이 친구?”

양 갈래 소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 이쪽은 새로 사귄 친구. 한열이라고 해. 한열아, 여긴 내 학생회 친구들.”

“아하. 네가 걔구나? 그 슈퍼히어로?”

“···슈퍼, 뭐?”

내가 반문하자 전상진이 두 팔을 파닥파닥 휘저었다. 소녀가 그걸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아아니, 그게 아니라···.”

“꺄하하. 상진이가 얼마나 호들갑떨었는지 넌 모르지? 난 무슨 아닌 밤중에 배트맨이랑 만난 줄 알았다니까. 으흐흐. 이거 톡을 공개할 수도 없고.”

“야 하지 마. 하지말라니까아···.”

“어허. 이거 어디서 앙탈이야.”

중년 아재처럼 느글느글 웃던 소녀가 내게 손을 척 내밀었다. 머리끝이 발랄하게 휘날렸다.

“반가워. 난 은지은이야. 거꾸로 해도 은지은. 학생회에서 귀깜을 맡고 있지.”

“귀깜?”

“귀엽고 깜찍하다는 뜻이란다. 그것도 모르니?”

라며 또 까르르 웃는다.

니가 좀 정신이 이상하다는 건 알겠다, 라는 속생각을 숨기며,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 반갑다. 난 이한열.”

“한열아, 얘는 무시해도 돼. 입만 열면 헛소리라서. 그리고 다음은···.”

“야! 나 아직 소개 안 끝났는데!”

“쟤는 민종이. 학생회 회계를 맡고 있고···.”

전상진은 은지은의 방해를 꿋꿋이 견디며 학생회 전원을 소개했다.

4차원 서기 은지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회계 방민종, 날카로운 냉미남 스타일의 홍보부장 다인기 선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긴 학생회장 정희 누나. 얼굴은 알지?”

“그럼 알지.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한열입니다.”

“응. 네가 한열이구나. 마침 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저를요?”

“상진이는 나한테도 소중한 아이거든.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나중에 따로 만날까 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났네. 정말, 정말 고맙다.”

뒤이어 은지은도 “내 고마움도 받고 더블로 가!”라며 이상한 감사를 던졌지만 난 가볍게 회피했다.

윤정희는 다소 느슨해 보이는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막 떠오른 햇살 같은 얼굴이었다. 내리 쬐기보단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의 사람. 과잉되지 않은 따스함, 딱 알맞은 만큼의 거리감이 편했다.

가만히 대면하고만 있어도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분위기의 소유자랄까···.

‘···제법.’

난 웃으며 답했다.

“별 말씀을요. 그 자리에 누가 있었더라도 저처럼 했을 거예요.”

“그럴 리 있겠니. 민종이라면 보자마자 도망갔을 걸?”

“어? 선배, 왜 저한테 불똥이?”

“그리고 경찰서까지 달려가서 신고를 하겠지. 112 전화 같은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안 그래?”

“꺄하하하! 맞아! 민종이라면 그러겠다!!”

“아 왜 나한테 그러냐고요오···!!”

평범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딩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거북하기 짝이 없다.

사실 아싸 인생 40년쯤 되면 이제 인싸 언어를 몸이 못 받아들이는 수준에 이른다. 체질이 DNA 단위에서 변이하는 것이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을 까보면 위장 안팎이 뒤집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용감하게도 나는 이 인싸 대화에 적극 가담했다. 실로 방독면 없이 가스 지대를 돌파하는 각오였다 감히 말하겠다.

“이 집단의 역할 분담이 대충 보이네.”

“응?”

“민종이는 허당 캐릭터고. 지은이는 민폐 캐릭터고. 상진이는 상식 포지션을 맡고 있고. 맞지? 제 말 맞죠?”

“야! 내가 왜 민폐냐!” “내, 내가 허당?!”

두 캐릭터가 반발했지만, 정작 그 목소리가 캐릭터성에 정확히 부합하고 있어서 좌중이 빵 터졌다.

상진이는 자신의 평가가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가 느물느물 풀어져 있었다.

“그래? 그럼 인기 선배는?”

“인기 선배는 한심한 애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쿨가이 캐릭터.”

“뭐야! 선배라고 아부하는 거냐아! 그리고 한심한 애들 말하면서 왜 날 보는 건데?!”

“내게 죄가 있다면 솔직함뿐이란다. 지은아.”

“음. 오랜만에 제대로 된 후배를 보네.”

“···구, 굴러온 돌한테 빼내어지는 박힌 돌의 기분이야.”

“그럼 나는?”

윤정희 선배의 말은 부드러우면서 몰입되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말과, 내 대답에 집중했다.

“음··· 뭐랄까요. 여왕님? 평소엔 뒤로 물러나 있지만, 사실은 굽어 살피고 계시는 거죠. 항상. 어느 때나.”

“오오 맞는 것 같아.”

“묘한데 납득 되네.”

“그러게?”

“하하. 이미지가 그렇다는 얘기예요. 이미지가.”

사람들이 한 마디씩 동의하며 가볍게 떠들어댔다. 윤정희 선배는 가타부타 말없이 여상한 미소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궁금했다.

내 안목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어떠할까. 본인은 본인을 어떻게 자평하고 있을까···.

어쨌든.

오랜 만에 끼어든 인싸 대화였지만, 예전에 비하면 퍽 수월함을 느꼈다.

대화란 건 분위기만 잘 읽으면 최소한 실패는 안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치]는 이번에도 맹활약, 이 독가스 지대에서 날 어떻게든 생존시켰다.

그리고 기나긴 인내에 보답하듯,

내가 기다리던 주제가 등장했다.

“그건 제곱근으로는 안 풀리지 않아? 그보다는···.”

“···이 이항정리 문제는 합동식으로···.”

전상진과 방민종이 최근의 이슈인 수학경시대회를 주제로 두고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지은이는 질색인 표정을 지으며 노선 변화를 시도했지만, 그 둘은 이미 그들의 세계에 격리된 뒤였다.

차선책으로 그녀는 윤정희 선배에게 달려들었다. “선배! 이번에 새로 나온 아이라인이 말이죠···.”

수학과 여자여자한 주제가 대립했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두 집단은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지고야 말았다. 나는 당연히 남자 쪽에 편입. 대화에 끼어들 최소한의 명분이 확보되었다.

“그건 너무 복잡하지 않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그들의 말에 때론 반론하고, 때론 수긍하며 대화에 끼어들자, 논의의 질이 몇 단계는 도약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인기 선배의 눈에도 이채가 깃든다.

“한열이 너 수학··· 잘 하는구나? 따로 공부했어?”

“응. 조금.”

“···와. 근데 나 왜 널 몰랐지? 어디 학원 다니는 데라도 있어? 아님 개인교사?”

방민종의 물음이었다.

회계라는 직책에서 유추 가능하듯 그는 수학물리에 특기가 있었고, 자부심도 큰 듯했다.

난 좀 겸연쩍다는 투로 말했다.

“그냥 관심 있어서 혼자 공부한 정도? 그냥 그 수준이야. 대단한 것도 못 돼.”

“진짜? 그걸 다 혼자 했다고? 말이 안 되는데···.”

“원랜 잘 못 했어. 최근에 공부하다 보니까 재밌더라고. 그래서 인터넷 같은 거 찾아보고···. 보육원에서는 개인 과외 같은 것까지 지원해주진 않으니까.”

“아··· 그렇구나. 근데도 그 정도라고? 야 너 정말···.”

방민종이 뒷말을 삼켰다.

아, 천재라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최석현은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싶은 천재였다.

그런데 당신들은 알까 모르겠네. 사실 나는 내 능력의 반도 제대로 풀지 않았다.

왜 그랬느냐고?

“···한열아. 그럼 너 방과 후에는 어떻게 해?”

“나? 그냥 집에 가서 자습하지.”

“그래? 음, 그러면···.”

전상진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 세미나 모임 하는 데 너도 올래? 음. 세미나라고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별 건 없어. 수학경시대회 준비하는 친구들 몇 명 모여서 공부한 거 공유하고. 서로 문제 내거나 맞추고. 주제 세워서 발표 같은 것도 하고.”

“세미나?”

“응. 너 정도면 충분히 세미나에 참여해도 될 거 같은데. 넌 어때 민종아?”

“나도 좋을 거 같은데? 보니까 얘기도 잘 통하고.”

“···어···.”

난 당황한 척을 했다.

실제로 놀라기도 했다. 무려 개미 더듬이 두께만큼 놀랐다. 사실 이렇게나 빨리 제안할 줄은 몰랐거든.

전상진은 내 생각 이상으로 아낌없이 주는 호ㄱ··· 호그와트!

“되게 고마운 말이긴 한데.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거긴 진짜 잘하는 애들만 모이는 거잖아?”

“뭘 모르네. 그 중에서 민종이가 제일 잘 해. 그런 민종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아 그래? 좀 갑작스럽긴 한데···.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제안해줘서 고마워.”

“그래그래. 생각해보고 알려줘.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무려 보름 전부터 세미나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나였다.

상진이와 민종이는 물론, 좀 나사 빠져 보이는 지은이조차 다 0반이다.

0반의 다른 표현은 우등반.

그리고 이 우등반은 엘리트주의를 교육철학으로 삼은 이 미친 학교에서도 특별히 더 미친 제도였다. 아예 건물이 일반반과 분리돼 있고, 커리큘럼도 과학고 수준으로 맞춘 데다, 그를 위한 전문교사를 따로 초빙한다.

그냥 학교 안의 또 다른 학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얘들과 나는 만날 일 자체가 없다. 그리고 아무리 전상진이 내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한들, 계속 눈앞에 안 보이면 금세 잊혀 지게 마련.

‘···가장 좋은 건 0반에 들어가는 거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없지.’

0반은 1년에 한 번씩 종합평가를 기준으로 선발된다. 다음 선발까지 허송세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대안이 바로 세미나.

경시대회가 얼마 남지 않아 요즘엔 거의 매일 모일 테니, 친분을 다지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엔 적격이었다.

그래서 난 내 수학 수준을 다운그레이드 시켜서 내보였다.

적당히 말이 통하고, 적당히 통찰력이 있고, 그런데 독학이면 놀라운, 딱 그 정도 수준.

그래야 전상진이 ‘아, 얘는 내가 도우면 훨씬 더 잘하겠다’고 생각할 테니까.

“근데 이거 접시는 계속 쓰던 거 써야 돼···?”

이 타이밍에 어벙한 대사 하나 날려주면 금상첨화지.

전상진이 흐뭇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아냐아냐. 놔두면 서버들이 알아서 치워줘. 더 먹을 거야?”

“응. 더 먹어도 되지?”

“그럼. 당연히 되지. 난 커피나 뽑아 와야겠다. 커피 마실 사람?”

몇 명인가 더 손을 들었고, 추가 2타의 접시를 노리고 일어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랬다.

뷔페를 ‘양껏 먹을 수 있는 곳’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나 외엔 없던 것이었다. 빌어먹을 부르주아들.

“어머 상진아 오랜만이야~.” “상진이 요샌 왜 이리 연락이 뜸해?” “잘 지냈어?” “다쳤다면서? 어머어머.” “괜찮니? 괜찮아?”

전상진은 아는 척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헤치며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마음 약해서 또 한 마디씩 답하며 어설프게 웃어주는 모습이 짠했다.

인기남이란 저렇듯 고달픈 법이므로, 난 인기남이 되지 않기로 엄숙히 결정하였다.

진짜다.

못 하는 게 아니다.

그때 [눈치]가 반응했다.

나는 왼발을 쓱 뺐다.

초단위로 내려진 결정이었고, 자연히 내 발을 걸어 넘기려던 놈은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공중을 대차게 걷어찬 발이 앞으로 쭈욱 미끄러졌다. 그는 사타구니 유연성을 적극 시험하며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갹!”

“괜찮으세요?”

난 싱긋 웃으며 그를 부축했다.

일그러진 표정. 당혹스런 눈빛. 희미한 악의의 냄새. 그럼에도 ‘내가 널 넘어뜨리려 했다’고 당당히 말할 자신은 없는, 애송이의 얼굴이었다.

“···어, 어. 고마워.”

“그럼.”

“어어···.”

참 이상도 하지.

그 뒤로도 비슷한 린치 시도가 몇 번 있었다. 하필 음식을 담는 중을 노렸으므로 성공했다면 나는 피부로 스테이크 소스를 맛보는 드문 경험을 했을 테지. 망신도 망신이었을 테고.

물론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었다.

내 [눈치]는 우수했고, 이 도련님들은 경험 미숙이었다. 무엇보다 감정을 감추는데 아주 서툴렀다. 말하자면 ‘내가 널 공격할 거다아아아!’라고 크게 세 번 외치며 기습을 하는 셈이었다.

난 그들의 감정과 동기를 해독하며, 느긋이 자리로 돌아왔다.

“저기 대리석이 미끄러운가봐.”

“그래? 너는 안 다쳤고?”

“물론이지.”

그들의 동기. 우선 ‘너 따위 서민이 왜 여기에’가 가장 두드러졌고. 그 다음엔 ‘상진이 옆에서 알랑거리기나 하다니···!’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이유.

“그러니까 다들 다니실 때 조심하세요. 특히 정희 선배님은···.”

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윤정희 선배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굽도 높고 치마도 입으셨으니까. 더욱.”

그때 지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나도 치마 입고 굽 높은데? 나도 여잔데?”

“아.”

“야. 그 감탄사 무슨 뜻이야.”

“이 스파게티 맛있어.”

“야!”

어쩐지 이 여자애랑은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튼 그렇게 풍족하고 다사다난했던 점심시간이 다 가고.

“간다. 세미나는 생각해보고 얘기해 줄게.”

“응. 부담은 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내일 보자!”

“그래.”

우린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오랜만에 포식도 했겠다, 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배도 꺼뜨릴 겸 슬슬 걸었다.

대원학교는 초중고가 붙어 있고, 동아리 지원을 비롯한 여러 복지 시설들이 많아서, 면적만 따지면 작은 대학교 수준이었다.

건물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이 훌훌 간다.

가끔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여러 면에서 규격 외인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게.

설립자의 교육 이념을 계승, 고아들에게도 질 높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이사회의 명목 따위야 나도 알고 있다만···.

개뿔, 니들이 잘도 그러겠다.

분명히 어디 정부지원금 같은 걸 뜯어먹을 구석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선배님.”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몸을 휙 돌리니, 저편에 불변의 미소를 흐트러짐 없이 장착한 미소녀가 서 있었다.

“흥미로운 논리였어.”

윤정희 선배의 말투는 여전히 다정해서, 무심코 들으면 칭찬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런 얼굴을 한 인간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항상 웃는다는 건, 항상 즐거워한다는 뜻이 아니다. 웃는 얼굴이 무표정인 사람일 뿐임을 뜻한다.

그 증거는 명백했다.

‘이완용의 능력을 얻은 후 처음으로, 표정을 읽지 못했다.’

물론 이완용의 기억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꽤 보았다.

이를 테면 위안스카이.

혹은 이토 히로부미.

난세를 살며 항상 가면을 꺼내어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을 쉽게 건네지 않았고, 건넨 믿음도 잘 살펴보면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동류.

차가운 뇌와 시꺼먼 심장의 소유자.

난 그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근데 어쩐 일이신가요? 본관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냥. 한열이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설레는 말인데요. 저 착각해버릴 지도 몰라요.”

“그래주면 참 좋을 텐데.”

그녀가 입술을 매만졌다. 입매가 일그러지며 안쪽의 선홍빛 살덩이가 언뜻 드러났다. 독을 머금은 뱀의 혀처럼 매끈하다.

“그래주진 않을 테지?”

“그렇겠죠.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래-. 그건 참 피곤한 일인데 말이지.”

내 말이 그렇다.

동류를 목도하는 건 어쩜 이리 잔인한가. 동족혐오가 빈번한 이유는 평소엔 합리화해둔 내 추악함이 너를 통해 보이기 때문이다. 거울이 가차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말인데, 상진이한테 접근하는 건 삼가주면 안 될까? 걔는 순진해서 말이야. 납치범이 사탕으로 꼬이면 좋다고 넘어갈 아이거든.”

“제 생각도 정확히 같네요. 그래서 옆에서 차근히 교육해줄 친구가 필요하죠. 걔는 사람 무서운 걸 너무 몰라요. 누가 과잉보호해서인지.”

“네가 그 무서운 사람은 아니고?”

“선배만큼이야 하겠어요?”

“난 그저 굽어 살피는 여왕일 뿐인 걸. 위험하지 않단다.”

“저도 굴다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일 뿐이죠.”

대화가 잠시 멈췄다.

그러나 우린 침묵으로 서로의 겉과 속을 더듬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고요는 난투만큼이나 격렬했다.

그 끝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시기에 입을 열었다.

“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잘 가렴.”

“그럼 이만.”

우린 그런 묘한 인사말과 함께 갈라섰다.

역시나,

식당에서의 린치는 그녀가 뒤에서 사주한 것임이 틀림없다.

내가 망신을 당하고, 그 상황을 모면할 해결책으로 상진이를 찾았다면, 그녀는 나를 가차 없이 배제했을 것이다.

전상진에게 달라붙는 수많은 날벌레들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나를 각 잡고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직접 대면해서 판단한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까지 왕림하신 거겠지.

‘···친구라.’

진짜 친구를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건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그리고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경고이자 선언이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첫 대면으로서 나쁘지만은 않다. 내 계획에선 그녀도 중요한 조각이었다. 적대해서는 내 쪽이 곤란하다.

그러나 이건 물어두는 편이 좋겠다.

나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했다.

“근데 선배님.”

“···응?”

“상진이랑 선배님, 사귄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그냥 궁금해서요.”

“······.”

짧은 침묵.

“아니. 친한 누나동생일 뿐이지. 어렸을 때부터 돌봐온···.”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분명 보았다.

찰나의 순간, 늘 가면처럼 똑같던 미소에 어린 약간의 균열을.

‘···거참.’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그 반응을 곰곰이 씹고 뜯으며, 나는 교실로 돌아갔다.

< 7. 완용의 법 - 6 > 끝

ⓒ 달의등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