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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37화 (37/164)

< 8. 아이들 - 9 >

“모두 꼼짝 마! 경찰이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증거인멸 혐의 추가야! 다 멈춰!!”

물론 멈추라고 해서 멈출 정도로 말을 잘 들었으면 범죄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권 순경의 경고를 최선을 다해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 놈이 방에서 잭나이프 들고 튀어나오고, 또 한 놈은 화장실에서 기름통 들고 등장, 최초에 조우한 놈은 붓고 있는 팔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마지막 놈은 진짜 힘들어보였으므로 더 고통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 턱을 걷어차 기절시켰다.

"······."

말 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두 범죄자.

한 놈이 기름통 뚜껑을 돌리는 것을 본 순간 난 그 뜻을 바로 알아챘다.

여길 통째로 태워버릴 생각이다!!

잭나이프를 든 남자가 먼저 내게 달려들었다. 난 거리를 잴 것도 없이 바로 손을 뿌렸다. 허리띠가 우악스럽게 놈의 안면을 덮쳤다. 떵-!

“뜨헉-!”

그러나 남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고통을 참고 우리 진로를 막아선 것이다.

탕-!

권 순경은 뒤쪽의 기름통을 든 남자에게 최루액탄을 발사했지만, 선두의 남자가 몸으로 막아서면서 허무하게 소비됐다.

“에이 비켜!!”

선두를 옆으로 치워버렸을 때, 이미 방 안은 기름 범벅이었고 남자는 점화시킨 지포라이터를 든 채 씩 웃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몽땅 멈춰! 다 타죽기 싫으···.”

그러나 권 순경님은 상상 이상으로 빠꾸없는 분이셨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2탄 째의 최루액탄이 웃는 낯짝에 냅다 꽂혔다.

놈이 박쥐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안면을 감싸 쥐었고, 자연히 지포라이터는 손을 벗어나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추락했다.

불씨를 그대로 꼬리에 매단 채.

난 이를 악물며 집중했다.

안구를 안압으로 발사해버릴 작정으로 눈에 힘을 줬다. 허유하는 불티의 궤적이 망막에 새겨졌다. 라이터의 속도와 각도, 추락 지점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계산된다.

예측과 동시에 손끝이 반응.

내가 출수시킨 허리띠 끝이 목표한 포인트에 정확히 도달하고-

쩡-!!

불씨가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난다.

다행히도 라이터는 꺼진 채로 방구석 어딘가로 날아가 처박혔다.

이게 쉬워 보이지만 자그마치 [동체시력] [수리적 통찰력] [손재주]가 합쳐진 컴비네이션 기술···.

젠장 농담할 기운도 없네.

이번엔 진짜 지릴 뻔했다.

권 순경이 눈을 맹하게 껌벅대다, 실로 팔자 좋은 감상을 늘어놓았다.

“···어. 왜 손을 놨는데도 라이터가 안 꺼졌지?”

“지포라이터잖아요! 지포! 닫아야 꺼지는 거! 몰라요?!”

“와. 진짜 저런 게 있어? 난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줄···.”

“···아오···.”

“어, 어쨌든. 빨리 수갑 채워야지···!”

빠꾸가 없는 게 아니라 머리에 빵꾸가 나신 분이었군.

믿어서 손해 봤어···.

권 순경이 바닥에서 끙끙대는 놈들에게 수갑을 채우는 사이, 나는 방을 휘휘 둘러봤다.

얼추 정리된 거 같은데 왜 뭔가 빠진 기분이···.

“근데 그 여자는 어디 갔어?”

민기 선배가 렌즈를 내게 고정해둔 채 말했다.

“···음?”

“그 고양이 주인 사칭자 말이야. 여기 온 거 아니야? 근데 왜 없지?”

“···어!”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세 놈 모두 남자다.

화들짝 놀라 GPS 신호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빌라에서 멀어지고 있는 게 확인됐다. 그 사이에 또 튄 거야? 어떻게?

서둘러 베란다로 나가보니, 실외기 옆에 설치된 완강기와 그 밑에 길게 늘어진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모습은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뭐, 얼굴도 알고. 근거지를 털었으니 저거 하나 놓친다고 큰 문제는···.’

그때 여자 앞으로 뭔가가 휙하고 튀어나왔다.

짧은 노란 머리, 삼단 키높이 깔창과 강렬한 어깨뽕, 그럼에도 왜소한 몸집의 박종철이었다.

녀석은 전기충격기를 앞으로 내세우고 여자에게 용맹히 돌진했다···.

"이야아아아! 으컥!"

그리고 넘어졌다.

여자가 돌격을 가볍게 회피하고, 되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것이었다. 허공에 붕 떴다가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엑스트라 퇴장 장면이라 유감이지만.

여자는 이 븅신은 뭔가 하는 눈으로 박종철을 보다가, 드랍된 아이템을 파밍하듯 떨어진 전기충격기를 주워들었다.

심지어 무기까지 뺏겼어!!

트롤 경연대회에 내보내면 대상을 노려도 될 만한 훌륭한 장면이었다. 난 얼굴을 감싸쥐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그런데 그 순간.

"안 돼! 못 간다 이 나쁜 년아!!"

개구리처럼 납작히 뻗어있던 놈이 돌연 펄쩍 뛰더니 여자의 다리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여자는 당황이 역력한 표정이 됐다.

등이며 옆구리를 마구 걷어차 보아도, 박종철은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초조함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이 뇌를 장악하고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 결과-

빼앗은 전기충격기를 박종철에 목덜미에 꽂아버린 것이었다.

지직-!

그리고 바짝 붙어있던 둘은 사이좋게 전기 마사지를 나누었다.

여자는 인체의 전도성을 훌륭히 증명하며 박종철 옆에 나란히 몸을 뉘였다.

덜덜덜-.

“뭐여 저게···.”

멀찍이 있던 은지은이 눈치를 보더니, 종종 달려와 여자의 손에 케이블 타이를 묶었다. 행여 전기가 옮을까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그리고는 베란다 위의 우리 셋을 발견하고 손을 휙휙 흔들었다.

그녀의 해맑음과 경련하는 두 남녀가 대비되어 뭔가 형언하기 힘든 감상이 밀려왔다.

뭔가 엉망진창이지만 어쨌든 검거완료였다.

---

“···와, 얘네 진짜 나쁜 놈들이었네.”

권 순경이 혀를 내둘렀다.

파기되지 않은 서류와 하드디스크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어디 하나 노리고 몇 달 단물을 쪽쪽 빨다, 걸릴 거 같으면 근거지를 이동하는 식으로 활동한 거 같네. 영상이나 사진 자료는 외국 포르노 사이트에 판매한 거 같고.”

시립여성회관.

어디어디 모텔.

모 피트니스 센터.

이 4인조 몰카 범죄단은 하여간 찍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골라 다니며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것이 이번엔 대원고교였던 것이고.

그간 그들은 예측불허의 대담함과 창의적인 범행 수법으로 수사망을 성공적으로 피해 다녔다. 나름 팀으로서의 조직력도 갖췄으니 무서울 게 없었겠지.

아마 날 만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신나게 그 짓을 하고 다녔을 것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배윤하가 대단하긴 대단하지.’

잘린 꼬리 하나뿐이지만, 어쨌든 경찰도 못 잡던 걸 잡은 거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느냐?

걔는 전교생의 인상착의를 몽땅 기억하고 있다. 군중 속에 숨은, 그것도 마스크까지 낀 범인을 ‘쟤는 이 학교 학생이 아니다’라고 단번에 간파해버릴 만큼 상세하게.

배윤하가 머리가 비상하긴 하지만, 저건 기억력으로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강한 목적의식과 집요한 탐구심.

광기에 가까운 향상심.

그녀에겐 그런 게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권익 순경이 자료를 빼내다 지쳤는지 침대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몰카 범죄가 심각한 문제이긴 한데 말이야. 막상 처벌 자체는 그렇게 세지 않단 말이지.”

“그 부분은 좀 문제가 있죠. 근데요?”

“그러니까 이상하지. 방화로 은닉해야 될 만큼 이 자료들이 치명적인가? 방화범 쪽이 처벌 수위는 더 센데? 아니, 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방화 살인까지 가겠네.”

“음···. 그냥 위협만 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요?”

“위협할 걸 대비해서 평소에도 가솔린을 둔다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

“···확실히···. 그건 좀 이상하네요.”

“뭐 앞으로 조사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만.”

그가 던진 화두에 [눈치]가 강렬히 반응했다.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다는 감이 강렬히 느껴졌다.

‘···확실히. 내가 느끼기에도 그냥 위협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수틀리면 정말 다 태워버릴 생각이었지.’

나는 거실로 나와, 바닥에 흥건한 기름들을 차근히 바라봤다.

기름은 거실에서부터 어느 방 안쪽까지 강을 이루고 있었다. 기름통이 거실에 있으므로, 사실 기름은 저 방에 가장 먼저 뿌려진 것이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저 방 안에 우선적으로 ‘태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몰카 자료가 몰려있는 건 정작 다른 방이야.’

거긴 지금 권익 순경이 땀 빼며 자료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이 방에 뭔가 있는 건가.

안쪽을 쓱 훑어보았다. 책상과 침대, 카펫과 그 위 협탁이 좁은 방 안에 배치돼 있다. 책이나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등 별다를 게 없는 방이다.

수상한 점은 5초 만에 발견했다.

카펫이 너무 촌스러워서 걷어보니 바닥의 콘크리트가 움푹 파여 있고, 홈에 딱 맞게 제작된 목재 함이 그 안에 쏙 들어가 있었다.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간단히 따버린다.

‘···USB에 외장하드들이군.’

목재 함에는 저장매체들이 한 가득 들어 있었다. 난 놈들이 이걸 파기하기 위해 불장난을 벌이려던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대체 이게 뭐기에.

나는 지문이 남지 않게 손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그 안을 가볍게 뒤적였다.

“뭐해?”

권 순경이 저쪽 방의 증거물을 다 담은 건지 이쪽 방으로 건너왔다.

“아, 기묘한 걸 발견해서요. 놈들이 이런 걸 여기 숨겨 놨네요.”

“어, 그러네. 뭔데 콘크리트까지 다 파내고 저런 걸···.”

“그러게요. 조사해보시고 뭐 나오면 저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미안하지만, 안 돼. 나 저번 일 때문에 아직도 까이고 있단 말이야.”

그때 밖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길게 울렸다.

“선배들 왔나보다.”

권익 순경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USB 하나가 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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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간만에 재밌었다!! 뿌듯하고!”

경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은지은이 포만감을 느끼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민기 선배는 잘 찍혔는지 캠을 확인하고 있었고, 박종철은 침을 질질 흘리며 실신해 있었다.

“그러냐.”

“응! 역시 오라클 말 듣고 오길 잘 했어!”

“이제 내 영험함을 믿겠느냐, 어린 중생아.”

“오오! 믿습니다! 열맨! 밍기밍기 선배도 얼른 외치세요. 갓한열님을 찬양하라구요.”

“난 이미 속으로 경배를 드리고 있었다. 열맨. 부디 제게 퓰리처의 길을 열어주소서.”

나도 모르는 사이 한열교라는 정체불명의 종교가 창단되고 있었다.

제2신도와 제3신도가 누가 대사제가 될 것인지를 논하는 걸 보면서, 나는 문득 든 상념에 잠시 정신을 맡겼다.

‘배윤하가 이즈음에 집행부가 된 건 확실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회장과 부회장을 제외, 학생회 집행부는 최대 3명까지 두는 게 회칙이다.

헌데 현재 집행부는 3명이 꽉 차 있었다. 배윤하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웠든 원래 있던 자리를 비우고 거길 들어갈 수는 없다. 따라서 전생에선 3명이 아니라 2명이었을 거다.

회장 윤정희, 부회장 전상진, 이 둘은 일단 논외고.

그렇다면 회계 방민종, 서기 은지은, 홍보 다인기, 이중에 누군가 한 명이 스스로 그만두거나 쫓겨났다는 소리인데···.

현생에는 내 행동으로 미래가 변했나? 어떤 지점에서? 그럴 건덕지가 있었나?

‘모르겠네.’

정보가 너무 적다.

학생회 구성까지 기억해둘 정도로 전생의 내가 한가롭지는 못했다.

“지은아, 최근 학생회 별 일 있어?”

“응? 별 일이라면 있었지. 몰카 사건. 방금 해결됐지만.”

“그런 거 말고. 학생회 구성원들한테서 뭔가 개인적인 사건사고들이 있다든가. 누군가 전학 갈 예정이 있다든가.”

“글쎄? 상진이한테 묻지마 범죄가 일어났던 거? 그거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는데.”

“···음. 그래.”

난 턱을 쓸었다.

뭐, 됐다. 어차피 학생회 집행부는 내게 옵션 같은 선택지에 불과하다.

되면 베스트지만, 안 된다고 해서 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진 않을 거다. 난 빠르게 미련을 접었다.

“오케이. 말해줘서 고마워. 사례로 하나 말해주자면, 상진이 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야.”

“응? 정말?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상진이도 마찬가지고.”

“단서가 적으니까 경찰 조사가 그렇게 난 거지. 용의자도 입을 다물고. 근데 그때 등장한 괴한은 두 명이었어. 팀으로 묻지마 범죄 저지르는 애들 봤어? 만약 있다면 거기서부턴 테러리스트라고 봐야지. 테러리스트에겐 집단이 공유하는 목적성이 있고.”

“어어? 진짜? 왜 난 그런 걸 몰랐지?”

“아무도 안 말해주니까 몰랐겠지. 상진이도 별로 말하고 싶은 기억은 아닐 거고. 뭐, 그냥 알고만 있어. 상진이네 집안에서 싫어한다니까 기사화할 생각은 말고.”

“···흐음.”

앗. 또 그 눈이다. 뭔가 흥밋거리를 찾았다는 눈빛.

난 이 엉뚱한 영혼이 또 괜한 걸 들쑤시는 게 아닐까 잠시 걱정했지만, 경찰들도 우왕좌왕하는 사건을 고작 여고생이 건드린다고 부스럼이나 생길까 싶기도 했다.

‘뭐, 알아서 하겠지.’

난 역시나 빠르게 관심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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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아이들 - 9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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