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아이들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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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다.
어렸을 적, 배윤하를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 외의 다른 감상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녀는 원래도 작은 몸을 더 깊게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넓은 곳에 있어도, 소녀는 허락된 공간이 딱 그만큼이라는 듯 좁디좁게 제 몸을 죄었다.
만약 가능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몸을 차곡차곡 접어서 카메라 크기까지 작아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케이스 안에 본인을 얌전히 수납해두고 영원히 나오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보는 것만도 불편한,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어둠.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유독 배윤하를 못살게 굴었다.
마녀를 퇴치하는 기분이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나도 처음엔 그녀가 적이 꺼림칙하여 멀리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하루, 배윤하가 학교에서 실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심술궂은 남자애가 그녀의 카메라를 빼앗아서 도망쳐버린 것이다.
배윤하는 발작하다 그대로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병원에서 잠깐 깼다가도 카메라가 없는 걸 깨닫고는 울다 까무룩 기절하길 반복했다.
다른 모두와 함께 나 역시 카메라를 찾아 나섰고, 어쩌다 보니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됐다.
역시나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남자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오락실에서 놀고 있었다.
이미 관심이 사라졌는지 카메라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상태였다.
그때 내 머릿속 뭔가가 툭 끊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손에 배윤하의 카메라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또 잃어버리지 마. 바보 같은 계집애야.”
그때 배윤하가 지은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재난현장에 방치되어 있던 아이가 구원받았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까. 눈물 한 방울에 안도감이 섞어 흘렀다. 한 번의 한숨에 공포가 밀려나와 휘발됐다.
죽은 땅에 돋아난 새싹 하나,
그러나 단 하나이기에 값진 어떤 생동감이, 저 말라붙은 몸에 차오르는 듯 보였다.
그때 난 결심했던 것이다.
이 아이를 구하고 싶다고.
“···으응, 고마워.”
그렇게 그 한 마디가 내 평생을 사로잡았다.
마치
저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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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굣길을 걷고 있는데 오 여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화재청에서 연락 왔어. 문화부장관님이 직접 표창하신다는데?
“오, 정말요?”
-그래.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닌데, 그럴 가능성은 꽤 높아. 요새 정치 상황이 흉흉하잖아. 정부에선 이런 식으로라도 시선을 환기시키고 싶었겠지.
“어쨌든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네요. 오여사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무슨 말이니. 고생 하나도 없었다 얘. 내가 이쪽 일 좋아해서 하고는 있는데, 사실 기분 좋은 소식은 잘 없거든. 맨 장물에 위조에···. 근데 오랜만에 즐겁게 일했어. 내가 살다살다 정부부처에서 감사 인사까지 들어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니깐.
“별 말씀을요. 그건 그렇고, 이시국씨 물건들은 잘 있나요?”
-그럼그럼. 품 좀 팔아보니까 관심 있다는 큰 손들이 꽤 있었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그런데, 이거 아예 경매에 붙여보는 건 어때?
“경매요?”
-그래. 특히 일본도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보존 상태도 좋고, 그 동안 유실된 상태였다는 스토리가 있어서인지 프리미엄이 꽤 붙었어. 이러면 그냥 팔기 좀 아깝지. 어때?
“제가 뭐 그쪽에 아는 게 있나요. 오여사님이 판단하신 대로 진행해 주세요.”
-오케이. 그럼 이건 그렇게 하고. 진행사항 또 있으면 얘기해 줄게.
“알겠습니다.”
-이제 시끄러워지겠네. 한열이 각오는 됐어?
“예? 무슨 각오요?”
-훈민정음의 초안이라고 할 만한 책이 발견된 거야. 최초 발견자의 얘기를 모두가 듣고 싶어 하지 않겠어? 이제부터 엄청 귀찮아질걸?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고작 발견해서 넘긴 것에 불과한데.”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문화재 관리법에 따르면 땅 파서 출토된 문화재는 모두 국가 소유다.
정부에서 문화재를 ‘매입’한다고 하지 않고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내가 주인임을 입증하려면 물려받았거나 거래했다는 증빙이 있어야 된다. 고아인 내겐 불가능한 일이라 처음부터 욕심을 접은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에 ‘제음일기’를 넘긴 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순리대로의 일이었다. 내게 포커스가 맞춰질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나는 지역신문이나 학교신문에 실려서 학생과 교직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면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바라는 명예는 딱 거기까지. 나랑 관계없는 자들 입방아에 오르내린다고 좋을 게 뭐란 말인가.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뭐.
“두고 봐도 뭐 없다니깐요. 이제 끊을게요. 또 연락주세요.”
-그래~.
오여사님은 다 좋은데 가끔 팔불출이라 좀 부담스럽다.
내가 손자처럼 느껴지시는 모양이다.
‘···궁금하긴 하네. 좀 찾아볼까?’
웹서핑을 해보니 과연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검색 순위는 ‘제음일기’ ‘세종대왕’ ‘훈민정음 원본’ 등등이 점령. 뉴스에선 한국대 교수라는 사람이 나와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구를 통해 추정된 사실들에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를테면 반치음의 존재를 생각해볼까요. 현대국어에선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고, 사실 중세 문헌에서도 금세 사라지는 음가인데요, ‘제음일기’를 보면 이와 관련해서 세종대왕께서 하신 고민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를테면 어떤···.
-‘쓰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흔적뿐이지만 자취는 여실하다. 남부 지방의 노인들은 비교적 또렷하게 사용한다. 그도 곧 사라지겠으나, 조선팔도가 하나이며 그 하나됨이 곧 정음의 진수이므로, 이 또한 기록에 남겨둠이 옳겠다.’ 즉, 반치음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이미 사라지고 있었고, 세종대왕께선 한양말로는 쓰이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구구절절한 내용이라 얼른 영상을 종료했다.
사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 15세기 중세국어를 직접 듣고 온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저 분야에 한해서만큼은 내가 저들보다 전문가다.
근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센세이셔널한데.
왜지? 다들 중세국어를 탐구하고픈 욕망이 새삼스레 샘솟지는 않았을 거고···. 좀 더 웹을 살피다보니 대충 사정이 이해됐다.
‘···아항. 그런 이유로?’
-이번 수능 언어에 제음일기 관련해서 반드시 나옴. 이건 무조건 빼박임.
-우리 학원 쌤도 사본 구해서 스터디 중이시라더라. 분석해서 강의 내신다던데.
-지금 해석 나온 거 없나? 이거 가장 먼저 책 내는 사람이 돈 쓸어 담겠는데.
-출판사들 다들 대기타고 각재고 있을 듯ㅋㅋㅋㅋㅋ
-아놔 지금 공부해야 될 것도 한 가득인데 또 뭐가 등장한 거야···.
학원가에서 난리니 학부모들도 덩달아 난리고, 학생들은 그걸 또 머릿속에 구겨 넣어야 된다는 생각에 난리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 절반이 난리가 난 거다.
물론 이 난리통에서 나는 홀로 자적했다.
수능 출제자에게 한수 가르쳐줄 위치에 있는 나로선 하품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책 내볼까. 이미 다 외워서 내용은 빠삭하고,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 정도만 달아도 잘 팔릴 거 같은데.’
근데 주식으로 버는 돈도 상당한데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애당초 출판사에서 나 같은 듣보를 써주긴 할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덜컥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다.
얼떨결에 끊어버렸는데, 끊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또 전화가 온다. 아까와는 다른 번호다.
“···뭐야 이거.”
그 와중에 문자가 윙윙 거리면서 폰에 쌓여갔다.
-K일보 황열음 기자입니다. 제음일기 최초 발견자···
-안녕하세요. 이한열 군이죠? 백제일보 김아람 기자인···
-전화 좀 받아주세요. 저 유투버 나랏말쌈이라고 하는 데요···
난 좀 무서워져서 핸드폰을 꺼버렸다.
이게 뭔 일이람.
내 어리둥절함은 교문에 도착하고 나서 정점에 달했다.
교문 앞은 외부인들로 왁자지껄했다.
트집 잡는 일로는 이 학교 제일이며, 교문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학생부 이대헌 선생이 어쩐 일로 쩔쩔매고 있었다.
알다시피 등굣길의 교문이란 학생부 교사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한다. 스포츠맨의 홈그라운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피라냐에게 실시간으로 쪼아 먹히는 물소처럼 보였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 한열이 저기 오네요. 아하하···.”
1초간 정적.
2초 째에 저쪽에 머물던 인파가 내게 몰려왔다.
우다다다-.
인파人波, 이 얼마나 정확한 비유인가. 인간의 무리는 그야말로 격랑이 되어 날 순식간에 휩쓸었다.
“한열군! 이한열군 맞으신가요!”
“제음일기 최초 발견자로 알려지셨는데요! 어떻게 발견하셨는지···.”
“자, 잠깐.”
“여자친구는 있나요?!”
“땅 소유자도 본인인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그 땅을···.”
사람도 많고 말도 많았다.
너무 많은 말들은 반대로 아무 말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아닌 말들이 벽처럼 나를 둘러싸 이곳과 저곳을 나누었다. 버젓이 걷고 있던 길 위에서 나는 감금됐다.
이건 뭐 질문으로 얻어맞는 수준이었다.
난 질린 나머지 국회의원을 살짝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맨날 시달리면 정신병으로 좀 돌아버려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 매해마다 국회에 정신병자가 창궐하는 이유가 이로써 해명되었다. 바른 나라 바른 정치를 위해서 기자들은 말을 좀 줄여야 한다···.
“뭐하는 건가요?! 학생이 지금 숨을 못 쉬고 있잖아요!!”
그때 따듯한 손이 내 팔을 쥐고 인파에서 날 구조해냈다.
구조.
그렇다, 구조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으아아···.”
“완전 정신을 놨네! 당신들! 기자면 기자지,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굴어도 돼요?!”
“아니 우린 그냥 취재를···.”
“시체 만들어서 취재하면 참 양질의 정보가 나오겠네요! 물러서세요!”
휘청거리는 내 몸을 부드러운 손길이 받쳤다.
아, 역시 내 몸은 저질이다.
이런저런 재능을 얻고 나름 단련도 했지만, 고질적인 체력부족은 물론이고 빈혈도 여전했다. 잠깐 숨 좀 막혔다고 몸을 못 가누다니.
“한열아, 괜찮니?”
시선을 비스듬히 올리니, 이현지 선생님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나 무표정했지만, 나는 그 얼굴에서 여러 가지 색깔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날 진짜로 염려해주는구나. 그 별 것 없는 표정에 난 어쩐지 안도되었다.
“···아, 네. 괜찮아요.”
“진짜 이 사람들이···.”
그때 또 힘이 풀려서 오금이 푹 꺾였다.
선생님이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쑥 넣어 부축했다. 반쯤 안기다시피하는 애매한 자세가 됐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현지 쌤은 애매한 걸 싫어하시는 분이었다.
“미안, 잠깐 실례 좀 할게.”
그대로 날 번쩍 들어버린 것이다.
속칭 공주님 안기.
그리고 턱턱 걸어서 교문을 지나치는 게 아닌가. 내가 남자치고는 가벼운 편이지만, 그래도 이 얇은 팔로 운반되고 있다는 사실이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이건 무슨 신개념 수치플레이냐.
“···선생님.”
“응?”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괜찮아. 안 무거워. 아무 문제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문제라면 뭔가 더 근본적인, 이를 테면 남자로서의 체면이 현재진행형으로 박살나고 있다는 그런 부분에서···.”
“환자는 할 말 없어. 좀 참으렴.”
“···예···.”
포지션이 반대였다면 참 바람직했을 텐데.
빈혈 치료해주는 재능 같은 건 어디 없나, 그런 건 애당초 재능이 아니던가, 세상은 어째서 아직도 멸망하지 않은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얌전히 양호실까지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전국의 기자들에게 촬영되어 영원영겁 박제되었고.
훗날 '오징어를 나르는 성녀' '수산시장의 기적' 따위로 기억되는 짤이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찰칵.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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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학생회와의 상의 끝에, 약식으로나마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난 합법적으로 오전 수업을 빼먹고, 양호실에서 체력과 멘탈을 풀로 회복한 뒤에 교무회의실로 향했다.
기자들이 룸 한쪽을 가득 메웠고,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저편의 교무실에서는 교사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훔쳐봤다.
난 한 명씩 느긋하게 질문을 받았다.
“서울일보 김지혜 기자입니다. 제음일기가 출토된 땅이 이완용의 옛 사유지라는 소문이 있는데요.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중간에 몇 번 거쳐 간 주인이 있긴 했지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경위로 땅을 매입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밝히고 싶지 않네요. 다음 분. 예, 거기 짧은 머리 여성분 말씀하세요.”
“MMC의 서령 기자입니다. 제음일기의 가치가 수천억으로 추산된다는 어느 전문가의 발언이 있었는데요. 첫 발견자로서 욕심이 들지 않으셨나요?”
“···음. 법적인 문제는 논외로 둔 질문이신 거죠?”
“예.”
“아예 욕심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글쎄요. 세상에는 값이 붙지 않았을 때 더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전 ‘제음일기’의 가치가 드높기를 바랍니다. 그랬기에 함부로 값을 매겨 그 가치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우문현답이네요. 대답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질문이 오갔다.
일이 일이다보니 날카로운 질문은 없었고 분위기는 내내 부드러웠다.
그리고.
“악명 높은 몰카 범죄단을 검거하는데 이한열 군의 조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사실인가요.”
절로 한숨이 나왔다.
힘에 겨워 뱉어낸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흘린 것에 가까웠다.
난 그 기자의 질문을 들은 순간 이 상황의 전말을 얼추 짐작해냈다. 그도 그럴 게, 저 말을 듣고 놀라는 기자가 한 명도 없지 않은가.
“···결정적이라는 말에 해석의 여지는 있겠지만, 어쨌든 도움을 준 건 맞습니다.”
“혹시 어떤 조력이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을지.”
“다른 사건을 조사하다, 몰카 설치범의 꼬리를 우연히 잡아서 그 뒤를 추적했습니다. 경찰과의 협력 하에 검거에도 참여했구요. 대원학교 언론부에 더 자세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쪽을 참고하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우연히라···. 놀랍네요. 제음일기도 우연히 발견했고, 범인도 우연한 계기로 잡으셨군요. 혹시 이런 일에 요령이라도 있습니까?”
“글쎄요 요령 같은 건 없습니다만···.”
기자들 사이에서 잘은 웃음이 너울거렸다.
너울이 칠 때마다 그림자가 출렁였다. 난 춤추는 그림자 사이에서 이쪽을 차분히 지켜보는 눈을 감지했다.
몰랐다면 끝까지 몰랐을 가벼운 시선.
그러나 시선은 또한 한없이 검기도 하여, 일단 인식하자 강한 흡입력으로 내 주의를 잡아끌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냥 제가 좀 영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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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 좀 심하신 거 아닌가요.”
기자회견이 끝나고, 학생회실에서 나는 학생회장 윤정희와 독대했다. 그녀는 홍차를 따라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래? 난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무거우면 받는 쪽이 부담스럽다고요. 민폐예요 민폐.”
“후후. 난 네가 이런 걸 바라는 줄 알았지. 잘못 짚었다면 미안해.”
“···거참. 그렇게 말하시면 뭐라기도 뭐하잖아요. 쳇.”
그녀의 소리 없는 웃음에 눈가가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 곡선에 맞게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이지러진다.
여전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우물 같은 눈.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녀의 눈보다는 읽어내기 쉬웠다.
‘이런 걸 바라는 줄 알았다고?’
난 헛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윤정희가 언론에 ‘제음일기 기증자가 몰카범을 잡은 의인과 동일인’이라는 떡밥을 흘린 이유.
난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혹시 절 키우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제 브랜드 가치를 높이신 거군요. 언론에 일부러 미담을 흘려가면서. 요새 제음일기가 화제니까 불붙이기도 쉬웠을 것이고.”
“넌 고아니까. 네 흠결을 지우려면 이 정도 화제는 있어야 맞지.”
“학생회 집행부는 세 명이 상한일 텐데요.”
“굳이 집행부가 아니어도 돼. 학생회 도와주는 애들이 집행부뿐인 줄 아니? 생각보다 순진하네. 회칙 같은 걸 신경 쓰고.”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제안이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지금으로썬 그 제안을 받을 수 없겠네요.”
“···음.”
그녀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만들어낸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우리 솔직해 지도록 하죠. 회장님, 사실 저 전혀 신용하지 않잖아요?”
“후후. 날 너무 못 믿는 거 아냐? 서운하네, 나 그런 캐릭터 아닌데.”
“그만 하시죠. 저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합니다.”
그동안 나는 전상진을 구하고, 괴담을 파헤치고, 몰카범을 잡고, 문화재까지 발굴해내는 기이한 일을 연달아 벌였다.
순진한 사람들이야 신기한 일이 벌어졌구나 싶겠지만, 윤정희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지.
그녀는 내 뒤에 누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을 거다.
조사도 해봤겠지.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내겐 정말로 뒷배 따윈 없으니까.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하나 더 덧붙이는 편입니다.”
“이를 테면?”
“의심스러운 놈은 더더욱 가까이.”
“공교롭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래서 날 끌어들인다.
옆에 차근히 두고 뿌리까지 파헤쳐 발라먹기 위해서.
언론에 제보한 진짜 이유?
그거야 간단하다.
언론으로 두드리다보면 무슨 부스러기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해서였겠지. 지금까진 날 판단할 근거가 너무 없었으니까.
뭔가 나오면 좋고, 안 나와도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어필을 할 수 있다. 정략적으로 훌륭한 선택지다. 안 할 이유가 없으니 그렇게 했겠지.
“저는 그렇게 불신으로 시작하는 관계는 원치 않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 사이엔 신뢰가 쌓일 일이 없는데?”
“이제부터 생길 겁니다.”
난 품에서 USB하나를 꺼내 탁자에 턱 내려놓았다.
윤정희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느긋하게 이동한다.
“그건?”
“몰카범들의 아지트를 급습했을 때, 놈들이 우선적으로 파기하려던 자료입니다. 그중 하나를 집어왔죠. 하지만 막 집어온 건 아닙니다.”
“······.”
USB를 뒤집으니, 유성펜으로 쓰인 'DW'라는 글자가 드러난다.
DW.
대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건 대원고교에서 찍은 몰카 사진 따위가 아니었다. 거기엔 몇 개의 녹취 음성이 저장돼 있었다.
“놈들은 찍은 걸 포르노 사이트에 팔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는 단가가 나오지 않았던 걸까요. 녀석들은 더 비싼 프리미엄 시장을 찾아 나섭니다.”
“불특정 다수를 찍기 보단,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몰카를 설치하는 거지.”
“잘 아시는군요.”
그녀의 새하얀 미소가 내 망막에 박였다.
아니, 거기에 어떤 색깔도 끼어들 수 없다는 점에서는, 새까만 미소라 해야 맞을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의뢰하신 본인이라 그런지.”
그랬다. 녹취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윤정희 본인의 것이었다.
< 8. 아이들 - 10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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