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아이들 - 1 >
“얘들아. 고문 선생님 왔는데.”
음.
주제파악을 시켜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오는구나.
난 넉넉히 웃으며 그녀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러나 환영이란 중요도에 따라 그 대응도 달라지는 법이다.
소중한 연인이라면 보통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간다. 그보다 덜 중요한 친구라면 대문 앞에서 맞이했을 것이다. 절찬리에 덕질 중인 최애완소 연예인이라면 공항까지 달려갈 수도 있겠지. 만약 내게 100억을 줄 귀인이라면 설사 미국이라도 날아가서 환영할 의향이 있다.
따라서 난 고윤숙의 가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환영인사를 하였다.
무반응.
설명을 멈추고 뒤돌아서 인사를 날리며 발생될 10초가량의 기회비용을 나는 차마 감당하지 못했다.
난 못 들은 척 계속 설명했다. 내 설명에 몰입해있던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생각에 잠겼다. 코멘트를 남기거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난 모든 피드백에 꼼꼼히 답하며 이 10초간의 시간에 알을 꽉꽉 채웠다.
실하고 보람차다.
이보다 합리적인 손님맞이는 없으리라 확신한다.
“얘들아! 고문쌤 오셨다니까!”
녹차로 바꿔온 민영이가 빽 소리를 지르고,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던 보릿자루 하나를 뒤늦게야 발견했다. 그제야 인사말이 어색하게 오갔다.
고윤숙은 불쌍하게도 안면에 관한 통제권을 잃은 듯했다.
얼굴 이곳저곳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굳어 있고 애써 당겨 올린 입꼬리조차 기계처럼 어색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내게 꽂혀 있었다.
“···그래, 공부들 해. 난 수학반의 고윤숙이라고 하고, 오늘은 그냥 얼굴 보러 들른 거니까.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고. 난 본관 1층 교무실에 있으니까. 그럼···.”
“선생님.”
말을 급하게 몰아붙이는 그녀를 잠시 멈춰 세웠다.
지 할 말만 하고 도망치시려고?
어림도 없지.
“밤 10시 넘어서까지 시설 쓰려면 고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고문으로 추천 드렸거든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지만···.”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마비를 넘어 혈류 장애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퍼렇게 착색된다.
듣고 싶지 않았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절며 헐떡이는 먹잇감을 쫓듯, 집요하고 철저하게 그녀의 퇴로를 막았다.
“선생님만한 분이 없어서 말이죠. 아주 책임감도 넘치시고. 차별도 안 하시고. 정말 교사의 귀감이시니까요. 그렇죠?”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별 말씀을요. 제가 평소에 선생님을 얼마나 존경했는데요.”
“······.”
당혹스럽겠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자신을 왜 고문으로 지정했는지, 일반반의 왕따 따위가 왜 0반의 우등생들 사이에서 신임을 받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해불가의 것은 공포스럽다.
그러나 괜찮다.
나는 너그럽다.
모른다면 충분히, 알아먹을 때까지 교육해줄 의향이 있다.
“0반 애들도 선생님처럼 훌륭한 분을 알고 지내면 좋지요. 안 그런가요?”
“그···래. 그럼 공부 열심히 하고. 난 이만···.”
“아! 맞다!”
벌떡 일어섰다.
고윤숙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발걸음 하나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디뎠다. 그녀와 나 사이엔 전쟁터밖에 없으므로 발밑을 조심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또한 전쟁이므로 한 보의 전진은 그만큼의 영토로 정직하게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난 땅따먹기를 하듯 걸었다. 지뢰를 피하고, 매복지를 우회하고, 야간기습을 감행하며, 느긋하되 기민하게 그녀의 앞에 섰다.
그로 인해 내 영역은 이곳 전부였고,
그녀에겐 밟고 있는 만큼의 면적만을 적선하듯 남겨주었다.
“제가 아무래도 자체평가에서 OMR 카드를 밀려 써버린 것 같아서 말이죠.”
난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평가 기준을 못 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거.”
“···뭐니 이건?”
“참가비죠. 당연히.”
그녀의 눈이 까맣게 잠기고 입술이 파르르 떨었다.
-간파됐다.
그녀는 방금 그 사실을 직감했을 터이다.
“재단 지원은 못 받지만 그래도 경시대회는 꼭 출전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따로 걷을 텐데.”
“그래도 직접 드리고 싶었어요. 중간에, 어떤 사고가,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헛수작 부리지 마라.
네 속셈 따위야 훤히 다 알고 있으니.
‘너도 나름 정치가 나부랭이니, 이쯤 되면 말을 알아먹었겠지.’
사실 참가 따위야 개인적으로 신청하면 그만.
하지만 고윤숙에게는 한 번 경고를 보내둘 필요가 있었다.
전상진이란 이름값을 빌려서 이런 퍼포먼스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계속 날 귀찮게 건드릴 테니까.
‘내가 확 돌면 상진이한테 무슨 말을 할지 나도 모른다.’
그리고 전상진은 이사장, 교감, 교장, 교무부장과 친척관계에 있는 아이였다.
“···그래. 알았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해가 빠른 것만은 마음에 드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경고가 충분치 못할 테지.
그녀가 손을 거두기 전에, 나는 잽싸게 한 장의 종이를 봉투 위에 올려두었다.
고윤숙의 눈이 이제까지 중에 가장 크게 확장됐다.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두 동공에 또렷이 박힌다.
“이런 걸 흘리고 다니시면 안 되죠. 선생님.”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찌나 헐레벌떡 사라지던지, 뒤에서 요란한 소음이 우당탕탕 들려왔다.
상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야? 저 쌤 왜 저렇게 혼비백산해서 가는 거야?”
“원래 좀 조심성이 없거든. 저 아줌마가.”
그렇게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봐도 난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교사가 학생의 OMR카드를 갈기갈기 찢어서 버리고,
그 학생이 조각난 카드 파편을 일일이 주워서 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인 다음 되돌려줬다는 일련의 사실관계는, 상진이 같은 순백의 영혼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자, 다음 문제 풀자. 얘들아.”
완용의 법 두 번째, 호가호위는 호랑이가 모르게.
8. 아이들
“앗 따가라.”
얼굴에 붙은 반창고가 떼어지며 둔통이 일었다.
난 화장실 거울을 통해 안면을 살폈다.
괴한2의 싸닥션은 실로 강력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피멍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터진 입술에 앉은 딱지는 두툼해서 얼핏 보면 또 다른 입술처럼 보였다.
딱지를 슬슬 긁어서 떼어내니 피고름이 송송 솟는다.
주머니를 확인.
반창고가 다 떨어졌다.
“···망할.”
결국 시퍼런 얼굴에 붉은 실핏줄이 잎맥처럼 돋아있는 안면 한쪽을 드러내고 입에선 누렇고 뻘건 피를 줄줄 흘리는 몰골로 귀갓길에 올랐다.
몇몇 사람들이 좀비로 오인해 때 아닌 도주극이 벌어진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미나도 없는 날이라, 일찍 돌아가 쉴 생각에 노곤해져있던 기분이 확 냉각됐다.
빨리 돌아가기나 해야지,
하고 걷고 있는데 이번엔 뭔가 수상한 시선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
이 경우엔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겠다. 노골적인 건 아니고, 그냥 어설프다는 의미에서.
설마 아직 들키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가다가 휙 고개를 돌리니 뭔가가 화단 뒤편으로 호다닥 모습을 감췄다.
그냥 놔두기도 귀찮다. 난 [대퇴부]의 탄력을 십분 이용해 그 뒤를 쫓았다···.
···라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발견됐다.
엉덩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단에 상체를 처박고 엉덩이만 내놓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
“······.”
이건 뭐 머리만 감추면 몸이 다 가려질 거라 믿는 닭대가리도 아니고.
난 녀석의 엉치뼈를 발끝으로 꾹 찔렀다.
“응앗!”
퍼드득 솟아오르더니 보도에 쭈뼛 기립한 그것은 여고생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포니테일과 잔뜩 상기된 두 볼.
원래 단정했을 용모는 현재 절찬리에 흐트러졌고,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카메라는 가슴께에서 사선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뭐냐고 배윤하.”
“······.”
“야.”
애써 딴청을 피우더니 뒤늦게야 아는 척을 하는 그녀였다.
“···어? 와아. 이거 참 우연이네. 가는 길에 다 마주치고. 오랜만이야!”
“머리에 나뭇잎은 좀 떼고 말하지.”
“자, 장식이야. 요즘 트렌드지.”
“그러냐? 그럼 니 어깨 위의 그 거미도 트렌드야?”
“응? 으으···응? 으아아 엄마야앙!”
두 번째 펄떡.
이번에는 한층 업그레이드 된 호들갑으로 길거리의 이목을 단번에 모았다.
난 빠르게 거리를 두었다.
제 일행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야, 야아아 같이가아아!”
“누구신데 아는 척을.”
“다른 데는 없어? 또 어디 붙은 거 없냐고오! 으아. 빨리. 빨리이이···!”
“없으니까 정신머리나 빨리 챙기시죠.”
“진짜지?! 진짜 없지?!”
난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다 앞서 걸어갔다.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부연하자면, 배윤하는 주현보육원에서 둘 뿐인 동기 녀석이다.
그리고 사연이 좀 있어서 나와는 살짝 불편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그걸 내가 먼저 언급할 이유는 없으므로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녀가 내 뒤를 총총 쫓았다.
“넌 왜 외간남자를 미행하고 그러냐? 스토커냐?”
“무슨 소리래. 내가 널 왜 미행하니?”
“그럼 아까 그건 뭔데?”
“자연의 내음을 음미하고 있었을 뿐이야. 요새 인싸들의 놀이문화지.”
“아싸라 미안하구먼.”
“그래. 반성하렴. 사과는 받아줄게.”
“그러시든지. 먼저 간다.”
“자, 자, 자, 잠깐만! 가, 같이 가자니까!!”
내가 신장차를 이용해 성큼성큼 앞서 나가자, 그녀가 거의 뛰듯이 보속을 높여 나와 발걸음을 맞췄다.
“아 왜 자꾸 따라오는데.”
“어차피 같은 길인데 좀 같이 가면 어디 덧나냐!”
“길 넓은데 굳이 붙어다닐 필요도 없잖아.”
“뻣뻣하기는! 남자가 그렇게 쪼잔하면 못 써!”
“남이사 쪼잔하든 말든···.”
“그러니까 니가 인기가 없는 거란다! 아우 힘들어···!”
그렇게 투닥거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귀가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마이 페이스라고 해야 하나. 그냥 찰거머리의 승리라 해야 하나···.
옛날부터 얜 이랬으므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응?”
“갑자기 왜 들러붙는데? 뜸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 어지간하면 들어줄 테니까.”
“으응··· 그거 말이지···.”
배윤하가 답지 않게 말을 흐리고 몸을 배배 꼬았다.
고개를 쓱 숙이고 눈치 보듯 올려다보는 그 가련가련한 눈빛으로 남자 여럿 홀렸겠지만, 미안하게도 난 그 여럿에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귀여운 척은 빼고.”
“···척이 아니라 그냥 귀여운 거거든.”
“허언도 빼고.”
“이건 팩트거든. 빼박캔트거든.”
“아 이 자식 진짜 말 많네···.”
“흠흠. 아무튼간에.”
배윤하가 겸연쩍게 헛기침을 하더니, 드디어 본론을 꺼내었다.
“너 요새 상진이랑 같이 다닌다면서?”
< 8. 아이들 - 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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