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금빛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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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며칠 전 경시대회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이건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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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보상으로 황색 카르마를 300p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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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색깔이 그렇다 뿐이지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하면 ‘금빛’에 가까운 이것. 그래서 상태창 내의 [황색 카르마]라는 글씨는 상태창의 빛깔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뭐랄까, 굳이 말하면 노란색과 노오오란색의 차이?
어쨌든.
청적자색 카르마들에 비하면 황색은 처음부터 이질적이었다. 시스템 상으로도 뭔가 동떨어진 것 같고, 습득 방법도 도무지 짐작가지 않는다.
-위이이이잉!
지금껏 카르마는 해당 탤런트의 퀘스트를 수행해서 얻었다.
그것이 황색에도 적용된다면, 아직은 얻지 못한 '황색 탤런트'가 어딘가 존재할 것이고, 그 퀘스트로 황색 카르마를 얻을 수 있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그런 흐름의 사고가 자연스럽다.
그런데 갑자기 황색 카르마가 생겼다.
얻었는데, 왜 얻었는지는 모른다.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돈벼락이 정수리를 폭격한 셈이다.
-위잉! 위이이잉!!
근데 이 돈이 어디서 날라 왔는지 앞뒤는 알아야 할 거 아닌가.
그래야 이게 전적으로 우연인지, 아님 돈벼락이 떨어지는 어떤 포인트가 있어서 앞으로도 불로소득의 꿈을 꿀 수 있을지가 가늠된다.
난 고민했다.
-위잉! 우우웅···.
그리고 몇 가지 가설을···
음?
근데 중간에 저 잡소리들은 대체 뭐냐고?
핸드그라인더를 작동해 마찰을 시킬 때 나는 소리다. 왜 그런 소리가 나느냐면, 저걸로 콘크리트를 깎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일전에 [엄복동의 대퇴부]를 얻었던 조직의 비밀창고에 와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그리고 끙끙대며 ‘쥐구멍’을 넓히고 있었다. 사실 그간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확장작업에 임했음을 말해야겠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도.
드나드는 게 발각되면 안 되므로, 관리자(원장 선생님)의 순회 시간을 파악해 침투 계획을 짜두는 건 기본이었다.
더 큰 문제는 파쇄 작업.
처음에는 드릴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드릴은 생각보다 고난이도의 장비이며, 거의 온몸을 써야 했기에 [손재주]만으로 커버하기 힘들었다. 잘못 박아댔다가 애먼 데 구멍을 뚫어버리면 낭패요, 구멍을 너무 크게 뚫어도 문제다.
그들이 이곳에 돌연변이 거대 생쥐가 생겼다고 믿어줄까? 아님 모종의 침입자를 의심할까? 거대 생쥐라 생각해도 문제다. 그들은 세스코를 부르기보단 아예 창고를 옮기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 곤란하지.
그래서 박스 한두 개로 가려지며, 설사 들춰보더라도 의심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작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동 그라인더. 부수기보다 깎아내기로 한 것이다.
지루한 반복 작업이었지만, 15년동안 군만두만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벽을 깎아낸 누군가를 내 몸에 빙의시켜가며 꿋꿋이 갈아냈다.
그리고 지금.
“···대충 된 거 같은데?”
난 그라인더를 내려놓고, 납작한 포복 자세로 구멍에 몸을 끼워 넣었다.
살짝 빡빡하지만, 난 내 멸치라인 몸매를 믿었다.
힘내라 내 빈약함. 태풍에 간단히도 밀려나서 끄떡없던 옆에 여자애를 민망하게 만든 그 저력을 발휘하란 말이야!
됐다.
뭔지 모를 장애물에 상체가 걸렸지만 [유연성]의 재능에 힘입어 돌파, 그러다 골반 즈음에서 잠깐 위기를 맞이했지만 몸을 슬슬 틀며 진입하니 성공했다. 몸을 털고 일어나 벽을 더듬었다.
달칵, 하고 백열등이 켜졌다.
“음.”
고풍스런 옛 서책과 회화들이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나무로 된 박스가 팔레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
내게 [대퇴부]를 준 엄복동의 자전거는 그새 팔렸는지 어쩐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눈에 띄는 카르마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난 팔레트 위의 박스를 하나하나 내려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라?”
팔레트 가장 안쪽 구석.
볼품없이 방치된 박스 안에서 뭔가 기묘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건··· 탤런트를 앞에 둔 느낌과도 다르고, 뭔가 묘한데. 탤런트가 진공청소기로 흡입하는 이미지라면, 저건 고혹적인 자태로 시선을 잡아끄는 듯했다. 은은하고 도도하다.
난 나머지들은 옆에 조심히 치워두고, 느낌이 오는 박스만 들어서 팔레트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따보니.
“금빛?!”
그렇다.
낡고 부러지고 이가 나간 철검 한 자루.
세월에 문드러져서 자세히 봐야만 본디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는 쇳덩이에서, 노랗게 탈색시킨 안개처럼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걸 본 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회귀한 직후 황금빛 기타에서. 그리고 그걸 만지고 난 다음에 나는-
‘[미다스의 손]을 얻었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손을 뻗었다. 이윽고 떠오르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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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서초패왕 항우의 역발산기개세](Rank B)를 습득했습니다.
-내가 패배한 것은 하늘이 나를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내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신체 능력이 3배 증가한다.
-모든 역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해당 특성의 흡수에는 ‘황색 카르마 2,000p'가 요구됩니다.
===
===
!!카르마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습득에 실패했습니다!!
===
응!?
으응?!
여러 가지 의미의 경악들이 한꺼번에 목구멍에 달려들어서 병목현상을 일으킨 바람에 난 한참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일단 이것부터 내보내자.
“이런 미친···! 이런 게 왜 한국의 산골짜기 창고에 처박혀 있는 건데!”
보나마나 항우가 쓰던 칼이겠지.
그럼 중국 국보로 지정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발견됐다는 수준, 아니 그 이상 아닌가?
생각해보니 박스 위치도 묘하게 푸대접인 것이, 아무도 이게 항우의 것이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증명할 방법은 없으므로 진실은 영원히 묻히겠지.
그럼 이쯤에서 두 번째 경악을 내보내자.
“이런 젠장···! 랭크 B?! 황색 카르마가 이천이나 필요하다고?!”
현재 내 황색 카르마 보유량은 750.
50을 사용했고, 이후 300을 추가로 얻은 수치다. 아무튼 이천까지는 까마득했다.
여기서 탤런트와 특성의 차이점도 확인 가능했다.
전자는 후불이고 후자는 선불. 동조율이 있는 대신 카르마가 있든 없든 일단 흡수는 가능했던 탤런트와 달리, ‘특성’은 동조율이 없지만 돈 없으면 그냥 입구컷이다.
여하튼.
‘···[미다스의 손] 때도 느꼈지만 특성은 거의 초능력 같은 거네.’
물건에 서린 카르마를 보고 흡수하는 능력이든, 몸이 3배 강해지는 능력이든 여하튼 재능의 영역은 아니다.
[대퇴부]나 [발목] 같은 적색 탤런트들은 움직이는 방식, 효율 등이 좋아지는 거지 본질적인 육체 능력이 증대되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뛰었다.
이거만 잘 흡수해낸다면 내 고질적인 체력 부족도, 평생 안고 살던 빈혈도 도매급으로 해결된다는 거 아닌가. 게다가 말년에 췌장암까지 걸려본 나로선 이만큼 반가운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카르마 2,000. 역시나 만만치 않은 수치다.
애당초 황색은 어떻게 얻는지도 아직 불명인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까지 이게 여기 있을지 미지수다. 최대한 빨리 얻어내야 해.’
순간 이대로 훔쳐서 나갈까도 생각해봤지만, 너무 위험했다.
이런 데 보관하는 걸 보면 의외로 허당들 아닌가 싶지만, 혹시나 발각될 경우의 리스크를 생각해보면 역시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난 얌전히 박스를 원위치하고, 팔레트 위도 정리한 뒤에 쥐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하산하면서 나는 배윤하에게 톡을 날렸다.
-나 : 자냐.
5분 동안 1이 없어지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오전 1시.
그러나 청소년이란 밤에 활발해지기로는 늑대인간 뺨치는 종자들 아닌가. 난 당연히 깨어있을 거라 믿으며 톡을 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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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자냐
-나 : 자냐자냐
-나 : 자느뇨
-나 : 자니나니뇨
-나 : 자니나니엘니뇨라니냐.
-배윤하 : 이 미친자가. 지금이 몇 신데 이 지랄이십니까.
-나 : 안 자네. 좀 나와라. 카메라 들고.
-배윤하 : 이런 미친?
-배윤하 : 니가 나오라면 내가 나가야 됨?
-나 : 오만원 줄게.
-배윤하 : 어디로 가면 될까요.
===
난 5분 뒤에 숙소 앞에서 만나자고 톡을 보낸 뒤에 폰을 닫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이 메시지에 해답이 있을 거다.’
업적. 뭐에 대한 업적인가.
임계치 도달. 대체 어떤 임계이며 어디에 도달했다는 건가.
당시 나는 대단히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고난이도의 문제에 도전해서 풀어본 게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정도는 대학 교수 수준이면 대개 무난하게 풀 거다. 그러므로 ‘공적’을 성취했다는 의미에서의 업적은 아니다.
그렇다면?
비슷한 말을 연거푸 떠올려본다.
실적. 공로. 공. 성적. 발자취. 금자탑. 실적···.
발자취.
‘난 그 문제를 풂으로써, 최석현이 도달했던 어떤 영역에 다다른 게 아닌가.’
비유하자면,
그래,
레벨업.
경험과 지식이 꾸준히 누적되다 내 안에서 화학적 폭발이 일어난 듯한, 한 단계 진일보한 느낌.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것? 비유하자면 경험치가 다 찼다는 거겠지. 그 수학문제는 제법 강력한 보스였으니 처치하고 받은 경험치가 빵빵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발자취라 한다면, 말 그대로 그들의 족적足跡을 뒤따라야 한다.’
사실 경험치로 따지자면 [손재주]가 제일이다. 가장 많이 애용했으니까.
그러나 내 가설에 따르면 요대술과 소매치기 기술 따위는 무용. 오로지 타짜 기술을 익혀서 경지에 올라야만 [손재주]의 ‘업적 임계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언제 카르마를 다 모으나.
수학은 한 달 넘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해서 도달했다. 타짜 기술로는 몇 달이 걸릴까. 관심도 없던 시를 써서는? 이 저질 체력으로 파쿠르 달인이 될 수 있을까?
했다손 쳐도, 그때까지 저 항우의 칼날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그러므로 지금의 내겐 꼼수가 필요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단축할 시스템의 틈이.
“아 뭐야, 이 시간에.”
배윤하가 툴툴거리며 등장했다.
아래로는 돌핀팬츠에, 위로는 앞을 꽉 잠근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카메라를 내놓으란 의미에서 빈손을 내미니, 그녀가 그 위에 또 다른 빈손을 올려두었다.
여기도 선불인가.
내친김에 따불로 주었다.
“···헉. 뭐야. 너 돈이 왜 그렇게 많아? 어디서 삥 뜯었니?”
“왜 그런 흉악한 상상부터 하는 건데.”
“그런 거 아님 니가 돈이 생길 일이 없잖아. 아님 도박?”
“네 안에서 난 대체 어떤 쓰레기인 거냐. 잔말 말고 줘봐. 그거 모델료니까 오늘 아주 빨아 먹힐 각오하시고.”
“흐흫. 뭘 얼마나 찍으시려고. 자, 여기.”
배윤하가 배시시 웃으며 카메라를 건넸다. 사진 찍히는 게 저리 좋나 싶다. 찍히는 족족 늠름한 꼴뚜기가 되어버리는 나로선 공감하기 힘들지만, 지금은 다행인 일이었다.
이제 질리도록 찍어댈 테니까.
난 꽉 차서 넘쳐흐르는 달빛을 조명으로 삼아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촬영 기술 총론 하급>을 통해 기술 수준을 높인 상태.’
그러니까 현질로 경험치를 올렸다는 거다.
추측컨대 ‘하급’에는 탤런트 원주인인 배기섭 씨의 커리어 초반부 정도의 경험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만은 충분치 않을 터.
그 당시 배기섭 씨의 실력이 한 단계 도약했던 계기라면-
‘-아이를 갖고, 딸을 찍으면서부터였다.’
그러므로 그 족적을 따라간다. 달리 말하면, 그때를 ‘재구再構’한다.
지금은 희미한 꿈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기억의 파편들을 필사적으로 더듬어가며, 나는 배윤하를 찍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물론 희미하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다. 차라리 뇌주름의 굴곡이 선명했다. 찍으면 찍을수록 외려 이미지는 흐려지고 기억은 잘게잘게 쪼개졌다.
그러나 어쩐 일일까.
밤이 깊고 어둠도 덩달아 깊어서 그 위를 덮는 달빛은 요사스러웠다. 정경이 그리웠다. 이유도 없이 엄습하는 감정이었다. 잿더미가 된 기억들이 달빛에 젖어 땅에 스며들었다. 난 축축한 땅이 풍기는 향취를 다만 맡았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이미지 따윈 잊고,
아마 그는 이런 향기를 맡았겠구나, 그것 하나만을 떠올린 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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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보상으로 황색 카르마를 100p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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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생각대로 됐다.
< 9. 금빛 - 2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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