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39화 (39/164)

< 8. 아이들 - 11 >

“······.”

그녀는 정갈한 몸짓으로 찻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따랐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찻잔으로 다이빙하는 홍차들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느긋해보였다. 그녀가 만지고 건드리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태도에 감화된 듯했다. 그 모습은 시간이 흐르는 영상이라기 보단 차라리 정물화였다.

그 자체로 박제된 한 조의 완성품.

그래서 바깥이 아무리 잡다하든 완고하게 우아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난 그 모습이 한없이 섬뜩했다.

고작 열여덟.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생애를 욱여넣어야 저런 두터운 성벽이 완성되는 것인가. 저것이 쌓는다 해서 쌓여지는 것인가.

나름 만만치 않은 전생을 보냈다 자부하는 나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짧은 침묵을 흘려보내고 입을 열었다.

“내 변명이 듣고 싶니?”

“글쎄요. 제가 알아야 하나요?”

“후후···.”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던 걸까. 그녀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안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모릅니다. 듣자마자 바로 꺼버렸죠. 따로 복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애당초 복사가 불가능하게 처리된 거 같지만요.”

“어째서 그랬어? 꽤 재밌는 내용이었을 텐데. 모험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었니?”

“농담도. 제 좌우명이 무사안일주의에 안전제일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애당초 멀리하자는 주의라.”

“지금까지 한 일은 감당할 만했고?”

“아직까지는요.”

난 USB를 쓱 밀어서 그녀 앞까지 배달했다.

“드리겠습니다.”

“선물이야?”

“네. 뇌물이기도 하고요.”

“···흐음···.”

그녀는 USB를 들더니, 아주 미려한 손길로 그것을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했다.

뚜껑이 따이고, 몸체가 분리되고, 안의 전선을 똑똑 따고는, 핵심 저장장치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뜨거운 찻잔 안에 퐁당 빠뜨렸다.

저게 도구 하나 없이 되는 일인가?

칼 없이 도축하는 장면을 보는 듯해서 기분이 어딘가 아스트랄했다. 내 시선을 이해했는지 그녀가 부연했다.

“음음, 내 취미거든. 스트레스 받을 때 뭐든 하나씩 해체시키면 기분이 상쾌해지지. 복잡한 게 단순해지는 기분이랄까. 벗기고 보면 본질은 다 단순한 법이거든. 물론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응 뭐랄까, 할 때마다 진실을 복습하는 느낌? 그런 거지. 알겠어?”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신선한 반응이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무슨 철학이 어떻네 심오한 뜻이 어떻네 읊어대던데.”

“자기들도 개소리라는 걸 알고는 있을 걸요.”

“그렇지? 사실 그래서 더 그러는 것도 있어. 개소리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개 같은 년이라는 게 그럭저럭 참을 만하거든.”

“음. 솔직한 감상을 말해도 될까요?”

“그래. 그러렴.”

“무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윤정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녀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 표현이었다.

진실로 빵 터진 듯했다. 중간에 숨을 가다듬다, 다시 웃음이 터져서 가다듬었던 숨을 고스란히 분실해버리고, 또 진정하길 몇 번 반복했다. 그녀가 찔끔 흘린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 오랜만에 신나게 웃었다. 재밌었어.”

다행이었다.

정확히 뭐가 다행이냐면, 대체 뭐가 재밌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 그랬다.

이 어리둥절함이 내 상식인으로서의 포지션을 굳건히 하는 듯해서 난 계속 어리둥절하기로 했다.

“잘 모르겠지만, 재밌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난 네가 참 좋아. 이한열.”

“···깜짝이야.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시죠.”

“후후. ‘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 날 어렸을 때부터 봤던 상진이도 마찬가지야. 근데 너는 첫 만남부터 날 알아봤지. 나도 너를 알아봤고.”

“운명 같다고 말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설마. 난 운명 따윈 믿지 않는 걸. 너는··· 뭐랄까, 진창에 한바탕 구른 다음에는, 좀 더 젖어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잖아? 네가 딱 그래. 뭔가 편해. 숨기지 않아도 돼서일까.”

“음, 감사합니다? 감사해야 될 게 맞나? 잘 모르겠네요.”

“글쎄? 감사는 내 쪽에서 해야 될 일인 걸.”

그녀가 눈물을 훔친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다시 품안에 넣었다.

손수건은 눈물과 함께 그녀의 감정 역시 거둔 듯했다. 그녀가 예의 읽기 힘든 미소로 돌아와 내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대원은 보통 학교가 아니야. 정치가, 법조인, 재벌 집안의 아이들이 무수히 모여드는 곳. 그런 애들이 모여서 뭘 하겠어?”

“부모들이 하던 걸 그대로 하겠죠.”

“맞아. 이 학교 곳곳마다 복마전이 펼쳐져 있어. 그건 일종의 대리전이기도 해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 때도 있고. 여긴 그런 곳이야.”

“······.”

“난 그런 곳을 통제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통제에는 강제력이 필요하지. 그 몰카들은 내가 쥐고 있던 총탄 중 하나였어. 어쩌다 폭탄이 되어버렸지만.”

“놈들이 통제가 안 되기 시작한 겁니까?”

“그래. 돈독이 올라서 내가 허락하지 않은 곳까지 손을 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굳이 나랑 통화를 하겠다는 거야. 그게 네가 가져온 녹취 음성.”

“그놈들도 무기를 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겠죠. 내가 터뜨리면 너희도 다 죽는다, 그런 식으로.”

“그래서 안 그래도 조만간 치워버릴 생각이었어. 그 전에 네가 수고를 덜어주었지만.”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그들이 녹취를 땄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섬뜩한 단상이 내 등골을 치달았다. 난 자연스레 어떤 가설을 떠올렸다.

“하나 물어 봐도 됩니까?”

“뭔데?”

“혹시 놈들을 잡아들일 계획을 다 짜두신 겁니까?”

“맞아. 멀지 않은 때 적당한 학생 한 명 골라서 영웅으로 만들 생각이었지. 이왕이면 순진한 애로.”

그랬군.

전생에서 배윤하의 활약은 결국 윤정희의 물밑 작업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본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발탁될 수 있던 거겠지만.

그러나 배윤하가 잡은 건 실행범 한 명.

나머지의 행방은 전혀 밝혀진 바 없었다. 그럼 전생에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난 마른 침을 삼켰다.

‘···큰일 날 뻔 했군.’

괜히 약점 잡는답시고 USB의 존재를 은닉했다면, 바로 발각됐을 거다.

왜냐면 그녀는 이미 녹취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 정도라면 경찰에도 나름 정보망이 있을 테니, 내가 가져갔으리란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을 테지.

내가 자진헌납하지 않았다면···.

‘저 여자가 내 적이 됐겠지.’

그건 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그다지 바람직한 전개가 아니다.

“···네 말대로 신뢰가 조금은 생겼네. 보답을 해야겠지. 내게 바라는 거라도 있니?”

“예. 하나 있습니다.”

“말해봐.”

“회장님 집안이 무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맞아. 작은 회사 하나를 하고 있지.”

“작다고 할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지금 회사 차원에서 중국측 파트너를 구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

윤정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묘하게 웃었다.

“정말 이상하네. 분명 너 자체는 평범한데, 알기 힘든 정보들에 이상할 정도로 밝단 말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름 그 쪽에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주시죠. 대답하기 곤란하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딱히 기밀인 것도 아니고. 네 말이 맞아.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간택을 받고 싶어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중이지.”

“젠린鎮麟 그룹, 맞죠?”

“그래.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설명은 필요 없겠네.”

젠린 그룹은 상하이에 뿌리를 두고 중국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기업이다.

한국에는 미디어 쪽으로 진출해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제게 소개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의외의 부탁인데.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졸업하고 중국 쪽으로 진출할 생각이라서요. 사업을 하든 회사원이 되든, 젠린의 사람과 연이 있다면 엄청난 메리트가 되겠다 싶어서요.”

“그런 이유라면 납득은 되는데. 글쎄···.”

윤정희가 드물게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로 보이는 진짜 표정이었다.

물론 학생에게 왜 회사일을 묻느냐는 의미의 곤란함은 아니다. 이 학교에 등교하는 재벌가 아이들 중 대부분은 교과서보다 경영수업을 많이 받는다.

“젠린 그룹은 우리도 올려다봐야 되는 곳이야. 우리가 을이라 이거지. 내가 해주고 싶어도, 함부로 소개하고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닌 걸.”

“그거라면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제 생각대로 된다면, 회장님한테도 괜찮은 기회가 될 걸요.”

“···응?”

난 준비해두었던 시나리오를 읊어주었다.

처음엔 심드렁하던 표정이 얘기가 끝날 즈음엔 흥미로움으로 변해 있었다.

“그건 괜찮은 생각인데? 그 정도면 오히려 우리가 부탁해야 될 정도야.”

“그럼?”

“좋아. 우리 쪽에서 자리를 만들어볼게.”

“감사합니다.”

일이 제대로 풀렸다. 난 내색하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우린 그 뒤로 한참동안 계획의 세부사항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일어나 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렴. 유익한 시간이었어.”

“저도요.”

숨이 좀 막혀서 빈혈이 살짝 오셨다 안부만 묻고 가시긴 했지만, 어쨌든 내용은 알찬 시간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득 드는 생각.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물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근데 이윤지라는 학생 말이죠.”

“······?”

“걔가 전학 간 것도 회장님이 의도하신 겁니까?”

이윤지 양은 몰카 사건으로 전학까지 가게 된 피해자다.

윤정희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설마. 그건 걔들이 통제 불능이 됐다는 징후 중의 하나였어. 놈들을 치울 결심을 굳힌 사건이기도 하지.”

“그런가요?”

“그래.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게 진실이겠지.”

즉답이었을 뿐 확답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녹취 음성을 듣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기는 했다. 하지만 듣나 안 듣나 큰 차이는 없었다. 그 안에 알맹이 따윈 없었으니까.

윤정희는 자신의 신상과 목적을 교묘하게 에둘러 말했고, 목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윤지가 그녀에게 밉보여서 치워진 것이든, 아님 정말 불행하게 희생된 피해자이든, 이제 와서 어쩔 문제는 아니라는 것도 사실.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모호한 말만 남긴 채 진실도 영원히 닫혔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어느 날 고양이가 죽었다.

로드 킬이었다.

우린 그날만큼은 이름을 두고 싸우지 않았다. 볼품없는 묘비에는 ‘베오울프 크리스티나 아이작 3세’라는 풀네임이 빼곡하게 적혔다.

그래서 그것이 화합의 징후였는가.

아니다.

전혀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저 우스꽝스러운 이름과 같았다. 결국 하나로 섞이지 못했다. 꿰매어진 넝마처럼 어설프게 결합되어 있었을 뿐. 서로를 묶어주던 존재가 사라지자 우리는 제각기 쓰러져서 저마다 불구가 되었다.

왜?

이유가 뭘까.

물론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내가 꼽는 가장 큰 이유는 이거다.

내가 무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무능한 주제에 무능하지 않은 척했다.

난 그걸 10살의 여름 즈음에 깨달았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배윤하와 어떤 여자아이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사실은 그 여자아이 쪽에서 일방적으로 시비를 턴 거지만.

배윤하에겐 늘 있는 일이었다.

예쁜데 어두침침하고 사회성이 나쁘다, 그건 공격하기 딱 좋게 빨간 점까지 찍어둔 과녁판 같은 것이었다. 배윤하를 못살게 구는 게 계집애들 사이에선 나름 유행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내 소명은 그런 배윤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악마들의 손에서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가 된다. 그런 자기애가 그 당시 나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당연히 그날도 나는 당당히 나섰다.

계집애를 무찌르고 배윤하를 지켜냈다.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게 있었다면, 그 여자아이에게는 불러낼 오빠들이 많이, 대단히 많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난 그날 녹진하게 구워진 떡이 되었다.

여자아이는 배윤하를 붙잡고는 그 모든 과정을 관람하도록 강제했다.

내가 꼴사납게 구르고, 울고, 잘못했다고 빌 때마다, 배윤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환상은 깨졌다.

나는 기사가 아니었고,

소녀는 자신을 지켜줄 방패 따위는 없음을, 돌을 쌓아 스스로 높은 벽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배윤하는 그날부터 달라졌다.

속을 철저히 감추고 겉으로 보이는 사교성을 단련했다. 악착같이 친구를 사귀었다.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강박적으로 인맥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아마도, 필요하지 않은 쪽으로 구분되었던 듯싶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날 피해 다녔다.

“···너 요새 왜 나만 보면 도망 치냐?”

“······.”

“왜. 이제 나 같은 건 필요도 없다 이거야?”

“···난 변할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도 흔들렸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를 단단하게 이어가며 말했다.

“이제 우리··· 어린애가 아니잖아. 어린애여서는 안 되잖아.”

“······.”

“그러니까···.”

난 그녀의 말을 끊고 고함을 질러댔다. 뭐라고 했는지는 불분명했다. 내 안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정작 무엇을 뱉어냈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의 [암기력]으로 되짚어도 그때의 기억은 뜨거운 증기처럼 뿌옇기만 하다.

다만

새파랗게 질린 배윤하의 표정과

내 말에 스스로 충격 받은 나 자신

심장을 죄던 자기혐오와 그 혐오를 연료로 써가며 불타오르던 내 어린 시절의

꿈들.

그런 것들이 단편적으로만 떠올랐다.

이제 우리는 친구가 아니구나, 친구일 수 없겠구나, 단지 그 생각만이 고장 난 테이프처럼 계속해서 감기고 재생되며 내 안에 분명히 남았다.

나는 무능했다.

그리고 무능한 자는 친구도 제대로 사귈 수 없다는 걸 10살의 여름, 그 뜨겁던 날에 깨달았다.

---

“한열이 형! 저 사람들 네이밍 센스 완전 구려! 형이 좀 지어봐!!”

보육원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중앙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뭔가 했더니, 그들 가운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보는 부처님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대원산에서 구조해낸 그 고양이였다. 이제 와서 주인을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려보내기도 뭐하여 보육원에서 키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왜? 또 뭔 얘기들이 나왔길래.”

“윤하 누나는 엘리자베스. 종철이 형은 아이작 4세래. 우리 최연장자들 수준이 이래도 돼? 내가 막 자괴감이 들고 그런다고.”

“음. 내가 방금 완벽한 이름을 떠올렸어.”

“뭔데? 말해봐. 뭐든지 저 노답들보단 낫겠지.”

“지크프리트 어떠냐. 용맹한 기상이 막···.”

“노답이 또 등장했다! 노답은 삼 형제로 세트가 맞춰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가!”

뭐래.

내 완벽한 센스를 못 알아보는 네 안목 쪽을 의심해 보아라.

코웃음을 치는데, 떠들고 있던 배윤하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엘리자베스.”

“미쳤냐.”

“하. 이 사람들이 죄다 센스가 고장 났구나. 정상은 나밖에 없는 건가···.”

“오늘 지랄이 풍년이네.”

짜게 식은 표정으로 흘겨보는데, 배윤하가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연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야, 그나저나 축하한다.”

“뭐가.”

“이것저것. 너 요새 완전 유명인 됐잖아. 부럽다 야. 학생회장님이랑도 막 독대하고 그런다며?”

“내가 너냐. 유명해졌다고 좋아하게.”

“좋으면서 괜히 빼기는.”

그녀가 픽 웃으며 내게 카메라를 떠맡기듯이 넘겼다.

“거기 멀뚱히 서있지만 말고 사진이나 찍어봐. 우리 엘리자베스의 우아한 자태를 기록으로 남겨야지.”

“······.”

그러더니 다시 장난감 낚싯대를 들고 고양이에게 돌격하는 것이었다. 무시당하면서도 꾸준히 대시하는 게 그녀다웠다.

난 그 장면을 렌즈에 담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옛날의 감정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때는 필요 없게 됐으니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피해의식과 배신감이 뒤섞인 감정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배윤하로선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시궁창이라 그저 필사적으로 자기 앞가림을 한 건데, 그걸 비난할 수 있겠나···.

그러니까 너도 날 비난하지 못할 거다.

‘이제 두 달 정도 남았나.’

대개 입양은 어린 나이대의 아이를 대상으로 한다. 미취학이 최상이다. 늦어도 초등학생 정도가 입양되는 나이대의 상한이다.

그런데 가끔 나이가 찬 고아가 입양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주현보육원에서는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다.

내 위로도 두세 명 있었고, 내 또래도 그런 사례가 하나 나왔었으니까.

그것도 중국 굴지의 기업 젠린의 직계, 정확히는 부회장의 자식으로. 입양 한 번에 재벌가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역전.

전생에 그 행운을 잡아챈 사람은 배윤하였다.

윤정희 부친의 기업인 선기무역은 내가 없었어도 젠린 그룹과의 파트너 관계를 수립해낸다. 그 후 윤정희의 소개로 배윤하가 발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미래는 바뀌었다.

현재 입양 후보에 가까운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이번에 재벌가에 편입되는 건 내가 될 거다.

‘전생의 배윤하, 너는 대체 어디서 뭘 했는가.’

보육원이 박살나고, 우리 모두가 그 지옥에 처박혀서 죽지 못해 살아갈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우릴 한 번 생각이라도 했나.

그랬다면 우릴 왜 방치했는가. 재벌가의 힘이라면 우릴 구원해주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우린 그저 너에게 뒤에 두고픈 추한 과거일 뿐이었는가.

그러나 용서해주마.

오지 않을 미래를 두고 떠드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까.

어차피 이번 생에 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건 나다.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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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포토그래퍼의 사진술] : 부디 윤하를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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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술을 얻은 뒤 줄곧 이런 퀘스트가 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클리어 되지 않고 있었다.

‘이해’에 대한 관점이 나와 다른 모양이지.

아님 내 안의 어딘가 깊은 곳에 꿍한 마음이 남아 있던지.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삶이 내 것인 적이 없었는데 마음이라고 내 것이겠는가.

나는 카메라를 추어들었다.

셔터는 가볍고 또 가벼웠다.

찰칵.

< 8. 아이들 - 11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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