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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47화 (47/164)

< 9. 금빛 - 8[재집필] >

[11.26(화)에 올린 내용을 삭제하고 완전히 다른 전개로 재집필한 본입니다. 그때 보신 분도 재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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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돌아와 눕고 1분 지나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느낌이 그랬다는 것이다.

아침이 내 밤과 새벽을 훔쳤다. 난 베개의 멱살을 쥐고 이런 기가 막힌 절도극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베개는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침묵을 지켰다. 공무원을 하면 잘 할 녀석이다.

형법 중에 수면강탈죄 같은 건 없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침실에 난입했다.

그 자체로도 놀랄 일이지만, 그게 빼어난 미소녀라면 경기를 일으킬 일일 것이었다. 윤정희가 흐트러짐 없는 눈으로 침실과 내 헐벗은 몸을 훑었다.

“옴마야!”

“일어났네? 안 일어났을 줄 알고 깨우러 왔는데.”

“여자가 막! 응?! 남정네 방에 혼자 막 들이치고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람. 왜? 나 덮칠 거야?”

“내가 덮쳐질까봐 그렇죠.”

“헛소리 말고 얼른 씻고 나오렴. 밥 차려줄 테니까.

윤정희가 픽 웃더니 침실 커튼을 환하게 열어 재꼈다.

아침 햇살이 날 공격했다.

“노, 녹아내리는 거 같아···.”

“어젠 서서 자더니 오늘은 뱀파이어가 되셨네. 얼른 안 일어날래?”

난 다시 이불 속으로 전면적 후퇴를 감행했지만 침구를 통째로 걷어치운 윤정희로 인해 퇴로가 막혀 결국 화장실로 내몰렸다.

뭐야···. 진짜 엄마 같잖아 이 여자···.

강제 아닌 강제에 따라 세면을 마치고 나오니, 고소한 냄새가 나를 반겼다.

윤정희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관심도 없어서 몰랐는데, 호텔엔 조리도구도 다 구비되어 있는 모양이다.

“헤에.”

요리하는 윤정희라니. 그 자체로 뭔가 클리셰가 파괴된 판타지의 한 장면 같았다. 처녀를 걷어차는 유니콘 같은 느낌이랄까.

심지어 결과물도 훌륭했다.

윤기가 흐르는 오믈렛에 갓 구운 호밀빵, 그리고 갖가지 과일과 야채를 가니쉬로 올린 플레이팅. 사이드로 나온 양송이 수프도 직접 끓인 것 같았다.

“근데 왜 직접 요리를? 그냥 룸서비스 시키면 되잖아요.”

“여기 주방장보다 내 솜씨가 더 좋거든.”

“그게 아니라··· 그냥 번거롭잖아요. 내려가서 사먹어도 되는데.”

“말 참 많네. 해주면 그냥 고맙다고 하고 먹으렴.”

먹었다.

내심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썩어있는 반전을 기대했는데, 주방장보다 낫다는 게 과언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전이었다. 과연 품격이 있는 맛이었다.

“와, 선배 요리 잘 하시네요?”

“왜 의외라는 반응으로 보이지?”

“실제로 의외니까 그렇게 보이죠.”

“다시 뱉어낼래? 나 만드는 것보다 게워내는 걸 더 잘하는데.”

“선배가 말하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으니까 그만 하죠. 근데 진짜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아 같이 식사를 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의 틈새로 그녀가 말했다.

“일단, 어제 일은 실수였어. 사실 네게 떠맡길 일은 아니었지. 근데 그걸 또 잘해버리니까 내가 면목이 없더라. 일단 회사 차원에서 성과금이 나갈 거야.”

“그거 말씀하러 오신 거?”

“근데 그것만 하면 정 없으니까 뭐라도 해주자 싶었지. 어때? 내 배려에 막 감동이 솟아오르지 않니?”

“그러게요. 제 침실만 난입하지 않았다면 세 배는 더 감동적이었을 텐데.”

“시끄럽네. 그냥 순순히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고맙긴 합니다만 좀 얼떨떨해서요. 선배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요?”

“뭐래니. 나 원래 자상한 캐릭터야. 중학생 때부터 일관된 컨셉이라고.”

“자기 입으로 컨셉이라고 했어···!”

“농담이야. 이건 뭐랄까, 미래를 대비하는 일종의 단련? 그런 거지. 내가 말 안 했니? 내 장래희망이 현모양처라고.”

“아주 원대한 꿈을 꾸고 계시네요···.”

“원래 꿈은 클수록 좋은 거야.”

오늘따라 좀 이상한 그녀였지만,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이었으므로 난 그러려니 했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은 계속 여기에만 있죠?”

“그래. 어디 안 나가고 회의만 계속이야. 저녁 연회는 준비하고 있지?”

“제가 뭣 때문에 여기 있는데요. 그럼요.”

“그리고, 옷은, 내가 준 것만, 입고.”

“그렇게 무서운 표정 안 지어도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그녀는 미소를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무서운 미소가 무표정의 미소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나는 점점 그녀의 표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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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분주했다.

저마다 다급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은 흐름이 도도한 강물이 아니라 굴곡마다 유속이 제멋대로인 냇가였다. 누군가는 중앙에서 중심을 잡고 뛰었고 누군가는 변두리에서 치고 받히며 휘청댔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바쁜 오전이었다.

그럼 나는?

오늘의 나는 냇가 바깥에서 홀로 소일했다.

외딴 섬에서 나는 단어를 고르거나 문장을 다듬고,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을 반복적으로 머리에 새겼다.

내 안에 모든 게 준비되어 있으므로 장소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햇빛과 그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며 내키는 대로 발을 옮겼다.

오전이 그렇게 지나 마침내 정오.

로비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나는 으슬으슬한 몸을 쓸어만졌다. 닭살이 오돌오돌했다. 이건 뭐랄까, 내 바람기에 질린 머리 위 그늘의 싸늘한 통보로 다가왔다. ‘오빠 우리 그만 만나.’

그럼 쿨하게 차여드려야지.

나는 다시 햇빛을 찾아 호텔 밖으로 나섰다. 내리쬐는 햇살이 실연당한 몸 구석구석을 위무했다. 나는 양다리의 위대함을 만끽하며 느긋이 걸었다. 점심은 호텔 바깥에서 먹어볼까···.

비가 왔다.

이런 젠장!

양다리는 역시 할 게 못 된다!! 이 시대의 트렌드는 존버라고!! 존버했다 망한 경험은 내 인생 존버밖에 없다!!

나 뭐라는 거니.

빗물이 뇌수에 섞이기라도 한 걸까. 사고가 묽어졌다는 자가진단을 내리며 나는 어쨌든 달렸다. 간신히 빗물을 피했을 때 나는 어느 굴다리 밑에 있었다.

“후욱후욱.”

“후아후아.”

“잉?”

“응?”

뭔가 사운드가 겹쳐서 옆을 보니 선객이 있었다. 심지어 아는 사람이다. 샤오메이가 비에 홀딱 젖어서 오들오들 떨면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메이, 왜 여기 있어요?”

“그러는 한열은 왜 이런 데 있어요?”

“햇빛이 따듯해서 그냥 좀 걷고 있는데 봉변을 당했네요.”

“전 뭘 좀 잃어버린 게 있어서 그거 찾느라···.”

“네? 뭘 잃어버렸기에 재벌가 자제께서 몸소···. 그냥 새로 사면 안 되는 건가요?”

“네. 저한텐 중요한 거라서요. 그리고 재벌가 티내면 안 되니까···. 정체 들키면 미션 실패거든요.”

“아버님이랑 약속이라도 하셨어요?”

“···예. 그럼 온전히 제 능력으로 이룬 게 아닐 테니까. 들킬까봐 주치의도 멀리 떨어뜨려 놨는걸요.”

“흐음.”

난 젖어서 몸이 반쯤으로 줄어든 듯한 그녀를 쓱 보다, 다시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에서 ‘앗!’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손에는 우산 두 개와 핫팩, 그리고 담요 따위가 들려 있었다.

“자. 일단 담요 두르시고. 핫팩은 안쪽에 넣어도 되고 붙여도 돼요.”

“와아···. 고마워요. 한열은 뭔가 도라에몽 같네요.”

“중국인도 도라에몽을 알아요?”

“네. 당연하죠. 유명한 건데. 한열은 우릴 가끔 미개인처럼 보는 것 같아요. 우리도 볼 거 다 보거든요?”

“으음···.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녀는 흔쾌히 웃어주었지만 실제로 찔렸던 나는 화제를 돌렸다.

“찾으러 가죠.”

“네?”

“뭘 찾고 있었다면서요. 점심시간 안에 찾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도와줄게요.”

“아, 진짜요? 그래주시면 고맙지만 좀 미안해서···.”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재벌가 자제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데.”

겸연쩍었는지 어깨의 담요만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들어 날 곧게 보았다.

“한열은 솔직하고 비굴하지 않아서 좋아요.”

“칭찬인가요?”

“네, 진짜 친구 같아서···. 음. 알았어요. 같이 가요. 제가 잃어버린 건 침통이에요. 손바닥만하고, 넓고 납작한 스틸케이스인데···.”

“음, 뭔지 대충 알겠네요. 어디쯤에서 떨어뜨렸는지는···?”

“어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린 거 같아요.”

“좋아요. 그쪽을 좀 찾아보죠.”

서울 지하철을 경험하고 싶다는 메이의 강력한 요청으로 어제는 단체로 역에서 호텔까지 걸어왔던 기억이 있었다.

비 내리는 거리는 어젯밤의 모양새와 퍽 비슷했다. 밤의 어둠에 비실비실한 가로등 불빛을 더하면 딱 지금의 어두침침한 거리가 되었다.

난 어렵지 않게 기억을 더듬어 우리의 족적을 되밟아갔다.

‘···음?’

그리고 보았다.

가로변을 따라 길게 뻗은 배수구의 한복판, 떨어지는 빗물에 역행하며 피어오르는 보랏빛 입자를.

나는 배수구 뚜껑을 열고, 지저분하게 쌓인 낙엽과 진흙 따위를 파헤쳐냈다.

그리고 그것이 손끝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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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Rank C)을 습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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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손을 들어 올리니 손바닥 위에는 거무튀튀한 색깔의 금속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난 저편에서 땅바닥을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는 샤오메이에게 돌아갔다.

“찾은 거 같아요.”

“···네?! 진짜요?”

“뭘 그렇게 놀라요?”

“제가 세 시간 동안 찾았을 때는 없었는데!”

“배수구 안으로 딸려 들어가서 못 찾았던 거 같네요. 누가 다니다 걷어차서 들어간 게 아닐까요?”

“···아아···.”

카르마를 보는 눈이 없었다면 나도 굳이 그 진흙더미에 손을 집어넣진 않았겠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그녀가 침통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더니, 글썽이는 눈으로 나와 침통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고마, 고마워요오···. 한열한테는 어제부터 정말 신세만 지고···. 히이잉···.”

“그러고 보니 이젠 한열이라고 부르네요?”

“어제 연습했어요. 훌쩍. 한열 씨 크흥, 풀네임으로 부르고 싶어서···.”

“발음 괜찮네요. 중간에 그 ‘크흥’만 없으면.”

“아 뭐예요~.”

울다 웃는 그녀의 모습은 빗물처럼 투명했다.

우리는 그대로 돌아가려다, 둘 모두 점심을 걸러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밥이나 먹고 들어갈까요?”

“네에.”

우리는 근처의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그건 내 취향이 아니라 샤오메이의 요청이었다.

“한국 중국집은 그냥 한식이라면서요? 특히 짜장면 먹어보고 싶었어요.”

“짜장면이요?”

“네. 중국에는 원래 없는 요리거든요. 어디 찾으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근데 한국드라마에서 시꺼먼 면을 맛있게 먹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아하. 역시 한류의 여파가.”

“그래서 중국에 한국 중국집 생긴 거 알아요?”

“뭐야 그게···. 국산 노르웨이 연어도 아니고···.”

그러나 중국인인 그녀조차 중국집의 대표 딜레마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짜, 짬뽕도 맛있어 보여요!”

“······.”

“앗, 짬짜면이란 게 있대요. 반반 주는 건가. 이거 괜찮아요?”

“메이, 양다리는 좋지 않습니다. 둘 다 얻으려다 모두 잃는 게 세상의 이치죠···.”

“응?”

“그냥 하나씩 시켜서 나눠먹어요.”

“그거도 좋네요!”

오순도순 나눠먹고 있는데 내게 문자가 하나 띡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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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 아가씨 본 적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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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란 샤오메이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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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같이 밥 먹는데요?

-윤정희 : 진짜 못 산다. 오전부터 사라져서 그쪽 본부장이 완전 안절부절···. 무슨 일이야? 전화도 안 받는다는데.

-나 : 뭐 잃어버린 게 있어서 찾으러 다녔나 봐요. 이젠 찾아서 돌아갈 겁니다.

-윤정희 : 알았어. 그렇게 말해둘게. 에스코트 잘 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나 :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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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핸드폰을 닫고, 짜장으로 립스틱을 덮어버리고 있는 메이에게 물었다.

“핸드폰 꺼뒀어요?”

“···예에. 삼촌이 자꾸 돌아오라고 성화셔서. 맨날 나 어린애 취급하세요.”

“흐음. 메이 건강이 안 좋다면서요. 걱정하신 거겠죠.”

“그건 알지만요.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찾아야만 했어요.”

“더더욱?”

“···네.”

메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건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가 아니라 말에 담긴 무게를 감당하려는 준비동작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머뭇머뭇 말했다.

“···제 동생이요. 의학 쪽으로는 천재였었거든요. 중학교 때 이미 의대에 특례로 입학한 아이였어요. 어렸을 땐 나 내팽개치고 공부만 한다고 징징댔는데. 웃기죠? 걔가 그런 게 다 저 때문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무능해서 못 고친다면 유능한 자신이 고쳐보겠다고.”

“······.”

“현대의학으로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일찍이 중의학을 배웠죠. 다른 건 몰라도 침술 쪽으로는 몇 년 만에 대가의 경지에 올랐다고 했어요. 자기자랑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뉴스에도 뜨고 그랬으니까. 맨날 침통 들고 와서, 언젠가는 이걸로 만병을 다스릴 거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럼 그건.”

“지금은 부적 같은 거예요. 이걸 계속 가지고 있으면 정말로···. 음, 뭐랄까요, 정말 괜찮아질 거 같은 느낌? 그런 거죠.”

먹구름이 중국집까지 쳐들어올 기세로 분위기가 암울해져서, 나는 일부러 과장해 가며 그녀를 타박했다.

“정말 소중한 거였네요. 왜 잃어버리셨던 거예요? 잘 좀 간수하시지.”

“어젠 좀 들떠서···. 죄송해요. 방방대다가 그만.”

“그렇군요. 어제는 들뜨게 만들어드려서 죄송했습니다.”

“아뇨, 죄송하다니 제가 송구합니다···.”

“송구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우린 그렇게 각자 송구하고 죄송하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풋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한열 씨 드릴 거 있는데. 지금은 말고 좀 이따가요.”

“저한테요? 뭘요?”

“비밀이에요. 선물은 까는 순간이 맛이잖아요? 음. 말하고 보니 좀 불안하네요. 성에 안 찬다고 화내지는 말아요?”

“저 공짜는 잿물도 마시는 놈입니다.”

“아하하···. 그게 뭐야. 잿물을 왜 마셔요.”

한국 속담이 생소해 웃는 중국 여자의 입가에는 한국식 중국집의 짜장이 소탈하게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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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훌훌 흘러 검붉은 석양이 지평에 깔렸다. 연회가 곧 시작이었다.

메인홀에 다과와 고급 해산물들, 갖가지 와인들이 쭉 깔리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날 불쑥 불렀다.

“···어? 한열 씨!”

샤오메이가 날 발견하고 쪼르르 다가왔다.

은빛 드레스가 아담한 몸을 풍성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바로 이전 모습인 젖은 시궁쥐 꼴에서 연상하려니 쉽지 않아서 나는 침음했다.

“음? 저 사람들이랑 같이 있던 거 아닌가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 좀 구해주세요. 자꾸 아는 척해서 힘들어요.”

어제의 훈남 1호 2호가 증식해서 다섯 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뭐야 저건. 둘이서 안 되니까 숫자를 불리자는 발상은 대체 누가 떠올린 걸까. 무슨 아이돌이냐. 아님 상대가 대륙 사람이니까 대륙의 기상으로 인해전술이라도 하는 건가.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걷는데, 어쩐지 쨍한 눈빛이 내 낯을 간질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난 금세 파악했다.

“음악 참 지루하네요.”

“그쵸? 진짜 너무하죠? 연회에는 클래식이라고 누가 정했을까요? 구태의연하지 않아요?”

“음. 동감은 합니다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대안이 있지는···.”

“아뇨. 제가 나중에 이런 행사를 주관하면 반드시 마스터 오브 퍼펫을 틀어버리겠어요.”

과연 샤오메이도 범상한 여자는 아니었다.

고풍스런 음식과 고급 샴페인 사이를 질타하는 샤우팅이라. 그거 참 볼만 하겠군.

우린 서로의 드레스 코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연회에 메탈리카를 틀 거라면 ‘Master of Puppets’ 대신 ‘Nothing Else Matters'이 낫지 않겠느냐, 그건 너무 약하다, 절충해서 'Fade to Black'으로 하자, 따위를 논쟁했다.

결국 우린 20곡에 달하는 ‘연회장용 메탈리카 셋리스트’를 완성시키고는, 이 무의미하지만 충만했던 토론에 만족하며 낄낄 웃었다.

“···음.”

그러다 메이가 갑자기 몸을 휘청댔다. 난 그녀를 부축하며 안색을 살폈다. 창백했다.

“괜찮아요?”

“예, 예에. 조금 현기증이 나서. 좀만 앉아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난 그녀를 이끌어 의자가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달달 떠는 어깨에 겉옷을 걸치고 등을 두드려주니 그녀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빈약한 미소였다.

“···아까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가요?”

“아무래도요. 하지만 진짜 괜찮아요. 이 정도는 가끔씩 있는 일이에요.”

“정확히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여기저기요. 완전 종합병원이에요. 심장도 고질병이고. 폐도 좀 말썽이고. 거기에 혈액도 Rh-라서 어렸을 때부터 어딜 나다니질 못하게 하더라고요. 여기도 겨우겨우 설득해서 왔다니까요.”

“내 빈혈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한열도 아픈 데 있어요?”

“아프진 않고 그냥 허약한 거죠.”

“아하. 헿.”

내가 허약하다니까 왜 좋아하는 거냐.

이상한 여자애일세.

그때 단상에서는 한창 식이 진행 중이었다. 신세계무역 측에서 준비한 선물이 공개되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와 샤오메이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심플했다.

“그림이네요.”

“그림이군요.”

끝.

그러나 내가 모를 뿐, 하객 반응을 봐서는 강력한 경쟁자인 듯하다. 나도 분발해야겠지.

“저 다녀올게요.”

“아, 직접 발제하신다고 하셨죠? 힘내세요.”

“···진짜 괜찮겠어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보는 게···.”

안색이 여전히 파리했다. 이마에 맺힌 땀조차 위태로워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등을 떠밀었다.

“괜찮다니까요. 어서 다녀오세요.”

“···네.”

메이의 파이팅을 받으며 나는 단상 위를 올랐다.

사회자가 날 소개했고, 날 알아본 몇몇만 소소히 반응해주었다. 그러나 주원장의 필체가 공개되고 사회자의 대략적인 설명이 덧붙여지자, 이제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거지.

이런 반응이어야지.

만족하며 이제 발제를 시작하려는데, 나는 비명소리가 이상할 만큼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싶어 소란의 진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샤오메이가 쓰러져 있었다.

< 9. 금빛 - 8[재집필]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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