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48화 (48/164)

< 9. 금빛 - 9[재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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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11월 27일(수) 연재분을 삭제하고 완전히 재집필한 내용입니다. 보신 분들도 재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작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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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메이가 쓰러져 있었다.

그건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샤오메이는 사람이 아니라 극의 소도구나 장식처럼 보였다. 창백함을 넘어 아예 낯빛이 없는 밀납인형. 누군가의 고함과 어떤 이의 비명이 부딪혀 만드는 촌극.

붕 떠 있던 현실감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초현실적인 퀘스트 창이었다.

===

[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퀘스트 발생!

- 그녀를 살려.

- 보상 : 처치의 정확성과 신속함에 따라 차등지급.

===

어떻게? 뭘 하라고?

그 순간 당혹감이 스스로 생명력을 갖춘 것 같았다.

내 의지는 묻지도 않고 알아서 등장해서 의문을 쏟아냈다. '난 그녀가 왜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이유를 알아도 방법을 모르고' '방법을 알아도 어설프게 손댔다가는 악화가 될 것이고···.'

따라서 이대로 응급요원이 오는 걸 기다리는 게 옳다고, 나 대신 결론까지 내렸다.

===

[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확장성 심근병증으로 인한 심실세동이다. 최대한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손도 못 써보고 죽는다. 죽지 않아도 어딘가 고장 나게 되어 있어. 움직여.

- 보상 : 자색 카르마 100p

===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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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움직여!!

- 보상 : 자색 카르마 100p

===

퀘스트창의 일갈이 내 안의 다급함을 일깨웠다.

다급함이 당혹감을 단매에 때려눕히고 내 사지말단의 신경들을 우악스럽게 자극했다. 난 스스로에게 떠밀리듯이 단상을 박차고 달렸다.

움직이라는 게 퀘스트 내용이었으므로 움직이자마자 보상이 떨어졌다.

자색 카르마 100p.

카르마 포인트가 모인 순간 나는 [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에 모든 포인트를 몰아넣었다.

도착한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주치의란 새끼가 여기 없고 뭘 하는 건데?! 뭐?! 지시였다고?! 의사가 그게 할 소리야?!”

본부장은 전화를 붙들고 악을 쓰고 있었고,

“경호원! 경호원이면 응급처치 할 줄 알잖아?! 몰라? 왜 모르는데!!”

어떤 임원은 애꿎은 경호원에게 매달려 억지를 부리고,

“왜 안 오냐고! 구급차가 간다는데 길이 막힌다는 게 말이 돼?!”

구급차는 서울의 난해한 교통상황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소란스럽고 다급하고 말과 감정들이 널뛰는 가운데 정작 샤오메이는 방치돼 있었다.

내가 움직일 때만 해도 가늘게 경련하던 몸은, 도착할 즈음엔 그마저 멎어서 완전히 잠잠했다. 끔찍할 정도로 평온해보였다.

주변의 경호원들은 숨 쉬는 것도 죄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중에 가장 빠릿해보이는 사람을 골라 붙들었다.

“제세동기 가져오세요.”

“···예···?”

“제세동기!! AED!! 호텔이니까 당연히 구비되어 있을 거 아냐?!”

그때 누군가가 119 영상전화의 지시에 따라 CPR을 시도했다.

잠깐 지켜보다가 나는 참담함에 눈을 감아버릴 뻔했다.

-아니이! 그렇게 주저앉으면 힘이 안 실려요! 꿇어앉아서! 아니! 거기는 아니야! 거기 누르면 갈비만 나가! 천천히! 천천히! 하나둘! 하나둘!

===

[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저러면 몸만 상한다. 네가 직접 해라.

- 보상 : 자색 카르마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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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응급요원과 퀘스트창이 만장일치가 되어 저자의 무능함을 꼬집었다.

1초를 다투는 상황. 누가 더 CPR 고수인지 토론할 시간 따윈 없다. 난 부득이 그를 밀쳐내고 자세를 잡았다. (곁눈으로 보니 강민재였다. 이 자식은 정말···.)

“후우···.”

심정지.

호흡정지.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에 견디었을 골육은 경직되고 살갗은 축축했다. 그러나 살고자 몸부림쳤을 몸이었다. 내가 할 일은 그 몸부림을 좀 더 연장시켜주는 것. 그것뿐.

난 신속히 움직였다.

기도를 확보하고 흉부에 손을 얹어 압박하는 일이 몇 번이나 해본 것처럼 매끄러웠다.

이론은 [암기력]이 기억했고, [손재주]가 완벽한 세기와 깊이로 조치를 취하고, [유연성]이 팔과 척추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했다. 단언컨대 응급요원에 버금가는 완벽한 CPR이었다.

-좋아요, 훌륭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이제 코 막고 입으로 숨을···. 음. 말 안 해도 잘 하시네.

영상통화 속 119요원의 칭찬이 내 확신을 더했다.

괜찮아. 살아날 수 있어.

그렇게 그녀의 생명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와중, 기다리고 있던 제세동기가 도착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드레스라서 단추를 풀거나 벗기는 게 애매했다. 난 근처에 굴러다니는 나이프로 그냥 옷을 쭉 찢어버리고 그녀의 맨몸에 제세동기의 패드를 부착했다.

셋팅을 마치니 제세동기로부터 ‘심장리듬 분석 중···’이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오더니, 곧 제세동이 필요하다는 지시사항이 떨어졌다. 충전 게이지가 자동으로 올라가고-

“물러서세요. 붙어 있으면 감전됩니다.”

제세동 버튼을 눌렀다.

···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전까지 충실하게 지시를 내리던 제세동기가 돌연 침묵했다. 전극을 잘못 꽂았나 확인해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버튼을 누른 순간 작동을 정지한 것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불량?”

“어어어···?!”

의식이 고꾸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쩌지?

이제 어떻게 하지?

지금 상황에서 제세동기 사용 없이 심폐소생술만으로 충분할까? 가능하다면 몇 분까지 버틸 수 있지?

손발이 저릿하고 머리는 멍해서 사고가 띄엄띄엄 작동했다. 그럴수록 난 핏물이 배이도록 이를 악물었다. 생각하지 마! 그냥 움직여!

난 제세동기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즉각 심폐소생술에 재돌입했다.

젠장!

네가 구하라며!

그럼 어떻게 구하는지는 알려줘야 될 거 아니야!!

그때 내 시야에 꽂히는 한 마디.

===

[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나라면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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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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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지.

===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할 수 있으면 벌써 했지.

그러나 재능은 재능일 뿐이고, 황색 카르마를 투자한다고 해도 얻는 건 경험치 뿐이다. 지식이 머리에 꽂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인체처럼 연약하고 섬세한 기관을 다루는 일을 지식 없이 해치울 수는 없다.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고?’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서슴없이 한 건 거기에 아무 리스크가 없기 때문이다. 매뉴얼만 잘 따르면 적어도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료행위는 다르다.

내 손이 사람의 생명을 만져서 조립해내는 일이다. 개입해서 결정짓는 것이다. 내 판단으로 누군가 죽고 산다는 그 선택의 무게가 나는 감당키 힘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내가 직접 살려낸다는 선택지를 아예 지워버리고 있었다.

확신은 없다.

그러나 짐작가는 방법은 있었다. 그리고 방법이 있는데 시도하지 않는 건 방관이다.

물론 방관은 죄가 아니다. 난 비전문가이므로, 외려 함부로 나대면 의료법 위반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다.

아니, 사실은 있다. 비난할 사람.

내가 나를 비난하게 되겠지.

‘···하면 되잖아! 하면!’

나는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던 사람에게 심폐소생을 맡기고 물러선 뒤, 나는 널브러져 있는 샤오메이의 핸드백에 달려들었다.

항상 소지하고 다닌다더니 역시나 있었다.

침통.

“구급요원은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차가 막혀서···. 십 분은 더 걸린다던데요.”

“···음···.”

퇴로는 막혔다.

샤오메이는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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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술 총론 하급 / 침술 총론 중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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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총론을 찍고 나니 들고 있는 침통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나 그뿐. 동조율 1% 미만에 불과한 중의사의 지식이 막 떠오르거나 하진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허나 다급함은 이번에도 훌륭하게 불안감을 격살하고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다시 샤오메이의 옆에 앉았다. 이번에는 침통을 들고.

그리고.

‘역시 이것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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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술 총론 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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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500p나 하는 학습기능.

그러나 [촬영]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급> 정도로도 최전성기의 경험치를 뽑아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럼 저건 무슨 기능일까.

미심쩍어서 지금까진 저 비싼 값을 감히 지불하기 망설였지만,

지금은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침술 총론 고급>을 클릭한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가 하나씩 삭제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간이 삭제되고,

그 다음에는 색이 삭제되어 세상은 무채색의 윤곽으로만 표현됐다.

색을 없앤 뒤에는 사람과 벽지, 샹들리에 따위의 오브제들을 하나하나 들어냈다.

그건 마치 강박적인 작가가 퇴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집요하게 배제하는 과정.

이윽고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으로 완성된 세계 안에는 나와 흰 살결을 드러낸 샤오메이만이 남았다.

사실은 한 명 더 있다.

메이를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 샤오메이와 닮았지만, 좀 더 앳되고, 키는 훨씬 크며, 언니와 정반대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 난 그녀를 알았다.

‘샤오진···?’

탤런트의 원주인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뱉은 말들은 진공에 가로막힌 듯 먹먹했다.

그때 샤오진이 뭔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 말 역시 내게 닿지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입술을 읽어 다시 단어와 문장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잘 따라오도록 해. 한 번 뿐이야.

그녀가 침통을 연다.

나도 반사적으로 침통을 열었다.

그녀가 침 하나를 비스듬히 들어올린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 침을 쥐었다. 이 별안간의 모사模寫는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제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무심결.

오랫동안 길들여온 버릇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듯, 내가 익숙한 길을 찾아 디디면 그것이 정로正路가 되었다.

거울이 나를 따라하고, 내가 거울을 비추며, 결국엔 나와 거울 중 누가 주체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일체감이 우리를 엮었다.

샤오진이 침을 놓았다.

난 그녀가 짚은 혈 위에 정확히 내 침을 올렸다. 마침내 내 침이 그녀의 침을 뒤덮고, 결국엔 내 침만 남아 샤오메이의 살갗에 꽂혔다.

첫 침을 시작으로, 그녀와 나는 점점 속도를 올렸다.

복부에서 시작된 침술이 겨드랑이를 거쳐 쇄골에서 목까지 장쾌하게 이어졌다.

마침내 명치 부근에서 멈춘 손. 난 이것이 마지막 단계임을 직감했다. 장침을 드는 손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느릿하고 신중했다.

우린 데칼코마니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이 이렇게 말했다.

-제법인데?

내 능력이 정확히 그녀의 능력이므로, 그야말로 자화자찬이었다. 그래서 솔직한 감상을 되돌려주었다.

-겁나 재수 없어.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입매가 샤오메이와 꼭 닮아 있었다.

마지막 장침은 그녀가 먼저 놓지 않았다. 난 그녀를 보고 움직인다는 자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두 몸으로 나뉜 하나의 의지였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결국 한 몸이 된 두 개의 의지였다.

나는 장침을 깊게 찔러 넣었다.

그리고 세계가 부서졌다.

잠시 삭제됐던 시간과 색과 오브제들이 다시금 내 앞에 폭력적으로 배치됐다. 소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쳐 고막이 얼얼했다. 난 아린 눈을 비비며 잠시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그때 누군가 내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자네 뭐하는 건가?!”

누구지?

내 눈이 아직 색적응(?)을 마치지 못해서 얼굴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목소리는 본부장인가 하던 아저씨 같은데···.

“침법이라니! 저게 뭔 줄이나 알고 놓아댄 거야?! 잘못 놓으면 불구가 될 수도···.”

“···쿨럭!”

그때 샤오메이의 거친 기침이 성난 목소리를 단매에 잘라냈다.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 알림창이 요란하게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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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보상으로 황색 카르마를 700p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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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중의사의 침술] : 퀘스트 달성!

- 수고했다. 나쁘진 않았어, 비실이.

- 자색 탤런트 1,000p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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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누구보고 비실이라는 거야.

< 9. 금빛 - 9[재집필] > 끝

ⓒ 달의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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