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금빛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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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히 새벽으로 구분되는 이른 시각.
안개 덮인 인천공항에서, 나는 일생일대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과연 인간은 새벽에 활동해도 좋은가.'
사실은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 당시 새벽에는 자빠져 자라고 구조적으로 설계한 건 아닐까.
강력한 증거가 있다.
내가 지금 엄청 졸립다.
수면 호르몬이 뇌수에 흥건했다. 오늘의 뇌하수체는 의욕이 좀 지나쳤다.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도 모자라 두뇌를 녹여버릴 기세였다. 뭐냐 이 쿠데타스러운 졸림은. 그냥 새벽에 깨있을 뿐인데 왜 온몸이 비협조적으로 구느냔 말이다.
그런가.
그런 건가.
나는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다.
새벽형 인간이라 함은 M성향의 변태를 달리 표현하는 것이었다. 버티지 말아야 할 것을 버텨가며 쾌락을 느끼는 종자들이었다. 신의 의도와 반대된다는 점에서 신성 모독적이기까지 하다. 뱀파이어와 좀비들이 새벽에 활동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말을 하다보니 스스로 설득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서른네 번째쯤 되는 하품을 과감하게 발사했다. 하암.
“그러다 자겠네. 아니, 혹시 이미 잠들어 있는 중이니?”
“전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침형 인간들을 시급히 격리해야 합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하죠.”
“잠꼬대까지 하네.”
“더 나아가 새벽형 인간이라면 이미 구제불가능한 해악. 이건 병입니다. 전염되는 돌림병이죠. 이미 한국인의 대다수가 감염되어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로잡힌 상식인으로서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군요.”
“자면서 오줌도 지리는 구나. 입으로 싸재끼는 건 처음 보지만.”
“갸아악.”
윤정희는 한결 같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매도했다. 그래도 옆구리까지 꼬집을 필요는 없잖아.
억울하다.
내 사상은 아직 세상이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인가···. 난 너무 일찍 태어나버렸던가.
그러나 난 마음이 넓으므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지구는 똑바로 서지 않고 약 23.4도 기울어져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만큼 어긋나버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선각자의 눈으로 언데드가 되어버린 직장인들을 긍휼히 바라보았다.
“이만 정신 차리고. 오늘 널 돌봐줄 여유는 없어. 난 계속 임원들 옆에서 수행해야 되니까.”
“오늘 제가 딱히 해야 될 일은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괜히 튀어서 정 맞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오늘은 얼굴 도장만 찍고, 화려하게 등장하는 건 내일이야. 알지? 무슨 말인지?”
“예압.”
“그래. 음···.”
윤정희가 불쑥 다가와서 내 넥타이를 고쳐주었다.
그리고 아래위를 쓱 훑더니 짧게 품평했다.
“좋아. 이제 좀 사람 같네.”
“···원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듯이 말하시네요.”
“잘 들었네. 정확히 그 의미로 말한 거니까. 잘 들어. 네가 입고 온 그건 정장이 아니야. 하물며 옷도 아니지. 그 거적대기가 옷으로 명명된다면 세상 모든 패션업계 종사자들이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알아듣겠니?”
“···너무해···.”
“내가 혹시나 해서 준비해 와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상상도 하기 싫네. 기억해. 넌 여기 내 소개로 온 거야. 네 행동거지가 내 체면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라고.”
“알았어요. 알았어. 팔자에도 없는 엄마 잔소리를 여기서 들어보네요. 참나.”
“팔자에도 없는 애 키우는 나는 어떻겠니.”
윤정희가 내 어깨 위의 먼지를 툭툭 털어주더니, 한 걸음 쓱 물러선다.
“지금부터는 이대리랑 강사원하고 같이 다녀. 어지간한 일은 그 사람들 통해서 해결하고. 혹시 문제가 있으면 문자로 해. 되도록 답장은 빨리 해줄 테니까.”
“예 엄마.”
“또 까분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날 흘겼다가, 금세 미소를 원상복구 시키고는 저쪽의 인파로 돌아가 파묻혔다.
이제 좀 친해진 건가. 저런 얼굴도 다 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마흔다섯 번째 하품을 발사.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진짜 잠들 거 같아서 나는 중국어 회화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미 다 [암기]하긴 했지만, 복습한다는 의미에서.
“아후우. 아침부터 바쁘다 바빠. 아, 한열아. 옆에 잠깐 앉아도 될까?”
강부장, 아니 28세 강민재 신입사원이 달덩이 같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네, 그러세요.”
“고마워. 으아. 잠깐만 쉬자. 어? 중국어 회화책이네? 그걸로 공부하는 거야? 후후.”
“예.”
뭔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악의는 없어 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호의든 악의든 대면하는 것만으로 기분 나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그게 당신이었다.
-후후. 귀엽기는. 그거 쫌 공부해서 실전에서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야? 아서라. 그런 건 여행 가서 돈 계산 할 때나 써야지. 실제 업무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크으. 쓰디쓴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겠지. 아직 어리잖아. 지금이라도 단 꿈을 꾸게 둬야지. 이런 것까지 보듬어주는 게 어른의 도량이 아닐까···. 아, 나 좀 멋진 듯.
딱 보니까 요딴 생각이나 하면서 웃음을 질질 흘리는 것이었다.
상종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였다.
뚜벅이는 발자국 소리가 직선으로 이쪽을 향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근사한 목소리.
“우와앗 뭐야 이거. 너 강민재 아니야?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네 직장상사들이 널 불러줬단 말이야? 이 중요한 곳에? 와, 선기물산 좋은 직장이네. 아주 너그럽기가 하늘같아.”
“···이태현.”
강민재가 으르렁거렸다.
난 그것보다 이태현이라는 이름에 반응했다. 내 기억 속의 모습에서 주름을 지우고 볼살을 채우니 과연 눈앞의 청년이 될듯했다.
저 사람은 훗날 강부장의 라이벌이 될 남자. 그리고 강부장을 만년 콩라인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훤칠한 훈남형 용모에 업무능력에 수완에, 가장 결정적으로 이십 년 뒤에도 풍성한 머릿결까지, 강부장은 무엇하나 그를 이겨내지 못했다.
강부장은 무엇하나 그를 이겨내지 못했다.
응?
내가 두 번 말했나?
“피곤하니까 저리 가라.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여기 전세 냈냐? 내가 여기서 쉬겠다는데 뭔 상관.”
“아 쫌! 저쪽도 의자 많잖아!”
“난 여기가 편해. 네 넓은 면상에서 뭐랄까, 대평원의 고요? 숙연함? 그런 게 느껴진달까. 너만 보고 있으면 소화도 잘 되고 그렇다. 내가.”
“난 너만 보면 없던 담이 생길 지경이다!”
“안 됐네. 그래도 좀 참아. 파스도 붙여가면서. 젊은데 몸 상하면 안 되잖아. 그치?”
와.
나 이 사람 좋아질 거 같아.
그러나 오늘은 개인적인 호감을 접어두어야만 한다.
이곳에는 선기물산의 직원들만 나와 있지 않았다. 젠린과의 파트너십을 탐내는 무역회사들은 즐비했고, 이태현이 속한 신세계무역도 그중 하나였다.
쉽게 말해 오늘부터 이틀간, 젠린을 사이에 두고 신세계무역과 선기물산 간의 피 튀기는 경합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진짜 싸움이야 저 위에 임원들이 알아서 할 테지만.
그때였다.
공항 한편에서 부산스러움이 파문을 그리듯 퍼졌다. 저쪽에서 업무를 보던 이창희 대리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말했다.
“야! 거기서 왜 놀고 있어?! 빨리 텨오지 못해? 한열이, 너도 이쪽으로! 그 사람들 왔다 왔어.”
“옙!”
열을 맞춰 서 있으니, 공항 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인파가 너울을 치며 몰려왔다.
젠린의 실무진과 이사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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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정말 할 일 없네요.”
“그러네. 우린 왜 불렀는지 잘 모르겠다.”
“강민재 넌 잘 서있기나 해. 우리 오늘 업무는 어깨 노릇이야. 기 싸움에 안 지려고 동원된 거라고. 안 그러면 어디 아프리카 물소처럼 생긴 너를 불러왔겠냐.”
“이 대리님···. 그래도 애 앞인데···.”
“애 앞이면 뭐 니 얼굴이 물소에서 황소가 되냐? 잔말 말고 눈에 힘이나 딱 주고 있어.”
“···옙.”
윤정희의 말마따나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딘가로 이동하면 졸졸 따라가고, 높으신 분들이 회의를 하면 대기하고, 가끔 심부름 시키면 그거 하고, 또 어딘가로 이동하니까 따라가고, 또 대기하고, 그게 전부였다.
전생에 직장생활을 해본 나는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라는 걸 이해했다.
그러나 강민재에겐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저 새끼 또 나대네 저거. 아 진짜.”
왜냐면 이태현이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
젠린 측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담소를 나누고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에서 편의를 제공하면서 그 안에 녹아들어가 있었다.
멀뚱히 서있는 우리보단 어쨌든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
그건 이태현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신세계무역 직원들 전체의 기조이기도 했다. 확실히 준비 자체는 저쪽이 더 월등한 듯 보였다.
‘···전생에는 선기물산이 선택받았다. 아마 핵심 아이템 자체는 우리가 월등할 테지. 이번에도 큰 이변이 없다면 그렇게 될 거다. 크게 관여하지 말자.’
그렇게 시간이 훌훌 지나가, 점심을 훌쩍 뛰어넘어 오후가 되었다.
오늘 하루 업무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는지, 젠린 쪽에서 한국 관광을 좀 하고 싶다고 의사를 타진해왔다.
신세계무역과 선기물산은 흔쾌히 허락하고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우리의 업무는 바야흐로 졸졸 따라가는 것에서 열심히 따라가는 것으로 진화했다.
반면 활동 범위가 야외가 되자 이태현을 위시한 신세계무역의 직원들은 더 분주해졌다. 거의 착 달라붙어서 입안의 혀처럼 구는 것이었다.
그것이 강민재의 무언가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태현이 이쪽을 보고 ‘풋’하고 웃은 게 결정타였다.
부글부글 끓던 물이 증기로 펑 터지듯, 강민재는 이 대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비장하게 돌격을 감행했다. 누가 보면 총 들고 전쟁터 나가는 줄 알겠네.
“에, 쩌거 쓰, 메어쪼, 쫑? 뭐더라. 에···.”
그러나 척 봐도 변변치는 못했다.
이태현이 입안의 혀라면 강민재는 입술에 붙은 빵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쯧쯧.
근데 저거 뭔가 불안한데. 저러다 뭐 사고라도 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했더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강민재가 젠린 측 임원 한 명에 달라붙어 에스코트인지 집적대는 건지 모를 행위에 한참 열중하다, 실수로 흙탕물을 밟아 임원의 바지 밑단을 흥건히 적셔버린 것이다.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시장투어 중이었고, 옷이 다소 더러워지는 건 다들 감수하고 있었다. 문제는 강민재의 대처에 있었다.
“어···! 죄, 죄송··· 아니, 아니지. 쓰, 쓰미마셍!!”
쓰미마셍-
마셍-
마셍-
셍-
셍-
에코는 얄궂게도 길게 반복됐다.
시장바닥의 소음조차 쓸어버리는 강력한 사과였다.
강력함이 지나친 나머지 바다를 건너서 다른 땅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임원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고 주변 온도가 5도 정도 냉각된 듯 했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강민재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이 순간 확신했다.
오늘 나의 주적은 신세계무역이 아니라 강민재 저 새끼였다!
“···자네는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상대해야 되겠군.”
“도대체 선기물산은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겁니까? 임원님,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뒀으니 저쪽으로.”
“그러지.”
그때 이태현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임원을 수행했다.
난 멀어지는 그들과 눈총을 보내는 젠린 측 인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시발?
망했네?
딱 봐도 저 임원은 허허 웃으며 넘어갈 스타일이 아니다. 나이든 중화인답게 반일감정도 확고해보였다. 한 마디로 잘못 걸렸다.
‘전생에 이런 일이 있었을까?’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저런 병신 같은 일이 흔하게 일어날 리 없다. 이 일로 두 회사의 균형이 뒤틀리고 결과가 뒤바뀔 가능성은?
확신할 수 없다.
비즈니스도 어쨌든 사람이 하는 거니까. 감정이 아예 배제될 수 없다.
근데 전생에선 아주 아슬아슬하게 선기물산이 승리한 것이라면? 그래서 이 변수가 유의미하게 작용한다면? 나는 최악의 최악을 가정했다. 그 가정이 어쩐지 그럴듯해서 난 등골이 서늘해졌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윤정희가 뭐라든 개입해야겠어.’
난 귀를 쫑긋 세우고, 안력을 돋워 [동체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눈치]를 곤두세워 저곳의 모든 영역을 내 안에 잡아두었다.
맞물리는 시선들.
말의 뉘앙스.
오가는 감정의 흐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섬을 나는 필사적으로 염탐했다.
내 오감과 통찰을 총동원해가며, 관계의 흐름이 어떻게 휘몰아치고 어디로 흐르며 또 어느 지점에 고이는지를 낱낱이 분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 이거 혹시···.’
핸드폰을 꺼냈더니 마침 윤정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난 바로 답장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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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 뭐야? 뒤쪽 분위기 왜 그러지? 무슨 일 있었어?
-나 : 그쪽 사원 하나가 뻘짓 한 번 대차게 해버렸네요. 그건 그렇고, 젠린 측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에요? 오늘 온 사람 중에서.
-윤정희 : 본부장하고 전략기획실장. 그 둘이 가장 높고, 그 밑으로 서너 명 있고···. 그런 식이지. 왜?
-나 : 로열패밀리는 혹시 없어요?
-윤정희 : 글쎄. 온다는 얘기는 못 전해 들었는데.
-나 : 제가 한 명 발견한 거 같은데. 여자. 20세 전후. 짐작 가는 거 있어요?
-윤정희 : 그럴 리가.
-윤정희 : 아니.
-윤정희 : 설마···.
-윤정희 : 젠린 부회장 딸이 지금 열여덟 살이야. 근데 몸이 좀 안 좋아서 공식석상에 드러난 적은 없어. 나도 얼굴은 몰라. 걔가 여기 있다고? 무슨 근거로?
-나 : 그냥요. 제가 촉이 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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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야 안에 앳된 여자 한 명을 잡아두었다.
관계의 흐름을 따라가다 찾아낸 가장 높은 사람 두 명. 근데 그 두 명의 최고임원을 관찰하다보니 이상한 징후가 잡혔다. 그들이 뒤편에서 얌전히 뒤따르고만 있는 저 여자를 이상하게 자주 신경 쓰는 것이다. 남들은 모르겠지. 아주 은근하고 미세했으니. 그러나 내 [눈치]는 그 이상으로 비상하다.
어쨌든.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겠지.
그게 내 결론.
허나 확신은 아직 70%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확률을 좀 끌어올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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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임원들에게 잠깐 쉬어가자고 제안해 봐요.
-윤정희 : ?? 아까 쉬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 : 일단 해봐요. 그들은 아마도 흔쾌히 받아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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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지금 그 ‘몸이 안 좋다’는 분께서 엄청 힘들어 보이시거든. 체력이 나보다 저질인 듯.
그리고 30초 만에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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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 어떻게 알았어? 바로 승낙하던데.
-윤정희 : 일단 근처 커피숍에서 쉬어가기로 함.
-나 : 그럼 99% 확률로 제 추측이 맞을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저 여자애 좀 직접 케어 하셔야 될 거 같은데.
-윤정희 :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윤정희 : 지금 움직일 수 처지라.
-윤정희 : 미안한데. 일단 네가 맡아주고 있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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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러고 싶지만, 내 중국어 실력은 그저 그랬다.
전생에서 무역회사 다닌 폼은 있으니 기본적인 회화는 되지만, 어눌하고 뚝뚝 끊겨서 기분 좋게 담화를 나눌 수준은 못 됐다.
이 경우엔 괜히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윤정희에게 좀 무리해서라도 오라는 답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여자에게 고정시켜둔 내 시야 한쪽으로 이물질이 감지됐다.
“-!!”
이 대리에게 신나게 깨지고 축 처진 어깨로 복귀한 강민재. 근데 또 무슨 생각인지, 가장 접근해서는 안 될 로열패밀리에게 정확히 다가가고 있던 것이었다!!
안 돼!
이 악마 자식아!! 그 여자는 안 된다고!!
하지만 내 소리 없는 아우성은 전달되지 못했고, 강민재는 그녀 옆에 완전히 자리 잡아 떠듬떠듬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위험해.
이건 진짜 위험하다.
나는 강렬한 위기의식를 느끼며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수산물 가게 간판.
===
대게
Usually/长脚蟹
===
이것도 될까?
고민할 시간 따윈 없다.
나는 가게 안으로 뛰쳐들어가서 주인장에게 다짜고짜 따져댔다.
“아저씨.”
“···으응? 학생 뭐 필요···.”
“대게는 snow crab입니다!! usually는 '대개'! '보통'의 뜻이라고요! 구글 번역기 쓰려면 제대로 쓰시지 거기서 오타를 쳐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어어···. 미, 미안?”
“대게가 뭐라고?”
“스, 스노우 크랩?”
“굿!”
띠링!
===
[세종대왕의 언어능력] : 퀘스트 달성!
- 수고하였노라. 옛다.
- 청색 카르마 100 획득!
===
내 짐작이 옳았다.
‘문자가 혼란하니 말이 상통함이 없고, 말이 불통이니 세상에 불편한 침묵만 가득하도다. 세상의 그른 말을 바로 잡거라.’
퀘스트는 딱 집어 맞춤법을 교정하라지도 않았고, 그 대상을 한국어에 국한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그른 표현만 바로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방금 퀘스트 수행으로 청색 카르마가 가까스로 5,000이 넘었다.
나는 바로 [세종대왕의 언어능력]에 모든 포인트를 쓸어 넣었다. 동조율 100%가 상태창에 가지런히 찍힌다.
“···으윽.”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여서일까.
현기증이 강하게 엄습해왔다.
두뇌가 두개골에서 잠깐 가출했다가 돌아왔는데 그 와중에 살짝 자리를 잘못 잡아버린 느낌이었다.
코를 쓱 훑으니 진한 피가 묻어나왔다. 난 간신히 몸을 가누어가며 가게를 나왔다.
그러는 와중에,
세상이, 시야가, 내가 보고 느끼던, 아니 자각하던 것들, 모든 이치, 논리, 관점이 분자 단위로 해체되고,
다시 질서정연하게 차곡차곡 메워진다.
그간 파편적으로만 듣고 말했던 중국어 표현, 성조, 사소한 뉘앙스들이 모조리 의미를 되찾고, 아침엔 그저 암기만 했던 낱말들이 일사불란하게 재정립되어 내 안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느껴졌다.
됐다.
이제 괜찮아.
손수건으로 피를 대충 닦고 빠르게 걸었다.
잘은 몰라도 어쨌든 개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는 강민재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 앞에 섰다. 그리고.
“몸은 좀 괜찮아요? 많이 안 좋아보여서 쉬자고 말씀드렸는데. 제가 괜한 일 한 건 아니죠?”
내 혀가 유창한 중국어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 9. 금빛 - 5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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