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46화 (46/164)

< 9. 금빛 - 7 >

그녀가 열없이 웃었다.

역시나 집에만 있던 애라 그런지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것의 힘을 아직 제대로 모른다. 그때 핸드폰이 지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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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 네 말대로 됐다. 우리 쪽 출혈이 제법 컸다는 것만 알아둬. 제대로 성사 못시키면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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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부가 있겠습니까.

“혹시 모르죠. 갑자기 저 높으신 분들 생각이 확 바뀌어서 그쪽에 진출해볼 생각이 들었을지도.”

“에이 설마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 순간에 막 바뀌고 그래요. 기대는 해봐요.”

"기대는··· 너무 힘든 걸요."

"······."

“기대했다가 안 된다고 누가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님 한 씨가 책임져주실래요?"

그녀는 말하면서도 음악에 감싸인 듯했다.

‘smells like teen spirit’와 같이 nevermind 앨범에 수록된 ‘lithium.’

커트 코베인이 ‘부서지진 않겠다i`m not gonna crack’는 후렴을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너바나의 음악은 놀라울 정도로 잘 섞였다.

그들의 디스토션 사운드는 쉽게 증발된다. 쉽게 깨어지는데 제 몸을 공들여 가누지도 않는 위태로움이 있다. 난 그녀가 왜 너바나를 선호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당장 병마가 몸을 좀먹는 그녀에겐 희망을 섣불리 말하는 음악보다 가느다란 것에 기대어 어떻게든 버텨나가는 정조가 더 공감됐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굳이 희망을 말해야 했다.

“내일까지는요.”

“네?”

“제가 청소년 인턴이라 내일까지밖에 근무를 안 하거든요. 모레부턴 학교 가야 되고. 그래서 애프터서비스는 내일까지밖에 안 돼요. 이틀짜리 단기 서비스인데, 이런 누추한 것도 괜찮으시다면···.”

“푸훗.”

그녀가 작게 웃었다.

“뭐예요 그게. 굳이 그런 사족을 달아야 했나요?”

“사족이 아니라 서비스 약관 설명이라고 해주시죠. 많은 현대인들이 그냥 넘겨버리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중요한···.”

“보통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냥 책임져준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 한 씨는 좀 이상해요.”

“아니, 우리 오늘 방금 봤거든요. 초면에 덜컥 그러는 놈이 있으면 오히려 그놈이 수상한 거 아닌가.”

“됐-네요. 실망이에요.”

“어째서 내가 비난받는 포지션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흰 얼굴은 딱딱했지만 잘 보면 얇은 파운데이션 같은 감정을 펴 발라두었다.

소소한 시간이 소소하게 지나갔다.

커피잔이 우리 바람보다 얕아 금세 바닥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뿌려둔 씨앗이 싹을 틔웠다.

젠린 측 대빵 중 1인, 윤정희가 ‘본부장’이라고 말한 초로의 남자가 직원들을 불러두고 말했다.

“출발하기 전에 하나 공지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대열을 둘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한쪽은 본래 스케쥴을 소화하고, 다른 한쪽은 종로 쪽으로.”

계획에 없던 결정이라 곳곳에서 소란이 퍼졌다. 그러나 본부장은 의문을 배려해주기보다 권위로 덮어버리는 타입이었다.

“조용히들 하고. 숙고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한국까지 와서 탁상공론만 하다가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이에요. 앞으로 젠린은 파트너사와 함께 한국에 뿌리를 내릴 겁니다. 눈과 손으로 아이템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야 앞으로의 사업을 논함은 어불성설···.”

저 꼰대 냄새나는 긴 연설을 짧게 요약하자면, 어쨌든 나가서 돈 될 것 좀 찾아오라는 소리였다.

정확히는 그런 ‘명분’이었다.

난데없이, 어떤 지침도 없이, 갑자기 영업 뛰다 오란 소리에 평직원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샤오메이만큼은 상기된 표정으로 본부장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내게 고개를 훽 돌리더니, 의심과 놀람을 담아 말했다.

“···이거 설마···.”

“제가 기대해보라고 했잖아요. 어때요, 믿어볼만 하죠?”

“어떻게··· 했어요?”

“······.”

그때 타이밍 좋게 문자도 띡 날아왔다. 이 또한 비슷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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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 ···내 생각보다 너무 잘 풀렸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너 본부장한테 뭐 약점이라도 잡아둔 거 있니?

-나 :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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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설명이 쉽진 않을 듯하다.

사실 나도 정확한 인과까진 모른다.

다만 저들 사이에도 알력과 사내정치가 있다는 것, 본부장과 실장 사이에 ‘적과의 동침’ 같은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 그리고 본부장이 살짝 밀리는 처지라는 것까지,

그 모든 걸 눈빛과 말의 색깔들로 가늠했다는 사실을 어찌 이해시킬까.

따라서 본부장을 슬쩍 밀어붙이면 미래의 권력을 향한 ‘충성경쟁’에 불이 붙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아니, 외려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길 은근 바랐을 거다. 실장의 눈치가 보여서 스스로는 나서기 힘들었을 테니까.

물론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그걸 했어야 할 윤정희로선 큰 도박이었겠지만.

···근데, ‘쉽게?’

쉬웠다고?

내가 해놓고도 어이없는 표현이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머리가 잘 돌아가진 않았던 거 같은데.’

눈치는 눈치일 뿐.

그걸 해석해서 논리적 인과를 짜내는 건 완전히 다른 분야의 능력이다. 예전에는 이정도 깊이까지 해석하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Rank A급 재능인 [세종대왕의 언어능력]

언어능력이란 단순히 글을 잘 읽고 쓴다는 사실 그 이상의 것이다. 언어는 사고에 관여함을 넘어 사고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 소리를 한국은 ‘야옹’ 미국은 ‘meow’로 인식한다. 남자에겐 똑같은 핑크색을 여자들은 수십 가지로 구분해낸다. 색에 붙은 이름의 수만큼. 요컨대 언어에 인지가 국한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능력과 지적능력에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다.

물론 이런 미시적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내게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그냥 상태창에 쓰여 있다.

[이 탤런트는 언어이해, 논리적 사고, 추론 등의 지능지수에 관여합니다.]

뭐, 그런 건 일단 옆으로 치워두고.

지금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눈앞의 숙녀에 집중할 때였다. 나는 말했다.

“오늘내일 제가 책임진다고 했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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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와아···. 와아아아···.”

샤오메이의 언어중추를 좀 망가뜨린 이곳은 바로 종로의 ‘낙원상가’

인터넷 쇼핑몰의 발달로 기세가 많이 죽었다하나, 여전히 대한민국 최대의 악기 종합상가이자 밴드맨들의 메카인 곳.

“나, 나, 나, 이, 이런 데 처, 처음 와, 와, 와···.”

“이거 사람이 고장 났네.”

“처음 와 봐요!”

“중국에 이런 데 없어요?”

“물론 악기가게야 있지만, 이렇게 막, 뮤지션들 모이고, 막, 여기저기 시끄럽고, 막막, 으아아 저 사람이 말 건다아아···.”

“······.”

메이가 내 뒤에 쪼르르 숨었다.

낙원상가는 여러 소도매상들이 붙어있는 곳이고, 그런 만큼 건당 수당을 받는 호객꾼들이 눈에 불을 키고 호갱을 찾아다녔다.

부잣집 아가씨가 이런 데 와봤을 리가 없나. 아마 모든 게 잘 정돈된 대형마트에만 가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는 돌아다니다 마음이 동하는 곳에 들어가서 구경했다.

솔직히 눈탱이 안 맞을 자신만 있다면 여긴 어딜 들어가든 비슷비슷했다.

“한 씨. 한국 브랜드들 좀 소개시켜 주겠어요?”

“으음. 일단 이건 재즈맨이란 브랜드. 칼텍과는 저가 일렉 시장에서 양대산맥이죠. 개인적으로 칼텍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소리가 좀 더 깔끔하고 차분하달까.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칼텍은 살짝 날탱이 소리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노동자들 죄다 자르고 공장 인도네시아로 옮긴 다음부터 미묘하게 퀄리티가 낮아졌다는···.”

“이거 좀 쳐봐도 되나요?”

“어, 기타도 칠 줄 알아요?”

“네에. 조금씩은 다 할 줄 알아요.”

“사장님. 이거 좀 쳐봐도 되죠?”

난 통역을 하면서 그녀 옆에 앉았다.

메이는 스트랫 형태의 일렉기타 하나를 빗겨 매고는, 마샬 앰프에 라인을 꽂고 노브를 돌려가며 척척 세팅을 해냈다.

그리고는 아까 커피숍에서 들었던 너바나의 곡들을 하나둘 연주하는 것이었다. 조금 투박하지만, 그 투박함조차 커트 코베인의 오마주라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

“오. 조금 치는 수준이 아닌데요?”

“헤헤. 집에서 할 게 없어서···. 이거 소리가 되게 가변적이고 괜찮네요. 이펙팅만 좀 하면 제 펜더 재규어랑 엇비슷한 소리도 나겠어요.”

“재규어라니. 진짜 너바나 팬이네요.”

“제 보물 1호. 아빠가 사주셨어요. 열두 살 생일 때. 커트가 생전에 실사용하던 기타여서 완전 소중히 다루고 있죠.”

“헐랭.”

“어쨌든 한국악기 좋네요. 역시 유명 메이커들이 한국에 OEM을 맡기는 이유가 있었어. 특히 이런 퀄리티임에도 가격경쟁력이 매력적이에요.”

이 아가씨 이젠 자기가 재벌이란 걸 숨길 생각도 없나보네.

어쨌든 곁가지의 이득이라면 귀찮은 날파리들, 그러니까 신세계무역의 말 많은 훈남들이 쩌리가 된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자, 잘 치시네요.”

악기와 밴드 문화에 무지한 그들로서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꼴들이 꽤 볼만 했다. 뭐랄까, 인싸가 주류에 편입되지 못할 위기에 처함에 따라 어떤 정체성 혼란을 겪는 장면이랄까···.

그리고 또 다른 이점.

샤오메이에겐 개인적인 만족 외에도, 회사 내에서의 입지를 다질 기회도 됐을 것이었다.

“여기 악기사와의 공급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딜러십 계약을 맺으신 거죠?”

“네, 그렇죠. 왜요. 중국에서 떼다가 파시게요? 제가 알기로 그쪽 딜러들도···.”

“비교해봐야죠. 한국 딜러들에겐 더 유리하게 맺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제가 말하기에는···.”

“그럼 이렇게 하죠.”

그녀는 이 가게 저 가게를 쏘다니며 한국의 시장상황을 조사하고 내수용 악기들의 직수 여부를 타진했다.

재벌가 아가씨답게 어린 나이에도 협상력이 제법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고작 인턴. 그러나 이 분야에 정통한 이가 달리 없었으므로, 한참 선배들도 함께였지만 그녀가 이 모든 행사를 주도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자연스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본부장의 결정에 다들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본부장도 나름 계산기를 두들겨본 거겠지.’

샤오메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도 전형적인 재벌가 자제의 경력 쌓기가 목적이었을 거다. 적당한 타이밍에 성과를 몰아줄 셈이었겠지.

근데 마침 우리가 기가 막힌 떡밥을 던지니 좋은 기회다 싶어 덥썩 물었던 거다.

따라서 이걸로 본부장에게 점수를 하나 딴 셈이다. 적어도 임원에게 저지른 실수 정도는 상쇄됐을 테지.

‘···후. 트롤 새기 수습 하나 하기 빡세네.’

난 그녀가 마음에 들어 했던 악기들을 죄다 사서 선물했다.

물론 법인 카드로.

팍팍 쓰라고 했으니 써주는 것이 인지상정.

몇 백만 원이 나갈 줄은 몰랐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어어? 이거 다 주시는 거예요?”

“네. 선물이요. 뭐, 회사 차원에서 드리는 거니까요. 가져가서 사업 구상하실 때 쓰시라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아아···. 우와. 하나는 들고 가도 될까요?”

“예, 그러시죠.”

“근데 한도 기타 칠 줄 알아요? 아니, 쳤었어요? 왠지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간 손끝이 멈칫했다.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기타 칠 때 저 보는 눈빛이 뭔가···. 아련? 슬퍼 보인다고 해야 되나? 뭔가 헤어진 구여친 보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18살짜리가 그런 느낌은 어떻게 아는 거냐. 난 어이없어서 말문을 잃었다.

“······.”

“아, 제가 괜한 걸 물었나요?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그냥 좀 신경 쓰여서···.”

“아뇨, 괜찮아요.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좋아했는데, 재능이 없어서 그만 뒀어요. 그게 전부입니다.”

“아, 그런···. 아쉬워요. 그렇게나 음악을 좋아하시는데.”

“좋아하니까 그만 둔 겁니다.”

“그런가요?”

“네. 제 손은 저주받았거든요. 제가 연주를 하면 제가 좋아하던 음악이 훼손돼요. 전 그걸 견딜 수 없었어요.”

“···뭔가 슬프네요.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메이는 재능이 있으니까요.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이해 안 하셔도 되요. 고작해야 열일곱 살이 음악 좀 하다 그만둔 거니까요. 거기 무슨 깊은 고뇌가···.”

“네에···?”

“음?”

“열, 열, 열, 열일곱 살이요오오···?”

“그런데요.”

“···그럼 나보다 동생?”

“그렇죠.”

“완전 몰랐어요!!”

샤오메이가 펄쩍 뛰었다. 난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요?”

“아,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다는···. 저는 완전히 오빠인 줄 알았어요. 막 당당하고 시크하고, 어른스러우시니까···.”

“애늙은이 같다?”

“아뇨아뇨. 그것도 아니고오오···. 근데 저, 손잡아도 될까요?”

“?? 갑자기?”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요.”

“충분히 이상한 의미입니다만.”

그러나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전에 이미 내 손은 그녀에게 붙들려 있었다.

뭔가 입술이 느물느물 풀려있는 것이 나사도 하나 빠진 거 같고···.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이 사람?

“예전부터 동생하고 이렇게 손잡고 싶었어요.”

“전 메이 씨 동생이 아닙니다만. 아니, 동생은 맞지만, 그런 의미의 동생이라면 주변에도 꽤 많았을 텐데요.”

“아, 그쵸. 죄송해요. 제가 또 결례를···.”

손을 풀면서 또 시무룩해지기에 난 할 수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까지 와서 다 쌓아둔 관계를 허물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손 닳는 것도 아니고 뭐.

샤오메이는 수치심이 좀 반 박자 늦게 찾아왔는지, 동료들 안 보이는 각도에 숨어서 소심하게 내 손가락을 쥐었다. 작은 손이 뜨거웠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옛날에요, 제가 친동생이 있었···거든요.”

목소리가 살짝 물기에 젖었다.

“밤마다 내가 아프니까, 같이 있으면 덜 아플 거라고 손을 꼭 잡아주곤 했어요. 걘 손이 차서, 그러고 있으면 진짜 괜찮아지는 기분이었죠. 근데 걔는 저랑 반대로 건강해서요. 밖에서 누굴 사귀었느니. 학교에 누가 잘생겼다느니. 미주알고주알 다 제 앞에 털어놓곤 했는데, 그럼 아 바깥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랬군요. 힘드시다면 얘기 안 하셔도 됩니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또래를 만났더니. 제가···.”

“······.”

우린 상가 밖으로 나와 잠시 걸었다.

샤오메이는 고개를 숙인 채였으나 흐느끼는 소리는 일절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땀이 배어나왔다. 세상에는 그녀처럼 살갗으로 우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나로선 감히 짐작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조금은 잠잠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죠?”

그 뉘앙스가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각하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 챘었다.

“예. 혹시 불쾌하셨나요?”

“아니요. 속인 건 제 쪽인데요. 상대편에서 알아보았다고 화를 내면 염치없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다 해도 한 씨는 싫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저라면 이놈이 내 돈 보고 접근하는구나 싶어서 얼른 엉덩이를 걷어 차버렸을 텐데.”

“후후. 그런 생각을 할 시기는 이미 지났죠. 저도 제 위치가 어떤지 알아요. 그런 건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죠. 그래서 더더욱 피하지 않기로 했어요.”

“무엇을요?”

“내가 해야 할 일들. 한국행도 제가 자처한 거예요. 제가 제 힘으로 나름의 성과를 거두면 아버지께서도 제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셨거든요.”

“부탁이라면···.”

“제 또래 아이로 동생 한 명을 입양시켜줬으면 한다고요. 이제 혼자는 너무··· 지쳤거든요.”

그랬군.

핏줄을 지독히도 생각하는 재벌가에서 어쩐 일로 타인의 피를 받아들였나 싶었다. 전생에서도 그게 의문이었는데 좀 납득이 됐다.

“그래서 고마워요.”

“뭐가요?”

“본부장님한테 얘기해준 거요. 사실 삼촌도 사정이 있어서 제 편 들 입장은 못 되거든요. 근데 덕분에 제가 작은 성과라도 거둬갈 수 있었어요. 아니었다면 이대로 아무 것도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듣기 민망하네요. 저 좋으라고 한 일인데요.”

“그래도요. 고마운 게 고맙지 않게 되는 건 아니니까.”

“예. 그럼 고마워하세요.”

“네, 고마워할게요.”

그녀가 손을 놓고 저 앞으로 종종종 뛰어갔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물결을 치자 밤안개가 그 파문에 어울리며 기지개를 폈다. 가로등 밑이 지나치게 밝아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도리어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웃고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자기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무슨 소리이신지. 별로 미워하진 않습니다만.”

“들어주실래요?”

“···뭐,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 정도면 됐어요.”

내가 나를 미워한다고? 내가 그런 뉘앙스의 발언을 했던가? 잘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한들 그녀는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걸까?

정경이 희미해서인지 [눈치]로도 읽어내기 힘들었다. 난 눈에 힘을 주어 그녀가 스며든 밤의 거리를 응시했다. 안개가 짙어서, 힘주어 보아도 짙어진 안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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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금빛 - 7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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