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아이들 - 5 >
감상을 미뤄두고, 나는 남은 작업을 마저 지시했다.
다른 것들은 탤런트가 없는 평범한 유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내게 유물이란 좀 낡은 물건을 고상하게 이름붙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관심 없다.
내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충분히 유명해서 그것이 유의미한 화폐 가치로 환산될 때에만 가능했다. 난 저것들이 내 관심사가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밀봉된 유물들이 트럭에 모두 실렸다.
나는 인부들에게 현금으로 일급을 지급했다. 한 달 동안 주식으로 벌어둔 돈이 쭉쭉 소모됐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에게 돈 봉투를 건넬 때는 뭔가 촌지의 전통을 부활시킨 것 같아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지인 디스카운트는 없나요?”
“노동은 신성한 거란다. 한열아.”
“큭큭. 그쵸. 노동은 신성하죠. 자요. 오늘 고생하셨어요.”
“고마워. 근데 저런 곳은 어떻게 안 거야? 나온 것들이 심상치 않던데.”
“음. 꿈에서 봤다면 믿으시겠어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대낮에 서서 꾼 꿈이긴 했지만.
얼토당토않게 여기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현지 쌤은 예의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역시 무당.”
“···이걸 믿는 쌤이 더 이상해. 그나저나 쌤은 어쩌다 포크레인 운전까지 하시게 된 거예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던데.”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않나?”
“완전 이상한데요.”
“지나가다 우연히 봤는데 막 기어봉 돌리는 모습이 멋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따봤어.”
“정말 별 이유 아니군요···.”
“젊을 때의 치기지. 원래 네 나이 때에는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지 않니?”
“전혀 아닌데요···. 근데 잠깐, 제 나이요?”
“응. 고등학교 때 딴 건데.”
난 생각을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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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은 유물을 싣고 골동품점 <혜선慧鮮>으로 향했다.
날치기 일로 교분을 맺은 오여사님과는 가끔 연락을 나누긴 했지만, 찾아뵙는 건 그 뒤로 처음이었다.
“얘는, 놀러오라니까 한 번 오지도 않고.”
“죄송해요. 좀 바빴어요.”
“그래도 얼굴 보니 좋네. 이쪽은?”
“서로 인사들 하세요. 여긴 골동품점의 오인화 여사님. 여긴 저 일 도와주시는 삼촌이에요.”
두 분이 인사를 나누시는 와중에, 난 트럭의 커버를 걷어내고 대리석함 하나를 들었다.
“밖에서 얘기하긴 좀 뭐한데, 안에 이거 다 들여놓을 자리가 있나요?”
“응? 그럼그럼. 연락 받고 창고 싹 비워놨지. 안으로 들어와.”
오여사께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하셨다.
그러나 10분 뒤 그녀의 여유는 딱딱하게 굳어 화석이 되었다. 일본도와 갑주에서는 놀라움이었던 것이, 주원장의 친필에서는 경악으로 진화했고, 마침내 <제음일기>에 와서는 눈 뜨고 졸도한 상태가 되셨다.
역시 골동품점 주인으로서 감정에도 조예가 있으신 분이었다.
가치를 단번에 꿰뚫어본 것이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니?”
“네. 맞아요.”
“위본이거나···. 아니, 그 전에 장물인 건 아니고?”
“제 소유 땅에서 출토된 겁니다. 뭐, 100년 전에는 장물이었겠지만요.”
“···어떻게 이런···.”
사실이다.
이완용의 자손들은 국가에 환수된 재물을 소송으로 되찾았고, 그걸 전부 되판 다음 미국으로 날랐다.
땅주인도 그때 부지를 싸게 사들였지만, 도통 쓸모가 없어 골치를 앓던 중에 내가 매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똥더미에서 금을 캐냈다.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
“그래서··· 이걸 다 어쩔 생각인데?”
“음. 일단 이 ‘제음일기’는 문화재청에 기부해야겠죠. 제 손에 두기엔 너무 큰 물건이에요.”
“···정말? 알겠지만, 보물급이라도 보상금은 생각보다 적어. 만약 미국이나 중국에서 경매에 올린다면···.”
“여사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당연히 아니지.”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름 떠보려고 하신 말임을 나는 알았다.
불법을 감수하고 외국에 내다 팔면 천대가 억대로 뛰는 마법이 펼쳐진다. 그러니 신고하지 않고 은밀히 반출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오여사님은 어린 내가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하셨을 것이다.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훈민정음 해례본의 경우만 봐도 미담과 뒷말이 공존한다.
안동본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뜻에 따라 공개되어 학술적으로 어마어마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상주본은 주인이 천억을 보상금으로 달라고 떼를 쓰다 훼손되어 현재는 그 존폐자체도 미지수인 상태다.
돈은 중요하지만, 저렇게 추해지면서까지 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명예를 얻을 기회는 그렇게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세종대왕 친필 서책의 발굴자.
모든 신문의 타이틀에 대문짝만하게 실리지 않을까.
“그럼 나머지 것들은?”
“일본 장물들은 그냥 팔아버릴 수 있을까요. 경매에 올리든, 필요로 하는 수집가를 찾든지 해서. 커미션은 두둑이 떼어드리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전문이지. 맡겨만 둬. 이 중국에서 건너온 족자는?”
“그건 그냥 보관만 해주세요. 나중에 제가 찾으러 올 때까지.”
홍무제 주원장의 서필.
이건 나중에 긴요하게 쓰일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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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k A급 재능을 얻었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하던 나는 집에 돌아온 순간 빠른 현자타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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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 [세종대왕의 언어능력](Rank A)
-이 탤런트는 언어이해, 논리적 사고, 추론 등의 지능지수에 관여합니다.
-동조율 :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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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동조율은 13.78이었다.
그리고 청색 카르마 100을 투입하자 15.78이 되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미친. A랭크를 100%로 올리려면 카르마 5,000이 필요하다고?!’
카르마 100이면 Rank D 이하는 풀로 채워지던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현재 15%임을 감안해도 앞으로 4,250 포인트는 더 넣어야 된다.
대충 계산해볼까.
지금 영어사전 10장 외우는데 100포인트씩 벌고 있으니, 오천을 꽉 채우려면 사전 하나를 통째로 다 외우다시피 해야 한다는 소리다.
아무리 내 [암기력]이라도 몇 달은 꼬박 들여야 한다.
‘평가원 모의고사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거 큰일이네. 이거 랭크가 너무 높아도 문제구먼.’
사실 내 모의고사 대책은 단순했다.
재능을 얻는다.
끗.
정말이다. 그 이상은 없다.
가장 중요한 국영수 중에 수학은 이미 완성됐다.
영어와 제2외국어는 이완용의 영향 탓인지 빠르게 수준이 높아지는 중이었다.
이완용은 미주 공사였던 만큼 영어에 능통했고, 일본어는 영어만큼은 아니지만 듣고 알아들을 수준은 됐다. 그리고 난 그런 자와의 초기동조율이 87%에 달했다.
그러나 언어는 답이 없다.
그나마 문학 문제는 [필력]의 퀘스트를 성실히 이행하다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은데 반해 비문학은 여전히 심각했다.
혼자 모의고사를 풀어본 결과 현재 내 언어성적은 50점에서 60점을 간당간당 넘나드는 수준. (그나마 전생에 비하면 많이 오른 것이다.)
여긴 [암기력]의 도움도 소용없었다. 중간고사야 미리 범위를 두고 준비를 했으니 그 버프로 문제랑 답까지 다 생각난 거지, 모의고사 문제들은 어림도 없었다.
물론 나머지 과목으로 압살해버리면 부정행위라는 얘기는 안 나오겠지만···.
‘···그럼 뭔가 모양이 빠지지.’
0반을 잡을 일반반의 다크호스로 한창 주목받고 있는데 언어 반타작을 해버리면 그게 무슨 쪽이냔 말이다.
그걸 보며 겔겔 쪼갤 고윤숙의 낯짝을 생각하니 속이 부글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특히 언어는 하루이틀 공부한다고 수준이 확확 뛰지 않는다.
어떻게든 포인트를 모아서 재능을 온전히 흡수하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경시대회가 이제 곧이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진 또 시간이 걸리고. 나온다고 해도 몇 포인트나 줄지 미지수다. 결국 지금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바닥에 정좌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염원했다. 여건이 됐으면 정화수라도 떠다놨을 것이었다.
대왕님.
퀘스트를 내려주소서!!
하니 왕께서 성은을 베풀어주셨다.
띠링- 하고 퀘스트 창이 뜬 것이다.
“오오! 대왕님께서 만민을 굽어 살피시도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PC방으로 달려갔다.
세상은 오염되어 있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그 오염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미세먼지를 배달하는 편서풍이나 다름없다. 난 거악을 처단하는 소명을 품어 안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어느 유머 사이트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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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등대132] : 뭐 이 씨팤? 나한테 일해라절해라 하지 말지?
ㄴ [king-sejong77] : ‘일해라절해라’가 아닌 ‘이래라저래라’가 표준어법에 맞는 말이로다. 혹여나 일과 절을 시킨다는 의미라면 ‘일해라 절해라’로 띄워 쓰는 것이··· [더 보기]
ㄴㄴ [달의등대132] : ?? 뭐여 이 뜬금없는 관종쉑은? 도랏?
ㄴㄴㄴ [king-sejong77] : 현대 국어에서 연음은 표기에 반영하지 아니하는 것이 원칙이로다. 따라서 ‘도랏’이 설령 어말어미를 생략한 말이라도 ‘돌았’으로 표기함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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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기사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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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등대132] : 미친ㅋㅋ 헬반도 정치 수준보소ㅋㅋ 이건머 소잃고뇌약간 고치는것도 아니고ㅋㅋㅋ
ㄴ [king-sejong77] :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가 본디 속담이로다. 외양간이란 마소를 기르는 곳을 뜻한다. 요컨대 네놈의 집을 뜻하노라 이 언어파괴자야. 띄어쓰기는···[더 보기]
ㄴㄴ [달의등대132] : 뭐여. 나 이쉑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나 따라 다니냐? 이 새끼 어의가 없네?
ㄴㄴㄴ [king-sejong77] : 우선 과인에겐 어의가 있다. 그러므로 네놈의 말은 틀렸다. 그나마 말이 되려면 ‘어이가 없다’고 해야 옳다. 헌데 언어생활을 보건대 네놈이 더 어이가···[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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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댓글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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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등대132] : 작가님 빨리 낳으세요ㅜㅜ 휴제가 너무 길습니다···.
ㄴ [king-sejong77] : 작가가 임신이라도 하였느냐. 문맥상 ‘낳다’가 아닌 ‘낫다’의 뜻이므로, ㅅ탈락을 반영해 ‘나으세요.’라 표기함이 옳다. 그리고 휴제란 단어는 용례가···[더 보기]
ㄴㄴ [달의등대132] : 시박ㅜㅜㅜ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으니까 그만 좀 따라댕겨! 왜 구지 난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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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구지’를 ‘굳이’로 정정해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세상이 조금은 청정해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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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언어능력] : 관련 퀘스트 발생!
- 문자가 혼란하니 말이 상통함이 없고, 말이 불통이니 세상에 불편한 침묵만 가득하도다. 세상의 그른 말을 바로 잡거라.
- 보상 : 청색 카르마, 교정 50건당 100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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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터넷에서 50건의 맞춤법 오용 사례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역시 대왕께선 그릇이 크셨다. 통도 크시고 몸도 크시고 다 크셨다.
외쳐!
갓세종!
아, 갓은 영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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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확실하지?”
“···못 믿겠으면 그냥 가든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마···안! 자 파란불이에요! 지금 건넙니다! 아가들~! 뛰지 말고!”
배윤하의 목소리가 드라마틱하게 변한다.
겨울에서 어떤 중간과정 없이 바로 봄으로 도약하는 것만 같아 좀 신비롭기까지 했다. 꽃봉오리를 틔우고 훈풍을 불러오는 음성.
그 마력 같은 톤의 선율에는 과연 악명 높은 초글링조차도 무심코 따르게 만드는 이끌림이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의 아이까지 횡단보도를 건너고, 빨간불로 변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녀가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훈풍은 어느새 식어있었다.
“나 상진이가 이런 데서 봉활한다는 거 처음 듣는다고.”
“당연하지. 다른 사람들 안 하고 안 볼 때만 참가했으니까.”
“그래?”
“학생회잖아. 그 정도는 조정할 수 있지. 그리고 지나친 줄임은 외려 경제적이지 못하느니라. 봉활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라 바르게 이르라.”
“···왜 갑분 사극톤?”
“왠지 이래야 될 거 같아서. 그리고 갑분이 아니라···.”
“알았으니까 닥치시고요. 그래서 상진이 언제 오는데? 내가 오는 거 알고 안 오는 거 아냐?”
“그러진 않을 걸.”
사실 봉사활동까지 폐쇄적으로 참가하게 된 건 상진이의 의지라기보다 학생회장 윤정희의 오지랖 때문이다.
그녀가 개입하기 전에 타이밍 잘 잡아서 기습적으로 제안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근데 오늘은 카메라 안 메고 왔네?”
“···그래야지. 중요한 날이니까. 괜히 첫인상 나빠지면 안 되잖아.”
“그러냐.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네. 배윤하 씨.”
“뭐래. 나 그때도 내 앞가림은 했거든?”
퍽이나.
내가 픽 웃자 배윤하가 인상을 쓰며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하나도··· 아팠다. 젠장. 이 계집애 뭐 이리 손이 매워.
그러나 내 조소를 취하할 생각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까지는 체육시간에도 카메라를 지참했던 그녀였다. 거의 몸의 일부나 다름없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그다지 관심두지 않았었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하나. 제 안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버티는 일만도 버겁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상진이는··· 어, 왔다.”
“와, 와, 와, 왔다고?”
도로 저편에서 봉사활동 조끼를 입은 전상진이 해맑은 미소를 흩뿌리며 뛰어왔다.
“한열아! 많이 기다렸어? 미안, 누가 자꾸 말을 걸어서 말이지.”
“오늘도 인기를 주체하지 못했구나. 너도 참 한결 같네.”
“하하. 그런가.”
“빨리 와서 이쪽에 서고. 아, 내가 오늘 한 명 더 올 거라고 얘기했던가?”
“응응. 들었어. 아, 그럼 이쪽이?”
“그래, 얘가 내···.”
친구, 라는 단어에서 잠깐 머뭇거린 순간을 배윤하가 치고 나왔다.
내 앞에선 식은 시루떡 같더니 어느새 풀 메이크업 페이스를 장착하고 등장한 것이다.
“안녕, 나 한열이 친구 배윤하라고 해. 네가 상진이구나? 반가워!”
“아아. 그래. 나도 반가워. 오늘 하루 잘 부탁해.”
훈풍과 훈풍이 만나 대훈풍이 일었다.
이런 청춘이 만개하는 분위기는 나 같이 쉰내 나는 영혼으로선 접하는 것만으로 데미지였다.
태양빛에 직격당한 좀비의 기분으로 나는 녀석들과 거리를 벌렸다.
< 8. 아이들 - 5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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